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아내의 생일이 유별나지 않다.
부끄럽지만
한 번도 생일을
축하해 준 적이 없다.
사실,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모친은
일찍 부친을 잃었다.
모친의 모친은
어린 모친을 작은 집에
버려둔 채
재가를 했다.
나로써는
외조부되시는
일찍 작고하신
모친의 부친께서
그 당시에
모친의 작은 집에서
자손없는
제삿상을 받아야 했다.
그 당시에 믿지 않았으니까,
나에게 외조부는
전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정말 낯선 단어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이 남는다.
내가 태어나기
바로 전날이
그 분의 기일이다.
그래서 어릴 적이면
집에 혼자 있는 날이
태반이였다.
모친은 부친의
기일을 맞아
남의 집인 작은 집에서
부친의 제삿상을
빌어먹듯이
차려야 했다.
그렇게 모친은
어린 시절을
작은 집에서
식모처럼 성장했다.
그러니
나에게는
생일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요즘 아이들처럼
거창한 상차림은 고사하고
선물이라는 것도
받은 적이 없다.
아예, 생일이란
말도 어색할 뿐이다.
그런 나에게
성도들이 목회자라도
몇 번 축하를 받은 게
전부다.
물론
결혼을 하면서
사모가 생일을
축하해 주긴 하지만
어젼히 나에게
그런 모든 것들이
낯설다.
도리어
나에게는
생일은 없는 것이 낫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날이니까
언젠가
재가했던
외조모가 집에 와서는
반갑지도 않는데
미역국을 끓여준 적이 있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 국을 먹었다.
그녀는 내가 미역을 좋아하는 지
착각해서는
내게 미역 줄기를
그릇 가득
더 주었다.
나는 미역 줄기가
목구경에 넘어갈 때
그 미끄러움이 싫었다.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래서 국물을 먹기 전에
그 죽기보다 싫은
미역줄기를 급히 없애려고
먼저 먹었을 뿐이다.
그 이후로는
미역국은 쳐다 보기도 싫었다.
지금도 아내가
아이들이며, 누군가의 생일일 때
미역국을 한 솥 가득 끓여 놓으면
짜증이 난다.
한끼, 두끼
몇 끼를 먹어야 하나
하는 불안감이 생긴다.
그러니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해준 다는 것은
내게는 너무나도
낯설고, 어슬프며
그냥 빨리 잊혀지고 싶은
기억하기 싫은 날에 불과하다.
뭐 그리 태어난 날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다들 난리인 지 모른다.
이게 성경적이
아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다만 내가
그리 싫은 것이다.
그게 단지 나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아침에
아내가 운동하러 나가는
나에게
자기 생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루가
그냥 지나갔다.
수요 성경통독이 끝나니
아내의 말투가 이상하다.
예배 후에
책상에 앉아서
정리하고 있는데
아내가 머문
방안은 차갑게
불이 커져 있다.
아직도
그 여운이 깊게 남아 있는 것이다.
늦은 자정 40분 전에
제단 뿔에 나아가
로마서 몇 구절을
더 읽다가
잠을 청했다.
수요통독한 누가복음을
재차 들어 보면서
무거운 잠을 청했다.
어제는
지나갔다.
지나간 어제는
아내의 생일이다.
그 숱한 생일들이
지나갔지만
어제는 더 기억하기
싫었던 또 다른
생일의 일부로
지나갔다.
아직 나에게는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해 줄 만한
그런 여유가 없다.
새벽에 3시 경에
일어나서는
다시 어제 듣다가
잠이 들었던
수요통독 누가복음 10~24장을
마져 다시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독하다 보면
다 잊기 마련이다.
그래서 통독한 것을
녹음해서
홈에 올리고
다시 재차 들어 본다.
차 안에서도
들어본다.
어제는
아내의 생일이였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낯설고
어슬프다.
언젠가
정말 축하해 줄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왔으면 좋겠다.
내게 축하할 일이 없을 때
누군가의 무슨 일을
축하해 준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고통이다.
너무나도 어슬프고
어색한 일이다.
2020.5.21. 누간의 생일에 무감각함을 토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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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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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어제는 아내의 생일이다
안곡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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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1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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