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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11회 오이타①
가장 괴로워한 사람이 가장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불법(佛法)이다.
제1차 종문(宗門)사건 당시 오이타 동지는 악승들에게서 계속 불합리한 공격을 받았다.
분했다. 괴로웠다.
그러나 지지 않았다. 참고 또 참고 끝까지 참았다.
광포의 스승과 함께 걷는 인생이 바로 진실한 행복의 길이라는 것을
제자들은 확신했다. 동지는 벗을 격려하기 위해 걸었다.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된다고 믿으며.
고생스러운 청춘을 보내는 속에
인생의 영광이 있다
청년에게 보내는 격려
1960년 12월 4일,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오이타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했다. 그 모습은 제2권 ‘민중의 깃발’에 씌어 있다.
연립체육관에서 개최한 결성대회에서 가난과 병 그리고 가정불화로 괴로워한 부부가 학회에 입회해 소생한 체험담을 발표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강연에서 신심으로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생명을 구축해야만 참된 행복을 확립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참석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본 제일의 공덕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행복하다. - 고 단언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이치는 결성대회가 끝난 뒤, 지구간부를 대상으로 연 지도회에 참석했다. 그러고 나서 체육관 옆 광장에 모인 청년부 행사진행요원들 곁으로 갔다. 신이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펼치는 분투를 위로하면서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인간에게는 여러 인생이 있다. 일시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하여 후회를 남기고 생애를 마치는 사람도 있다. 재산이나 지위, 명성을 얻기 위해 살다가 만년(晩年)에 그 허무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가운데 여러분은 광선유포라는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실현하는 성업(聖業)에 인생을 걸자고 결심하여 학회에 모였다. 지금은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청춘일지 모르나 거기에는 반드시 인생의 참된 승리와 영광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도중에 그 신념을 접어 버리고 포기한다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아무쪼록 오늘 모인 여러분은 생애 신심을 관철하여 자신의 사명에 살아가주기를 바란다.”
확신과 기대에 넘친 신이치의 말이 젊은 벗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당시 여자부 구장(지금의 지구리더)인 오키 나미코 씨(오이타창가권 부인부 주사)는 청년을 생각하는 스승의 마음을 새겼다.
“바로 전해의 4월, 이케다 선생님은 오이타를 처음으로 방문하셨습니다. 당시 공항에 도착해 청년부가 다카사키야마에서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선생님은 ‘지금 바로 가자.’며 서둘러 다카사키야마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기한 청년부원들과 기념촬영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다카사키야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청년부를 지킬 테니 분발하십시오.”
오이타의 젊은 벗은 선생님의 진심을 느끼고 더욱더 전진하겠다고 결의했다.
오키 씨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저는 1960년에 개최한 지부결성대회에서 회합이 시작되기 전에 학회가를 지휘하고, 무대 뒤쪽의 행사진행요원 책임자로서 회합장소 밖에 있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모두 자기가 맡은 일에 진지하게 임했습니다.
회합이 끝나고 선생님은 체육관 옆에서 청년부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도 모든 행사진행요원을 불러 서둘러 그곳으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은 20대, 30대에 거의 결정된다. 따라서 앞으로 10년간을 하나의 목표로 삼아 광포의 뜰에서 투쟁하며 자신을 연마하고 고양시켜 나아가기 바란다.’
나날의 생활과 학회활동으로 버거워한 우리 청년부 멤버들에게 마음에 새겨야 할 목표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튿날 오키 씨 일행은 선생님을 배웅하러 벳푸역에 갔다. 오이타 동지들은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까지 청년부를 격려하는 선생님 모습을 눈에 깊이 새겨 넣었다.
가장 괴로워하고 끝까지 투쟁한 사람이
가장 행복해진다
벳푸문화회관으로
1981년 12월, 이케다 선생님은 13년 반 만에 오이타를 방문했다. 제1차 종문사건으로 고통 받은 오이타에서 사제의 유대가 빛나는 감동적인 ‘대역전의 영광스러운 드라마’가 펼쳐졌다.
