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 열차표 예매 외 2편
김병우
전 국방부 행정서기관
여성가족부 ‘남편수기공모전’ 지아비상 수상(2011)
대경상록아카데미 수필창작교실 회원
이른 새벽녘 역사(驛舍) 대기실이 붐볐다. 추석 열차표 예매창구 앞에는 이동식 간이 의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였고, 그 주위를 푸른색 KORAIL 라인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언제부터 앉아 있었는지 모를 한 무리의 사람들로 빼곡했다.
첫차를 타고 서둘러 왔건만 예매 대기 고객 제1구역에는 이미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부득불 제2구역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직 예매하려면 서너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안도감으로 졸음이 쏟아졌다.
무료한 시간을 옆 사람과 잡담으로 때워야 할 판에, 마침 옆에 앉은 사십 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건네 온다. 전방부대에 근무하는 아들이 추석 때 첫 휴가를 나오는데 오는 편은 본인이 버스로 오겠다고 하지만, 부대로 돌아갈 때만이라도 열차로 편하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했다. 오른쪽의 일흔이 훨씬 넘어 보이는 남자 분은 아들이 외국에 나가 있고 서울에 사는 며느리와 손자들의 표를 구하기 위해서 지난 설에 이어서 또 왔다고 했다. 다행히 이번 추석은 연휴 기간이 길고 불경기 탓인지 지난 설 때보다 대기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나 역시 서울에서 수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딸아이의 열차표를 구하기 위해서 꼭두새벽부터 수선을 떨고 나온 터였다. 작년만 해도 티브이 뉴스를 통해 명절 열차표 예매 장면을 보면서, 그런 건 저네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부모들을 생고생시키느냐고 욕을 했었던 나 자신이었건만, 나이를 먹고 보니 별수 없는 딸 사랑 바보 아비가 되었다. 딸아이는 해마다 인터넷으로 시도를 해봤으나 번번이 실패했다는데 어쩌겠는가. 퇴직 후 시간밖에 없는 백수가 자식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해 줘도 된다는 아내의 성화도 작용했다.
기다리는 동안 인터넷 발매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당첨 소식을 연락받은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이탈한다. 내 옆에 앉았던 두 분 역시 아이들이 표를 인터넷으로 발급했다는 연락이 와서 먼저 간다며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대기석에는 대부분 나이든 분들이 주류를 이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나처럼 등 떠밀려 나온 사람, 자식들만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극진한 자식 사랑 어른들로 넘쳐나는 새벽녘 역 광장의 진풍경이 묻어났다.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빠져나간 자리는 기다리는 순서대로 차례차례 앉아야 하는데 새치기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한동안 장내가 어수선해졌다. 급기야 욕설이 오가고 두 노인네가 멱살을 잡고 바닥에 뒹구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말려도 보았지만 격분한 상태라서 소용이 없었다. 남자들 싸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 나이가 몇 살이야?” 주민증 까기에 이르렀다. 옆에서 들으니 여든에, 또 한 분은 여든셋이라고 했다.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게 힘들이 장사였다. 이런 장면을 객지에 있는 자식들이 본다면 어떨까? 싸움은 철도경찰이 오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진정 되었다. 분을 이기지 못해 경찰에게까지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붓는 고약한 노인네들의 모습을 한참이나 더 보고 있어야만 했다. 성질 급한 민낯을 보는 내내 마음이 쓰렸다. 저네들 편하자고 나이든 부모를 사지로 몰아넣은 꼴이 되었다.
눈앞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멋쩍게 웃음이 나왔다. 몇 년 전 딸아이의 정인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생각이 나서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저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쭉 지나 남자친구인 장우석이라고 합니다. 먼저 진정으로 생신 축하드립니다!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했는데 글로 인사드리는 점 죄송합니다. 준비가 되는 대로 곧바로 찾아뵙겠습니다.…… ”
무남독녀인 딸아이는 우리 부부의 걱정과는 달리 객지생활을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다. 자기의 배필감을 편지라는 매개체로 소개하는 센스도 보였다.
범이 ‘자시(子時)’에 태어났으니 어디에 던져 놓아도 적응이 빠르며 잘 살아갈 것이라고…, 계룡산 도사는 딸아이의 사주를 그렇게 설명했다.
추석 열차표 예매는 접수창구에서 업무를 시작한 지 불과 1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모두 끝났다. 발급받은 열차표를 손에 쥐니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흘렀다. 그제야 배고픔이 목구멍으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과 점심 사이다. 모처럼 가족을 위해서 좋은 일 했다는 뿌듯함에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역사(驛舍)를 빠져나오니 햇살에 눈이 부셨다.
가을걷이
오후에 동네 재래시장에 갔었다. 팔순의 노인네가 좌판을 벌여 놓은 틈새로 누런 쌀이 보였다. 뭐냐고 물으니 찹쌀 찐쌀이란다. 구수한 맛이 별미라며 맛을 보고 사기를 권했다.
