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불구이로 눈 속여 반란 진압 한잔 술로 맘 잡아 병권 장악
송 태조 조광윤신하이자 친구 찾아가고기 구워 먹으며친분 나누는 척하고반란 막을 작전 짜장수 모아 잔치 베풀어술 마시며 말로 회유스스로 지방 절도사 발령간청하게 만들어중앙집권 강화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얼떨결에 황제가 됐다. 하지만 처음에는 전권을 확보하지 못해 신하와 권력을 나누었다. 그러다 술자리에서 한방에 전권을 장악했다.
겉보기에 그렇다는 이야기다. 실상은 냉철하고 치밀한 인물이었기에 황제가 됐고 한 잔 술, 말 한마디로 권력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송 태조의 힘을 그의 식사 자리에서 엿볼 수 있다.
조광윤은 후주의 장군이었다. 가난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젊었을 때 집을 나와 천하를 떠돌았다. 그러다 곽위라는 절도사의 부하가 됐는데 곽위가 쿠데타를 일으켜 후주의 임금이 됐다. 이때부터 출셋길이 열린 조광윤은 근위대장이 됐다가 세자의 눈에 들어 심복이 됐다. 세자가 왕위를 이어 세종이 되자 조광윤은 오른팔이 됐고 전쟁에서 죽을 뻔한 세종을 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명성을 떨쳤다. 이후에도 전쟁에 나가 계속 승리를 거두며 절도사에 임명됐다. 하지만 충심으로 모셨던 세종이 거란 원정길에 병들어 사망했다. 그리고 황제 자리는 일곱 살짜리 공제에게 돌아갔다.
960년, 거란군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길에 나선 조광윤은 행군 도중 진교(陳橋)라는 곳에 머물며 휘하 장수들과 술을 마셨다. 만취해 정신을 잃고 잠이 든 조광윤에게 장수들이 억지로 황제의 옷을 입혔다. 못 이기는 척 옷을 입은 조광윤은 군대를 돌려 수도로 돌아와 어린 공제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후 국호를 후주에서 송으로 고치고 새 나라를 건국했다. 송나라 건국의 계기가 된 진교의 변(陣橋之變)이다.
송 태조 조광윤
진짜 이렇게 얼떨결에 황제가 됐을까? 후대 역사가들은 마지못해 황제가 됐다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평가한다. 의도된 거사로서 측근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를 속였다는 것이다.
조광윤의 치밀함은 숯불구이의 고사에서도 드러난다. 조선 시대에는 숯불구이를 설야멱(雪夜覓) 또는 설리적(雪裏炙)이라고 불렀다. 이런 숯불구이는 고려 때부터 개성의 명물이었다. 소갈비나 염통을 기름·마늘 등과 함께 굽는데 반쯤 익으면 물에 담가 식혔다가 센 불에 다시 익혀서 먹는다. 연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히 눈 오는 겨울밤 술안주로 먹으면 더욱 맛이 좋다는 것이다.
숯불구이의 옛 별칭인 설야멱은 ‘눈(雪) 오는 밤(夜)에 방문한다(覓)’라는 뜻으로 조광윤이 눈 내리는 밤, 신하인 조보를 찾아가 숯불에 쇠고기를 구워 먹으며 반란을 막을 대책을 의논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설리적(雪裏炙) 역시 ‘눈(雪) 속(裏)에서 고기를 굽는다(炙)’라는 뜻이다.
황제가 신하이자 친구를 만나 고기를 구워 먹으며 술 한잔 기울이는 척 주변을 속이고 작전을 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조광윤은 손자병법을 두루 실천한 인물이다. “전쟁은 적을 속이는 것이다.” 자신을 적당히 숨길 때 상대방이 방심하는 것이니 ‘진교의 변’이나 ‘설야멱’의 고사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술 한잔으로 병권을 장악했다는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의 고사도 있다. 조광윤은 당나라 멸망 이후 각 지역의 반란으로 천하가 어지러웠던 것을 잘 알았기에 장수들이 분산해 갖고 있던 각 지역의 병력을 회수해 중앙집권을 강화하려고 애쓴다.
이 과정에서 믿을 만한 충신인 조보에게 불안정한 천하를 안정시키려면 어찌해야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보가 지방의 권력이 커서 군주는 약하고 신하는 강하니 각 지역 수령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재정을 제한하며 병력을 황제가 회수하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계책을 말했다.
963년 조광윤이 장수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셨다. 술자리가 반쯤 이어지자 그는 “그대들이 없었다면 짐이 어찌 황제가 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짐이 비록 황제지만 절도사의 즐거움조차 누리지 못한다. 황제가 된 후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수들이 깜짝 놀라 황급히 말했다. “천하가 이미 안정됐는데 누가 감히 딴마음을 품겠습니까?” 그러자 태조가 말했다. “여기 있는 장수들이야 어찌 딴마음을 품겠는가? 그러나 어느 날, 부하가 황금 옷을 입혀 황제로 만들어주겠다면 너희들이 비록 원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송 태조가 반란을 막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신하인 조보를 찾아갔다는 고사를 묘사한 ‘설야방보도’.
장수들이 몸 둘 바를 모르고 무릎을 꿇고 어찌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그러자 태조가 말했다. “병권을 내놓고 지방으로 가서 절도사를 하라. 그리고 좋은 전답을 사서 자손에게 물려주고 늙을 때까지 편하게 지내면 군신이 서로 의심하지 않고 서로가 편하지 않겠는가?” 다음날, 장수들이 앞다퉈 병을 핑계로 병권을 반납한 후 지방 절도사로 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술자리에서 말 한마디로 병권을 장악했다는 고사다. 한 고조 유방이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토사구팽의 고사까지 만들어가며 일등공신을 죽인 것과 비교된다.
비록 적이 아니라 신하지만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라는 손자병법을 실천한 모범 사례다. 송 태조 조광윤의 식탁에는 참고할 부분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