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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스터디 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조금 난해합니다(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8장 논리학의 주제로서의 사고에 관한 맑스주의의 입장
헤겔 이후로는 오직 한 방향, 유물론의 길로 나아가는 것만이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헤겔이 해명한 사고의 모든 변증법적 도식과 범주는 인간의 집단적 의식에 반영된 보편적 형식과 법칙, 즉 사고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외적 세계의 발전에 관한 형식과 법칙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일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1840년대 초에 이미 헤겔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유물론적으로 재정립된 변증법을 유물론적 세계관을 발전시키는 논리로 삼았다.(인간223)
이와 같은 작업은 포이어바흐가 행한 논증의 직접적 계승으로 간주될 수 있다. 포이어바흐 철학의 용어로 그가 한 논증을 표현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자아나 이성, 나아가서 두뇌가 사고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두뇌를 통해 자연과 접촉하고 통일됨으로써 사고한다. 자연과의 통일로부터 분리되면 인간은 더는 사고하지 못한^다. 포이어바흐의 논증은 여기서 그치고 있다.(인간223-224)
그러나 맑스는 포이어바흐의 논증을 이어받으면서 인간도 자연과 직접적 통일만 이뤄서는 사고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인간은 오로지 사회와 통일을 이룰 때, 즉 인간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삶을 창출하는 사회적⋅역사적 집단과 통일을 이룰때만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육체로부터 분리된 두뇌가 사고할 수 없듯이, 인간이 자연과 접촉하는 터전이자 수단인 사회적 관계(즉 자연과 통일을 맺고 있는 인간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관계)망으로부터 분리되면, 인간은 사고할 수 없는 것이다.(인간224)
따라서 인간사고의 본성의 문제, 관념적인 것의 문제는 논리의 발전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완전히 해명된다.(인간224)
관념적인 것이란 외적 세계를 인간활동의 형식, 즉 인간의식과 의지의 형식으로 반영한 것으로 객관적 실재의 주관적 상을 말한다. 관념적인 것이란 개별적인 심리적 사실은 아니며 생리학적 사실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사회역사적 사실로서 정신적 활동의 산물이며 형식이다. 또한 그것은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삶의 사회적 생산 주체인 인간의 사회적 의식과 의지 속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맑스는 “관념적인 것이란 인간 두뇌 속으로 옮겨져서 번역된 물질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인간224)
철학사에서 관념적인 것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결국 유물론과 관념론이라고 하는 양극으로 귀착된다. 맑스 이전의 유물론은 관념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과 대립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유심론적 입장이나 이원론적 입장을 정당하게 거부했으나, 관념적인 것을 한 물체가 다른 물체 속에 반영된 상, 즉 유기적으로 조직된 물질의 속성 내지 기능으로 이해했다. 관념적인 것^의 본성에 관한 이런 유물론의 보편적 견해는 데모크리토스⋅스피노자⋅디드로⋅포이어바흐로 이어지는 일련의 유물론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구체화됐으나 유물론은 사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맑스-레닌주의적 문제 해결의 출발점을 이루게 된다.(인간224-225)
맑스 이전 유물론의 취약점은 프랑스 유물론자들(특히 카바니 Cabania와 라메트리) 사이에서 하나의 경향으로 나타났고, 그리고 그 뒤에 포이어바흐와 19세기 중엽의 소위 속류유물론(뷔히너⋅포크트⋅몰레쇼트 등)에서 독자적 형태로 발전했다. 그 취약점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비역사적이고 인간학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입장에 묶여 있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관념적인 것을 두뇌의 물질적⋅신경생리학적 구조 및 그 기능과 동일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낡은 유물론은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했으나 유물론을 역사에까지 적용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인간이 지닌 온갖 특성이 외적 세계와 함께 자기자신을 변형시키는 인간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 