황금 들판의 가을걷이를 본 게 수십 년도 더 된 것 같다. 유년 시절에는 대구 시내를 조금 벗어나면 외곽지역은 거의 논이고 밭이었다. 초등학교 방학 때 시골 고모님 댁에 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차에서 내려서도 언덕을 넘고 개천을 건너 한참이나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곳이 첩첩산중 같았건만 지금은 대구 시내가 되었으니 반세기 만에 참 많이도 변했다.
어릴 적 그 추억의 시골 마을을 찾고 싶은데 일찍이 대구를 떠났었고 고모님도 이미 돌아가셔서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다. 퇴직 후 고향 땅 대구로 왔으니 옛 기억을 되찾고 싶은 심정이 더욱 간절해진다. 물론 그곳이 지금은 도로 한복판으로 변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고모님 댁은 싸리 대문을 지나면 아름드리 감나무가 떡 버티고 서서 반겼던 마당 넓은 초가집이었다. 이끼 낀 돌담으로 사방이 삥 둘러쳐진 고풍스러운 시골집 담장이 연상된다.
장정들이 탈곡기에 볏단을 넣어 발판에 힘을 실어 한껏 밟으면 낟알이 소낙비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그렇게 타작이 마당 넓은 촌집에서 탈곡기 굉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마당에서 가을걷이하는 동안 장난기 많은 도시 꼬마 손님은 그사이를 못 참고 감나무에 기어오른다. 잘 익은 붉은 감을 욕심내어 따려다가 가느다란 가지 끝부분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쁜 일손에 방해꾼이 되었다. 도심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시골의 이런 모든 것이 그저 신나는 놀이터였다.
벼를 베고 난 확 터인 논바닥에서 이삭줍기도 하고 싫증이 나면 메뚜기 잡기에 신바람이 났었다. 잡은 메뚜기를 벼 이삭에 끼워서 축 처질 때까지 매달고 논바닥을 종횡무진 뛰어다녔다. 뜨거운 가마솥에 메뚜기를 넣으면 타닥타닥 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것도 장난꾸러기들에게는 재미있는 놀이의 일종이었다. 노릇하게 익은 메뚜기를 한입 깨물면 그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는데 반세기가 지났어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추수를 앞두고 벼를 논바닥에서 갈아엎는다는 안타까운 뉴스가 나온다. 턱없는 수입에 불만인 농부들의 항의시위다. 추수할 게 거의 없는 가뭄에 쩍 갈라진 논바닥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삶이 그러했다.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다녔던 아버지였건만 당신의 인생살이는 늘 목마름의 연속이었다. 욕하면서 닮아가는 게 부자지간의 인생길이라 했던가. 박복한 사람은 달걀에도 뼈가 있다고, 그런 아버지의 삶을 그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부단히 몸부림을 쳤었던 못난 청년기가 있었다.
가을걷이처럼 수확의 기쁨만큼 큰 것도 없으리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여러 번의 어려운 고비를 맞은 뒤에 얻은 결실은 그 기쁨이 배가 될 것이다. 나 역시 결혼 후 직장으로 인한 시련을 몇 차례나 겪었다. 남의 손에 떡이 더 커 보인다고 파랑새를 쫓아서 이리저리 방황한 적이 있었다. 직장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가장을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는 얼마나 속이 탔을까. 딸린 식솔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집안의 어른이 그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집 근처 절에 가서 내 남편 제발 방황하지 말고 직장생활 잘하게 해달라고 부처님 전에 눈물로 빌었겠는가. 아내의 간절한 기도 덕인지 길고 긴 터널을 도중하차 없이 무사하게 통과하여 퇴직할 수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것도 내 인생의 가을걷이를 위한 몸부림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찐쌀 한 사발을 사 들고 집에 와서 먹어보니 신기하게도 옛날 고모님이 한 움큼 손에 쥐여주던 바로 추억의 그 맛이다. 씹을수록 맛깔스러운 구수한 맛은 나를 감동하게 했다. 어릴 적 천방지축 뛰어놀던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이끼 낀 돌담의 시골 내음이 입안에 가득 고인다.
도서관
8월의 뜨거운 열기가 도서관 열람실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다. 아침부터 켜놓은 형광등 불빛은 온종일 열기를 뿜어내고 연륜이 쌓인 나무의자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체중이 버겁다는 듯 삐꺽거린다. 곳곳에 나붙은 음식물 반입금지, 개인 소지품 분실 주의 벽보의 글씨가 눈에 띈다.
한쪽 구석 벽면에 걸려있는 이름 모를 서양화에 눈길이 닿았다. 그림 속에는 일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마차를 기다리며 서 있다. 그 옆을 또 다른 마차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간다. 비포장도로 가장자리에 쌓아둔 장작더미가 낯설지가 않다. 꼭 우리네 옛 시골 풍경을 보는 것 같아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정겹다.
