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아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며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서 들려 누구의 집인 줄도 모르겠다. 귀를 막아 본다. 그런데도 더 강렬하게 들리는 아기의 울음 소리, 나는 애원하는 마음으로 몸을 비튼다. 나는 허벅지에 힘을 꽉 주고 저린 느낌이 날 때까지 발가락을 오므리고 있다. 발가락 끝이 발바닥에 닿도록 힘을 준다. 끊임없이 눈물이 흐른다. 흐느끼는 사람이 저 멀리서 우는 아기인지, 나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정면에 놓인 텔레비전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며 흐려져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장식장도 부풀어 오르다 사라진다. 역겨워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구역질을 하지만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허연 위액으로 짐작되는 어떤 끈적한 물질뿐이다. 저 멀리서 울던 아기는 돌연 숨을 멈춘 듯 조용하다. 사위가 적막하다. 습기 먹은 무거운 공기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다. 숨을 헉헉 쉬면서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입에 들러붙은 것을 떼지도 못하고 마루로 간다. 역겨운 쇠맛이 가시지 않는다. 누가 비밀번호를 누른다, 누가.
“완이 밥은 먹였어?”
아니, 못 먹였다. 마루와 부엌이 연결되어 있는 33평 집이라 몇 걸음 떼지 않아도 도착할 수 있는데 나는 젖병을 가지러 갈 수 없었다. 소음 방지 매트에서 밧줄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손목 두 개와 발목 두 개를 그 단단한 밧줄이 묶었기 때문이다. 아, 저 멀리서 울던 아기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다른 집 아이가 아니다. 나의 하나 뿐인 아들, 완이였다. 완이가 그렇게 울었단 말인가. 그런데도 내가 또 밥을 주지 못했단 말인가. 그래서 20킬로미터 먼 곳에 있던 남편을 근무 시간에 또 집으로 오게 했단 말인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또 자신에게 “개새끼”라고 쉴 새 없이 욕을 했다. 왼주먹으로 오른 팔뚝을 쳤다. 옷을 잡아당겼다. 머리를 쿵쿵 벽에 찧었다. 세상 어디엔가 나보다 더 좋은 엄마 역할을 할 사람이, 이렇게 착한 사람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안정적인 여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집의 짐짝일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세수할 수도 없고, 이제는 아들의 분유도 타지 못한다. 머리를 쿵쿵 찧으려니 남편이 손으로 막는 힘이 느껴졌다. 나는 엉엉 울면 옆집에 또 짐이 될까 봐 숨죽여 소맷자락에 입을 묻고 울었다.
나는 항상 나와 불화했다. 이상적인 나는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직장 생활을 매끄럽게 하며 살림을 깔끔하게 꾸리는 사람이었다. 현실의 나는 종종 시험을 보다 좌절하고, 직장 선배가 요구하는 ’여자다움‘에 저항했으며 매일 매일 없었던 것처럼 새로이 생겨나는 무수한 집안일에 지쳐 있었다. 이상적인 나는 현실적인 나를 비웃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너에게 기회가 없었니, 그렇다고 노력할 때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니, 자원이 부족했니?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대체로 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하는 편이었다. 넘어야 할 장애물이 심각하게 높거나 통과하기 부적절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늘 헐떡였다. 힘이 모자라고 손가락마다 납이 달린 듯 무거웠다. 이상적인 내가 요구하는 것을 해낼 수가 없었다. 난처한 얼굴로 현실의 내가 이상적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차갑게 비웃기만 한다. 알고 있다. 이상적인 내가 현실의 내 뺨을 올려 세우고 멱살을 잡으리라는 것을. 그 다음, 이상적인 나는 완이의 수유 시간까지 잠잠하다가 완이가 울면 또 나타나 이를 반복할 것을. 나는 사랑해서 이 아이를 낳았는데, 왜 울음소리를 들으면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일까, 왜 토사물이 묻은 수건을 빠는 일이 바리데기 빨래 하는 것보다 고달프다고 느끼는 것일까. 자책하다보니 어느 날부터는 이상적인 내가 현실의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밧줄로 묶는 것을 보았다.