이 모습은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 상세히 씌어 있다.
“오이타는 승복(僧服)의 권위를 내세우는 사신(邪信)의 승려들에게 비도한 공격을 받았다. 사찰에서는 주지가 학회를 중상하는 기사가 실린 주간지를 들고 나와 ‘학회는 잘못되었다. 방법(謗法)이다!’라며 큰소리로 비난했다. 또 ‘학회를 그만두고 절에 붙지 않으면 장례식에 가지 않겠다.’고 하거나, 장례식자리에서 학회를 공격하며 폭언을 일삼는 악승도 있었다.”
“신이치는 그런 보고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이었다. 동지가 가엾고 불쌍해 견딜 수 없었다.
‘지지 마라! 승리의 아침은 반드시 온다!’
신이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면서 제목을 계속 보냈다.”
12월 8일 오후, 신이치는 오이타공항에 도착했다. 드디어 ‘오이타 결전’이 시작됐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으로 달려온 학회원들을 격려했다. 그 뒤, 공로자 집으로 가서 가족을 격려했다. 그리고 종문사건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벳푸로 향했다. 국도 근처에는 신이치가 탄 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멤버들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해질 무렵, 벳푸문화회관에 도착했다. 회관에는 200명 정도의 멤버들이 모였고, 현관에는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라고 씌어 있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모두 신이치의 방문을 바라고 또 확신했다.
신이치는 대강당에서 동지들과 함께 근행한 뒤 마이크를 잡았다.
“오랫동안 여러분에게 괴로움을 겪게 해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본래, 불자(佛子)를 가장 소중히 해야 하는 것이 승려의 도리입니다.
그런데도 악승들은,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달려온 동지를 계속해서 괴롭혔습니다.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불법(佛法)은 ‘가장 괴로워하고 끝까지 투쟁한 사람이 가장 행복해진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장마(障魔)를 타파하고 당당하게 승리했기 때문에, 반드시 공덕이 가득한 인생이 열립니다. 마침내 봄이 왔습니다.
아무쪼록, 불행에 우는 사람들을 구제하면서 최고의 인생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오이타평화회관에서 개최한 간담회
신이치는 벳푸문화회관을 뒤로 하고 오후 6시가 지나 오이타평화회관에 도착했다. 신이치가 강당에 모습을 나다타내자 그의 방문을 기다린 벗 400명의 커다란 박수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일었다.
신이치는 간담회에서 모든 참석자의 마음을 뒤흔들듯 힘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승리했습니다. 신음해온 기나긴 세월을 지나 사자신중(師子身中)의 충(蟲)을 타파하고, 마침내 정의가 악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성훈을 배독하고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도 악승들로부터 혹독하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학회를 방법(謗法)이라고 비방하는 한편, 표적으로 삼은 사람에게는 아침하고 치켜세우며 교묘하게 부추겨 퇴전시킵니다.
그것이 악지식의 수법입니다. 이 악지식의 본질은 만심(慢心)이고, 이기주의입니다. 그 악지식에 붙어 따르게 되면, 당연히 신심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광선유포에 살아가려면, 청정한 신심을 파괴하는 이 악지식을 예리하게 간파해야 합니다. 함께 신심에 힘썼는데 악승들의 꼬임에 넘어가 학회를 떠난 사람들이 여러분의 주변에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학회라는 불의불칙(佛意佛勅)의 단체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며 몇번이고 설득했겠지요. 그렇지만 ‘학회원으로서 열심히 하겠다.’고 모처럼 결심해도, 또다시 속아 마음이 바뀌어 학회를 비방하고 떠났습니다.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팠을 여러분의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신이치의 말을 들은 동지들의 가슴에는 많은 생각이 복받쳐 올랐다. 그때의 분함이 떠올랐는지 눈물을 글썽이는 멤버도 있었다.
신이치는 말을 이어갔다.
“불법은 ‘변독위약(變毒爲藥) - 독을 바꾸어 약으로 한다.’고 설합니다. 재앙도 행복으로 바꾸는 것이 신심입니다.
