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먼저 말을 건넸다.
"내가 젊을 땐 영화도 보고 야구도 보고 했는데 나이 들면서 다 싫어지더라. 특히 영화가 싫어진 건 나도 좀 놀라워."
내가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나는 가능하면 영화는 보려고 노력해. 그것마저 안 보면 감수성이 메말라 버릴까 봐. 매년 각종 영화제에서 거론됐던 작품 위주로 몰아서 보는 편이야. 최근에 '두 교황(The Two Popes)'을 재미있게 봤어."
그러자 친구가 대뜸 나처럼 매번 하는 일마다 의미 부여를 하다가는 그 일이 이뤄지지 못하면 죄책감에 시달리겠다고 우려했다. 그냥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뭘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고 덧붙였다. 나와 자주 카톡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곳곳에 의미 부여하는 내 실상을 파악한 모양이다. 나는 뭔가 부끄러운 것을 들킨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은퇴하고 나서 몸과 마음이 자유롭고 편할 줄 알았다. 한창 일을 할 때는 며칠만 더 휴가였으면 원이 없겠다 아쉬워했건만. 막상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며 원하는 삶을 즐기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편치 않은 조바심이 올라온다. 하루에 무엇을 꼭 해야 한다는 규칙도 어느새 세우고 그걸 실천하지 못하면 예전처럼 자책하는 일도 잦아졌다.
어느 인터뷰에서인가, 한때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김연아 선수가 무슨 생각으로 훈련하는지 질문을 받자,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고 대답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올림픽 피겨 금메달을 대한민국 최초로 안겨 준 그가, 목표를 향한 과정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무언가 거창한 대답을 기대한 내 자신이 구태의연한 틀을 벗어나지 못한 고루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오래전에 "긍정의 힘'이란 제목의 종교 서적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미국 교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성직자였다. 나름대로 설득력있는 내용도 있었지만, 그가 예를 든 한 부분에서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이 가족과 함께 어느 쇼핑몰을 방문했는데 사람들이 붐비는 주말인지라 주차가 어려울 것 같아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놀랍게도 좋은 자리에 주차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간절히 기도하면 소망이 이뤄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였을 테지만 어떻게 비유를 들어도 그런 비유를 드는지 계속 읽기가 망설여질 정도였다. 지금도 그 책을 떠올리면 다른 내용은 생각나지 않고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한 그 부분만 생생하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일수록 어떤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나 싶다. 한참 기도 중에 비 내리던 하늘이 맑게 개고 무지개가 활짝 펼쳐지면 기도의 응답을 받았노라고 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종종 본다. 우연히 또는 자연 현상으로 일어난 일에도 그들은 의미 부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듯하다. 무슨 일이 발생할 때마다 신의 뜻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경우엔 내가 현실 세계를 사는지 초현실 세계를 사는지 혼란스럽다.
나는 실존주의자의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그에 반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일 뿐 무슨 목적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선택을 해야 하며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내 안에 들여놓는 순간, 그 모든 것은 혼란을 초래하기 시작한다. 신념이 이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성을 이성 위에 놓는 이상,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데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흔히들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자신이 해보지 못한 일에 목표를 두는데, 내게 그런 리스트를 만들라고 한다면 놓치기 싫은 옛 지식의 복원쯤이라고 하고 싶다. 현재의 내가 더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것을 익히는데 최소한 과거에 축적된 지식, 젊은 뇌가 이해했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해력이 떨어진 나를 바라보는 일은 서글프다. 외적인 노화는 쉬이 받아들이면서도 정신적 노화를 받아들이는 건 힘들다. 눈에 보이는 것은 쉽사리 포기가 가능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포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성형을 하거나 진하게 화장하는 사람을 안쓰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보이지 않는 것에 짙은 화장을 하며 살아온 것 같다. 나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어쩜 모르는 척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나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딱히 없음에도 나를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풀어 놓지 못한다. 자존심은 치솟아 있는 반면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진 요즘이다. 오랜 습관과 관성이 느긋한, 자기 계발을 하지 않는 상태의 나를 용납하기 어려운가 보다. 하루 몇 끼를 먹어야 하고 잠을 자고 배설하는 생리적 욕구와는 또 다른 갈증과 욕구가 나를 잠시도 편히 쉬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친구 말마따나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