밧줄을 풀어내고 세수를 하기까지 1년이 걸렸다. 남편, 내 옆지기는 그 밧줄을 잠시 느슨하게 당겨주기 위해 근무 시간을 내어 나에게 들렀다. 돌이 지나 애가 스스로 걸을 때까지는 남에게 맡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나지만, 6개월 차에 완이를 어린이집에 맡겼다. 고작 3시간, 나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요가를 했다. 가끔 두부 된장찌개를 사 먹고 스타벅스에 들러 크리스마스 에디션 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는 두 달이 넘게 남았건만, 크리스마스 에디션으로 바알갛고 하얀 줄무늬가 들어간 컵이 나온 것이 무척 신기했다. 세상에 처음 나온 사람 같았다. 그러면서도 “크리스마스가 오면 이 고단함이 나아지겠지.” 혼잣말도 해 보았다. 그러다가 맞은 편에 오랜 시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점에 들어가 당분간 읽지도 못할 책을 소중히 품에 안고 나왔다. 이상적인 내가 완고하게 묶어두었던 밧줄이 풀리기 시작했다. 완이가 우는 소리가 비로소 내 옆에서 들리는 소리로 느껴졌다. 남편이 다이어리를 내밀었다. 수유 텀을 쓰라는 뜻이냐 물었더니 그런 게 아니라고 그냥 쓰고 싶은 것을 쓰라며 건넸다. 종종 기형도의 시를 필사하면서 ”찬밥처럼 담겨“를 오십 번은 되뇌었다. 그러다 카카오 스토리에 두어 문장을 간신히 써보기도 했다. ‘좋다, 나쁘다, 힘들다’ 따위의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아 또 자책했다. 몇 달 전과 달라진 것은, 이상적인 내가 현실의 나를 또 몰아세울 때마다 현실의 내가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는 것이었다. 가끔은 이상적 나의 손을 붙잡고 나를 그렇게 대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상적 나와 현실의 내가 손을 붙잡고 서로를 버티게 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생은 역시 모르는 법. 메타포라 10기의 학인이 되었다. 블로그를 열었다. 나는 내지르지 못하고 삭혔다가 냄새가 나는 것도 몰랐던 무수한 단어를 돌같이 굳어진 마음에서 하나씩 길어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틈 내서 운동을 하듯, 나는 시간을 쪼개 내 마음에서 화석이 되려 하는 감정 몇 개를 쓴다. 글을 쓸 때 이상적 나는 현실의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더 잘’ 쓴다는 것의 불가능함을 그도 알아서일까. 글을 쓰고 나서 엔터 버튼을 누를 때 “왜 그것밖에 못하느냐.”고 나를 닦달하지 않았다. 내가 쓴 글이라도 게시해 놓고 나면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아서 나지막한 소리로 읊을 때는 되려 이상적인 내가 현실적인 내게 사과를 할 때도 있었다. “너도 힘들었구나. 그런데 내가 그걸 많이 잊어버리고 있었네.” 현실의 내가 웅크리고 있는 오른손을, 이상적 나의 오른손으로 토닥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때 말해줬더라면 나도 알았을 텐데…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 몇 달만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라고 속삭여주는 말을 들었다. 두 아이를 재우고 난 다음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두 아이가 들을까봐 숨죽여 울 수밖에 없었다. 혼자 있을 때도 웃을 수 있구나.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구나. 그런다고 해도 나를 비웃는 자는 더이상 없겠구나. 기쁘고도 힘들었다. 깊고 높은 산을 마침내 올랐을 때 느끼는 허덕임이란, 소음 매트에서 허덕이던 느낌과 아주 달랐다. 학인 중 한 사람은 잘 버텨왔다고 나를 안아주었다. 나를 잘 모를 텐데 내가 쓴 글에 이렇게 감응을 해 주는 그에게 내 마음의 반을 떼 주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내가 쓴 글이 다른 사람의 귀를 열다니, 이상적 자아는 현실적인 나의 손을 잡았다. “나도 너를 더이상 함부로 대하지 않을게.” 나를 안아 준 학인이 보여 준 따스함이 한없이 잔인했던 이상적인 나도 감동시킨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부터는 머리를 벽에 찧지 않겠다. 왼주먹으로 오른팔을 치지도 않겠다. 그가 나를 안아줬듯, 나도 나를 다정히 대해주어야겠다. 메타포라의 하얀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간 후부터 나는 나를 구원할 방법을 알게 되었다.
첫댓글 고통에 대해 쓴 글은 댓글 달기가 주저됩니다.
내가 감히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좋은 날만 올거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용 말고 글의 형식에 대해 말 할 수 있을까요, 이 글 구성이 아주 좋습니다 라고 말하기도 어렵거든요.