때문에 관념적인 것을 사회적 인간의 감성적⋅대상적 활동인 노동의 산물이나 능동적 기능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관념적인 것을 수동적 관조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는 육체에서 발생하는 외적 세계에 대한 상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역사 발전과정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세대들이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시키는 형식이나 그 산물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관념적인 것의 본성에 대한 이해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수행한 중요한 유물론적 전환은 기본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능동적으로 관계한다는 측면과 결부된다. 이것은 주로 플라톤⋅피히테⋅헤겔의 관념론, 레닌이 표현했듯이 ‘영리한’ 관념론에 의해 부각된 측면인데, 그들은 이것을 단지 추상적⋅일면적으로, 즉 관념론적으로 강조했을 뿐이다.(인간225-226)
전통적인 객관적 관념론 체계의 특성은 사회 문화의 총체 및 그 조직 형태를 개인들로부터 분리시켰으며, 더구나 사회적 생산관계(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포함해서)의 보편적 산물을 개인과 대립시켜 개인의 의지나 정신을 지배하는 특수한 사회적 힘으로 전도해 버린 데 있다. 이 때문에 “노동분업 내에서 규정된 다양한 개인들의 협업을 통해 발생하는 저 사회적 힘, 즉 증대하는 사회적 생산력은 개인들에게는 그들의 단결된 힘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외부에 존재하는 소외된 힘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들의 협업이 계획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힘의 근원이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조절할 수도 없다. 오히려 반대로 그 힘이 인간의 행동과 의지와는 독립적인 일련의 특수한 국면이나 단계를 거치면서 인간에 대해 최고의 지배자가 된다.” 개인들을 지배하는 사회 전체의 힘은 직접적으로 국가, 사회의 정치제도, 도덕적⋅윤리적 체계, 법률적 규제, 사회적 행위의 규범, 감성적⋅논리적 규준이나 기준 등등의 형태로 나타나서 작용한다. 개인은 어릴 때부터,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개별적 사물이나 상황의 외적 현상 혹은 그 자신의 내재적 욕구⋅성향⋅필요보다는 사회적으로 표현되고 설정된 요구와 규제를 훨씬 더 고려한다. 사회 전체는 객관적 관념론의 ‘근본’원리에 의해 신비화된다.(인간226)
관념론적 환상의 현실적 토대를 폭로하면서 맑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개인이나 세대가 현실 속에서 주어진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자본의 형태, 교환의 사회적 형태 등 생산력의 이런 총합이 바로 철학자들이 ‘실체’ 혹은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고^ 신성시하며 공격했던 것의 실질적 토대다.”(인간226-227)
그러나 예외 없이 모든 보편적 관념들은 사고활동의 일반적 도식이나 인간이 전혀 손대지 않은 자연에 대한 수동적 관조 행위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사회가 자연을 실천적으로 그리고 대상적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보편적 관념들은 개인들의 목적의식을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형식, 즉 현실적 활동의 형식으로서 발생하고 작용한다. 더구나 이런 관념들은 비록 그것들이 개인들의 활동을 통해 발생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의식이나 의지와 독립해서 그리고 전혀 무의식적으로 정신문화의 체계로 구체화된다. 직관 속에서 보편적 관념들은 인간활동에 의해 창출된 사물들의 형식으로, 혹은 인간활동에 의해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소재에 각인된 형태(모습)로, 혹은 외적 실체로 외화된 인간의 목적의식의 형식으로 나타난다.(인간227)
인간은 자연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사회적 노동과정에 포섭돼 능동적 인간 실천의 수단⋅조건⋅재료 등으로 변형되는 그만큼 자연과 관계한다. 더욱이 인간노동이 아직 실제로 아무런 변화를 가하지 못한 별이 반짝이는 천체조차도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탐구 수단, 사회적 인간 유기체의 생명활동을 위한 ‘도구’나 신체의 ‘기관’ 그리고 자연시계⋅달력⋅컴퍼스 등으로 사회 내에서 변형될 때 인간의 관심을 끌고 사색의 대상이 된다. 자연적 소재의 보편적 형식이나 양식은 이런 소재가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에 해당하는 문명이라는 객관적 신체의 소재로 변형되는 만큼 드러나고 실현된다. 따라서 ‘물자체’의 보편적 형식은 직접적으로 ‘비유기적 신체’의 기능을 하는 능동적 형식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인간227)