“조용함. 그것은 다른 사람에 있어 편안함입니다.” 열람실 한가운데 천장에 매달아 놓은 표지판의 글귀가 선풍기 바람에 흔들거린다. 여러 대의 선풍기에서 나오는 둔탁한 음이 마치 해운대 앞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도서관의 이런 풍경들이 맞춤옷을 입은 듯이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사십여 년 전 시립도서관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입구에서 표를 끊어서 2층 성인열람실로 올라가면 좌석이 몇 개 되질 않는 고풍스러운 작은 도서관이었다. 지정석이 따로 없었으니 먼저 앉는 자리가 그날 종일 지정석이다. 남루한 옷차림에 흰 고무신을 신은 괴짜 고시생들이 그 당시에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그 도서관에서 사시, 행시, 외시 3관문을 패스한 더벅머리 청년이 공부했던 소문난 자리가 있었다. 문 열기 바쁘게 서로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이 치열했다. 운 좋게도 그 자리에 앉는 날은 종일토록 기분이 좋았고 공부가 잘되었다. 책을 보다 깜빡 졸아 흘린 침에 책장이 엉겨 붙고, 낯짝에 인쇄까지 되어 난감한 적도 많았다. 엊그제 일처럼 기억이 선명하건만 강산이 네 번 하고도 더 지나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칸막이가 둘러쳐진 자리에 앉으면 나만의 공간이라는 포근함 때문인지 고향 집 구들방처럼 안온하다. 도서관 체질인가 보다. 나름대로 각각의 사연들을 안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대입 재수생, 취업준비생,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집에서는 책이 잘 읽어지질 않아서… 깨알 같은 활자를 뚫어지라 보고 있는 이들의 표정들이 사뭇 진지하다 못해 눈빛에서 광채들이 난다.
퇴직하고부터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낯익은 얼굴들을 같은 장소에서 늘 마주치게 된다. 십 대에서 팔십 대에 이르기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특히 정기간행물실에는 대부분 노인층으로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메운다. 이들은 여러 종류의 신문들을 종일토록 정독하는 것 같았다. 집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 도서관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특히 이 도서관은 예전의 학교건물을 개조하여 도서관으로 사용하다 보니 곳곳에 그런 흔적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이 도서관을 거쳐 갔었을 무수히 많은 사람을 생각해본다. 그들 또한 유수와 같은 세월에 나처럼 환갑들을 훌쩍 넘겼을 테지.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발걸음을 내딛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되리니” 화두 같은 서산 대사의 가르침을 되새겨본다.
주차장 뒤편에는 예전에 운동장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 잔디가 듬성듬성한 마당이 넓다. 그곳에는 책을 보다가 휴식할 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운동기구들이 있다. 쉴 때는 누구나 찾게 되는데 나 역시 틈틈이 이용한다. 더군다나 오래된 나무들이 어우러져 그늘을 만들어 주니 쉼터로는 안성맞춤이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도서관 입구에서 출입자를 통제하지 않으니 누구나 쉽게 들락날락한다. 그러니 도서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가끔 만나게 된다. 한번은 노숙자 차림의 청년을 마주할 때가 있었다. 오랫동안 깎지 않은 수염, 언제 깜은지 모를 엉겨 붙은 산발한 머리카락, 땟국이 흐르는 얼룩진 옷… 청년실업이 많다 보니 취업준비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초라한 행색으로 봐서는 아닌 것 같았다. 혹여나 취업준비 기간이 길다 보니 제풀에 지쳐버린 ‘3포 족’인지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직장,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일컫는 말이란다. 그들의 공통점은 짐 보따리가 유난히 크며 온종일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게 일과다.
며칠 전 내 옆자리에 그런 유형의 청년이 와서 앉았다.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무엇하고 해서 모른 척하고 그냥 있기로 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궁금증이 발동하여 벽에 비스듬히 세워둔 그 청년의 커다란 보따리를 훔쳐봤다. 그 안에는 플라스틱 밥그릇, 냄비, 컵, 언제 씻은 지모를 옷가지들로 그득했다. 그런 친구가 앉아있는 주변 자리는 꼭 빈자리가 나게 마련이다. 주변에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청년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기로 했다. 하루 세 끼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며 잠은 어디에서 잘까? 짐작하건대 점심과 저녁 시간 전후로 두어 시간가량 자리를 비우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인근에 있는 무료급식소를 찾아가서 매 끼니를 해결하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인데… 가슴이 미어진다. 사십여 년 전 그때와 도서관 풍경이 많이도 변했다. 오히려 그때가 더 힘들었지만 이런 노숙자들이 도서관에는 없었다. 물론 입구에서 통제하여 감히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겠지만…
도서관 문 닫음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전 열람실 공간에 울려 퍼진다. 온종일 엎드려 자던 옆자리 청년은 그 소리에 놀라 부스스 일어났다. 양손에 보따리를 챙겨서 걸어나가는 걸음이 천근만근이다. 하룻밤 누울 자리를 찾아서 밤거리를 방황할 테지.
오늘도 도서관의 하루 시계는 변함없이 흘러갔다. 내일은 또 어떤 사람들로 이 도서관의 빈자리를 가득 메울까? 도서관을 나서면서 들이키는 밤공기의 맛은 세월과 무관하게 어찌 그리 변함이 없는지. 사십여 년 전이나 한결같이 똑같으니 말이다. 어둠이 도서관을 휩싼다. 내일의 새 주인을 기다리면서…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