하지만 이건 말 할 수 있어요.이 글을 읽는 동안은 나도 주황이 됩니다. 내 오른팔도 찌릿한것같아요. 이렇게 읽는 사람에게 전이를 경험시키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주황의 글은 너무 생생합니다. 감정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살아있는것 같달까요. 읽다보면 독자가 화자가 되는것같아요. 이런게 주황의 능력아닐까요. 이런 경험을 계속 하고 싶어요. 계속 써주세요 ^^
(( 본문 만큼 진실된 (좋은) 댓글 입니다. 요 ^^ )) 라고 ….
@팬 FAN 감사합니다 팬
여정의 댓글에 힘을 얻었어요. 저는 계속 글을 쓰고 싶은데 얼마 전까지는 피곤해서 못 쓰고, 지금은 쓰면 뭐하지 라는 생각이 조금씩 스며들어서 좀 무기력했달까요. 그런데 여정은 저에게 계속 힘을 줘요. 저만 힘을 얻고 저는 여정에게 힘이 못 되는 것 같아서 미안할 때가 있어요. 우리 같이 밥을 먹거나 차를 한 잔 할 수 있는 때가 오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여정
토닥토닥 우린 이 말이 그리웠울지 모른다. 이 곳 매타포라에서도. / 괜찮아 이런말도 듣고 싶었을지 모른다 . 나는 .
댓글 조차 조심스러운 힘든 글 이지만,주황님의 그 시간을 내가 (내 수준 만큼 ) 느낄수 있는 글 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글 이라 생각하고 고맙습니다.
응원합니다
팬님 읽고 감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산후우울증에 대해 언젠가는 써보고 싶었어요. 수 년이 지난 후에야 그때의 제가 '자기'와 잘 지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힘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황은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런데 너무 아픈 내용이라 어떻게 댓글을 달아야 하나 조심스러울 때가 있어요. 글 쓸 때처럼 썼다 지웠다 한답니다. 산후우울증, 들어는 봤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아픔이라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다만 주황이 글을 쓰면서 길고 어두운 터널을 천천히 빠져나오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메타포라 학인으로 함께하면서 주황의 글을 통해 저도 많이 배우게 됩니다. 힘들었을 텐데 좋은 글 공유해줘서 고마워요.
두통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아침, 유주 님의 댓글을 보았어요. 그만 아파하고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주, 정말 고맙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불화를 풀기 위해서는 불화했다는 것을 아는 것 반, 불화를 풀어가고 싶다는 마음 반이면 완성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상적인 나와 현실적인 나 모두가 주황님을 받쳐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을 본다면 저도 저와의 불화를 풀고 싶게끔 도와주지 않을까 해서요.
아, 문득 주황님의 이상적인 나도 그럴수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이상적인 나도 주황님을 사랑하는 사람일테니까요.
그렇겠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을 이렇게 품어주신 것도 감사해요.
고통과 상처를 마주하기가 버거워 주저하다가도 주황님 글을 보면서 조금씩 용기 내요. 잘 읽었습니다.
정말 힘이 나는 댓글인데요! 글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만나요!
이상적인 나와 현실적인 나와의 차이가 벌이지면 벌어질수록 너무 괴롭죠.... 저도 꽤 오랫동안 그랬어요... 난 왜 이것밖에 못할까 하면서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그때, 누군가가 저에게 말해줬어요. 이제까지 많이 애쓰고 살았다고.. 전 그 말을 듣고 자책에서 벗어나기 시작한거 같아요. 사실 자책에서 벗어난 지 얼마되지 않았어요. 첫걸음을 뗀 정도죠. 왠지 동지를 만난 기분이 듭니다~ ^^ 주황님도 저도 화이팅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바다의 글도 잘 읽었어요^^
" 나는 내지르지 못하고 삭혔다가 냄새가 나는 것도 몰랐던 무수한 단어를 돌같이 굳어진 마음에서 하나씩 길어내기 시작했다"
이 문장이 마음에 오래 남아요. 주황님을 안아주었던 학인의 마음으로 글을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저도 물결의 글, 깊이 공감하며 읽었어요.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의 묘사가 많은데도 참 잘 읽히네요, 쓰기 능력자!
저도 산후 우울증을 앓았어요. 이래저래 직장도 없었던 상태라 자존감이 많이 낮고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나를 구원할 방법을 알게되었다'는 확신으로 문장을 끝냈을 때, 감동했고 공감했어요.
글로, 이야기로 마음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셨군요…산후우울증이 심해서 둘째의 첫돌까지 기억이 안 나요ㅜㅡ 저도 은조님과 글로 마음을 터놓고 싶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