관념적인 것은 오직 외적 자연에 상응해 이뤄지는 사회적 인간(즉^ 대상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의 활동형식(양식⋅상)으로서만 직접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물질 체계는 바로 객관적 세계와의 통일 속에 있는 사회적 인간이며, 인간은 이 체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특수한 생명활동을 실천할 수 있다. 관념적인 것은 결코 개인들의 두뇌 속에서 발견되는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노동 활동의 주체인 인간의 특수한 기능이고, 선행하는 발전과정에 의해 창출된 형식 속에서 완성된다.(인간227-228)
사고하는 인간과 자연 자체 사이에는 자연을 사고로 변형시키고 사고를 자연물로 변형시키는 매우 중요한 매개 고리가 있다. 이 매개 고리가 실천이며 노동이고 생산이다. 자연의 대상을 관찰과 사고의 대상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생산(이 말의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이다. “가장 단순한 ‘감각적 확신’의 대상조차도 사회적 발전, 산업, 상업적 교류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주어진다.”(인간228)
따라서 맑스가 언급했듯이, 포이어바흐는 자연에 대한 관조(직관)의 관점에 머물렀고, “결코 감성적 세계를 그 세계를 구성하는 개인의 감성적 생명활동의 총체로서 파악하지 못했으며” 그리고 그의 관조 대상이 인간의 공동 노동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자연 자체에 대한 상을 포착해 내기 위해서는,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발달된 심미적 관조의 단순한 노력을 훨씬 뛰어넘는 강도 높은 노동과 노력이 요구된다.(인간228)
직접적 관조(직관)에 주어지는 ‘자연 자체’의 객관적 특성은 인간의 변형 활동에 의해 자연에 각인된 특성이나 형식과 결부돼 있으며, 더욱이 자연적 소재의 순수 객관적인 모든 특성들은 사회적 인간의 주관적 활동의 과정과 결과로 획득된 상을 통해서 직관에 주어진다. 관조는 대상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변형시키는 대^상적 활동(대상에 대한 활동) 및 이런 주관적(실천적) 활동의 결과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인간228-229)
그러므로 자연의 순수 객관적 상은 관조를 통해 인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인간의 활동, 즉 사회적 활동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사고는 자연 자체의 상을 그려 보고자 하는 목적을 설정했을 때, 이런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참된 상’을 변형시키는(변화시키면서 때로는 왜곡시키기도 하는) 그와 같은 활동만이 ‘주관적 왜곡’이 없는 왜곡되기 이전의 자연 자체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인간229)
결국 실천만이 관조에 주어진 대상의 특성 중에 어떤 것이 자연 자체라는 객관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것이 인간의 변형 활동인 주관에 의해 자연에 유입된 것인지를 밝힐 수 있다.(인간229)
따라서 “객관적 진리가 인간사고의 속성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다. 인간은 진리, 즉 사고의 실재와 힘, 현세성을 실천으로 입증해야 한다”고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두 번째 테제에서 말하고 있다. “실천과 유리된 채로 사고의 실재 혹은 비실재를 논하는 것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다.”(인간229)
이런 입장은 이제까지 철학자들이 직면했고,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여러 난점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인간229)
결코 심리학적 문제라고 볼 수 없는 소비와 생산의 관계를 취급하는 정치경제학의 문제를 분석할 때, 맑스는 사고의 실재 혹은 비실재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즉 “만약 생산이 소비의 외적 대상을 제공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마찬가지로 소비도 생산의 대상을 내적인 상⋅필요⋅충동⋅목적 등 관념적으로 정립시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맑스가 밝혔듯이 소비는 생산의 내적 계^기, 생산 자체일 뿐이다. 왜냐하면 생산은 외적 대상을 창출할 뿐 아니라 이 대상을 생산하고 재생산해 적절한 방식으로 소비할 수 있는 주체도 창출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생산은 인간의 능동적 실천형식 자체를 창출하거나 혹은 일정 형태의 대상을 산출해 그것을 목적에 맞게−사회적 유기체 내에서 그것의 역할과 기능에 따라−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창출한다.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는 인간의 능동적⋅현실적 능력의 형식 속에서 대상은 생산의 산물로서 인간활동의 내적인 상⋅욕구⋅충동⋅목적 등 관념적으로 존재한다.(인간229-230)