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연이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듯이, 고난과 시련을 겪음으로써 경애를 크게 열어 행복이라는 드넓은 하늘에 난무(亂舞)할 수 있습니다.”
“‘광선유포라는 구원(久遠)의 사명을 꿋꿋이 완수하기 위해, 또 일생성불(一生成佛)을 이루고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를 확립하기 위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 그것은 ‘각오한 신심으로 일어선다.’입니다. 마음을 정하고 사자(師子)의 마음을 가지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모두의 생명에 울려 퍼졌다.
이어서 신이치는 선언하듯 강조했다.
“오이타 여러분은 이번 문제로 매우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음단계로 비약하는 점프력이 됩니다.
나는 다시 한번 광포의 대투쟁을 개시하겠습니다. 진정한 창가학회를 만들겠습니다. 여러분도 나와 함께 투쟁합시다!”
참석자들은 결의를 담아 “예!” 하고 대답했다. 가장 많은 고초를 겪은 오이타 동지는 광포의 스승과 함께 결연히 일어섰다.
‘지용의 의(義)’를 실현한 것은 여러분입니다
현간부회
이튿날 12월 9일, 신이치는 회원이 운영하는 찻집을 방문해 부인부 대표들과 간담했다. 그러고 나서 오이타평화회관에 돌아와 동지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이 멤버들은 21년 전인 1960년 12월, 오이타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한 신이치가 격려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사진행을 맡은 청년들이다. 그때 다시 모이자고 약속하고, 1970년에 다시 신이치의 곁에 모였다. 그로부터 11년, 그들은 세번째로 신이치 곁에 모였다.
9일 밤, 신이치는 오이타현간부회에 참석해 모든 동지의 감투를 진심으로 위로했다.
“여러분은 현대사회에서 광선유포의 투쟁을 일으키고, 과감하게 절복을 전개했습니다.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이 제2대 회장에 취임하셨을 때, 회원은 고작 3000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동지가 전개한 사신홍법(死身弘法)의 실천으로 광선유포의 진열은 전 세계로 넓혀졌습니다. 대성인이 말씀하신 ‘지용(地涌)의 의(義)’를 실현한 것은 창가학회이고 여러분입니다.”
“중요한 점은, 난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신심이 깊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공덕만 있는 안락한 신심이라면 숙명전환도, 일생성불도 이를 수 없습니다. 불도수행을 거듭해 숙명을 전환하고,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를 열기 위해 난은 불가결합니다. 난이 있다는 것은 ‘정의’라는 증거입니다.”
청년이여, 광포의 산을 등반하라
12월 10일은 오이타 동지에게, 특히 청년들에게 영원한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다. 이날 저녁, 오이타평화회관에서 오이타현 청년부간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정오가 지나 신이치는 새롭게 출발하는 결의를 담아 ‘정의의 시(詩)’를 발표하고 싶다는 청년들의 마음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시를 지어 선물하겠네!”
사실은 이틀 전에 오이타평화회관에서 멤버들과 간담할 때 종문사건으로 학회를 떠난 남자부원이 거의 없다고 보고받았다. 그때 신이치는 “청년들에게 전진의 격려가 될 수 있는 지침을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또 1981년은 은사 도다 조세이 선생님이 ‘청년훈’을 발표한 지 30주년에 해당하는 해이기에 신이치도 새로운 지침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승과 제자가 한마음으로 신시대를 여는 ‘정의의 시(詩)’가 탄생하려 했다.
신이치는 구술(口述)하기 시작했다. 청년들은 신이치의 입에서 용솟음치는 혼이 담긴 말을 서둘러 받아 적었다. 도중에 현의 대표 멤버들과 간담하고 간담이 끝난 뒤에도 시를 구술하고 거듭 퇴고했다.
오후 6시가 지나 청년부간부회의 시작을 선언했다. 그런데도 아직 구술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부회장 인사가 시작될 때 구술로 수정하는 작업이 겨우 끝났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청년들에게 시를 선물하고 싶다.’는 스승의 자애와 일념이었다.
시계바늘이 오후 7시를 가리키려 할 때, 신이치가 회합장소에 모습을 나타냈다. 신이치가 멤버들과 함께 근행하는 동안에도 다른 방에서는 시를 계속 깨끗하게 옮겨 적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 안에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청년부 간부는 빽빽하게 수정한 글씨가 씌어 있는 원고지를 손에 들고 회합장소에 들어왔다.
신이치는 청년부간부회에서 기대를 담아 이렇게 말했다.
“21세기의 미래 전부를 지금의 청년부 여러분에게 의탁하고 싶습니다. 황금 같은 청년시절을 학회와 함께 꿋꿋이 살아가면서 인생을 훌륭하게, 장엄하게 장식하기 바랍니다. 창가의 대도(大道)보다 더 뛰어난 인생 승리의 길은 없다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지침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조금 전에 구술을 마쳤는데, 지금 발표하겠습니다.”
그러자 남자부 간부가 일어나 낭독하기 시작했다.
시의 제목은 ‘청년이여 21세기 광포의 산을 등반하라’였다.
“‘왜 산에 오르는가?’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전에 어느 저명한 등산가는 말했다. 우리는 지금 광선유포의 산인 21세기의 산을 등반하려고 한다 ··· .”
“21세기는 모두 그대들의 것이다. 그대들의 새벽이자 본무대이다.
그대들이 마음껏 활약하는 총마무리의 크나큰 무대이다. 2001년 5월 3일 - 이날이 우리의 그리고 그대들이 크나큰 목표를 향해 등반하는 날이라고 해도 좋다. 광포 제2막의 승부는 그때로 결정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기 바란다.”
낭독이 끝나자 감동과 서원의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수가 그치자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는 내일 <세이코신문>에 전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이곳 오이타에서 전국으로 발신하겠습니다. 그 의의를 가슴에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또한 1999년 3월, 선생님은 새로운 ‘21세기를 향한 지표’로서 장편시에 가필하여 다시 청년부에 보냈다.
많은 오이타의 벗이 이날의 감동을 깊이 가슴에 새겼다. 후루타 도모코 씨(오이타총현 총합부인부장)는 “생애 어떤 일이 있어도 이케다 선생님의 제자로서 광선유포에 끝까지 살아가자고 서원한 원점의 날입니다.” 하며 회상했다.
당시, 지부여자부장인 후루타 씨는 회합 장소에 입장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1979년, 뉴스에서 선생님이 회장을 사임하셨다는 소식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동요하는 동지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퇴전하는 멤버가 나오게 하지 않겠다!’고 정하고 날마다 격려하러 다녔습니다.
종문 승려들의 교활한 태도와 심한 중상으로 오이타의 멤버들은 분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청년부간부회에서 본 선생님의 의연한 모습과 청년에게 거는 기대, 진심 어린 지도는 우리의 희망이 되어 생명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청년부간부회에 참석한 여자부는 대부분 현재 부인부의 중핵으로 조직의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지금도 오이타의 부인부 대표는 선생님이 장편시를 구술한 방에 매주 모여 정의로운 마음으로 사제승리를 기원하고 있다.
청춘 시절에 새긴 원점을 잊지 않는 사람은 숭고하고 행복하다.
당시 미래부원인 벗의 마음에도 청년부간부회에서 받은 감동이 지금까지 불타고 있다. 후치가미 스스무 씨(오이타이케다현장)는 야간고등학교 2학년일 때 청년부간부회에 참석했다.
“회합 몇 개월 전에 미래부 담당이 ‘이케다 선생님이 오이타에 오실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날을 목표로 일과 학업 그리고 신심에 힘썼습니다. 일을 하고 있는 만큼 힘들었지만, 이케다 선생님처럼 야간학교에서 고생할 수 있다는 것을 긍지로 여겼습니다.”
후치가미 씨는 간부회에서 선생님의 지도와 장편시를 듣고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선생님은 노고를 모두 알아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환경에서도, 선생님과 함께 끝까지 살아가자고 서원한 일이 생애 원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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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