따라서 관념적인 것은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인간육체 조직과 관련해 볼 때도 그와 무관한 특성을 지니고, 마찬가지로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사물의 형식으로 실현되고 대상화되는 물질과 관련해서도 동일한 외적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도예가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항아리의 형태는 점토의 부분을 이루는 것도 아니고, 혹은 도예가로서 기능하는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선천적 신체조직의 부분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자기가 만든 대상에 알맞도록 자신의 신체기관을 훈련시키고 사용하는 한에서만 인간은 자신의 활동과 부합하는 대상을 창출하는 사회적 인간활동의 능동적 형식의 담지자가 된다.(인간230)
관념적인 것, 즉 사회적 인간활동의 능동적 형식이 대뇌피질의 신경세포 구조의 형태로 구체화되는, 오늘날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프로그래밍’되는 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관념적인 것의 물질적 특성은 그 자체가 관념적인 것은 아니고, 다만 관념적인 것이 개별 유기체 속에서 표현된 형식일 뿐이다. 그 자체로 관념적인 것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인간 삶의 활동형식으로서 그것은 삶의 활동대상⋅산물의 형식에 상응한다. 관념적인 것을 두뇌의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속성에서 설명하는 것은 마치 노동 생산물의 형식인 화폐를 금의 물리학적 특성으로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 이 경우에 유물론은 결코 관념적인 것을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물질의 과정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여기서 유물론은, 이런저런 형식으로 대상을 산출하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인간활동의 형식을 취하는 관념적인 것이, 두뇌 속에서 발생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의 도움으로 사회적 생산을 수행하는 인간의 현실적 대상적 활동(사물에 대한 활동) 속에서 발생하고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인간230-231)
따라서 관념적인 것에 대한 과학적 규정은,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사회적 삶의 사회적 생산에 고유한 ‘해부학과 생리학’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맑스가 말하는 “지각 가능하게 존재하는 인간심리학”이란 끊임없이 새롭게 재생산 활동을 벌이는 인간노동이 만들어낸 세계를 의미한다. 인간심리학이라는 ‘열린 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심리학은 현실적 과학일 수 없다. 맑스가 관념적인 것을 “인간 두뇌 속으로 옮겨져서 번역된” 물질적인 것이라고 규정했을 때, 그는 두뇌를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발전하는 인간 두뇌를 염두에 둔 것이다. 낱말 체계, 구문론적 체계로부터 시작해서 논리적 범주에까지 이르는 인간 두뇌 활동의 모든 형^식은 사회적 발전의 산물들이고 형식들이다. 이런 형식으로 표현될 때에만, 외적이며 물질적인 것은 사회적 사실 혹은 사회적 인간의 속성인 관념적인 것으로 변형된다.(인간231-232)
먼저, 관념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물질적인 것은 언어로 표현되는 외적 사실과 일치한다. 이때 “언어는 사고의 직접적 현실태다”(맑스). 그러나 언어 자체는 두뇌의 신경생리학적 구조와 마찬가지로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언어는 관념적인 것의 표현형식일 뿐이고, 관념적인 것이 물질적⋅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고(즉, 관념적인 것)를 언어(용어체계나 표현체계)와 동일시하는 신실증주의자들은 관념적인 것을 두뇌의 구조나 기능과 동일시하는 과학자들처럼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질적인 것은 (1) 그것이 일반적으로 유의미한 언어형식(그림⋅도형⋅모형 등을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으로 직접 표현될 때, (2) 단순히 언어의 물질적 형태로서 ‘발음’이나 ‘용어’로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대상을 갖는 능동적 인간활동의 형식으로 변형될 때, 비로소 (단순히 개별 신체기관으로서의 두뇌 속에 옮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두뇌 속에 옮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낱말 혹은 그림이라는 언어에 의존해 대상을 능동적으로 재생산하는 능력이 창출됐을 때에만, 즉 낱말을 행위로 바꾸고 행위를 통해 낱말을 사물로 바꾸는 능력이 창출됐을 때에만 대상은 관념화된다.(인간232)
스피노자는 이 점을 훌륭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낱말로 표현되는 적합한 관념들을 실재 공간 속에서 특정한 낱말의 형식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결합시킨 것은 충분한 근거를 갖는 일이었다. 여기서 그는 물질의 본질을 표현하는 규정이라 할 수 있는 대상의 관념적 상을, 다소 우연적으로 선택된 대상의 속성이나 그 외적^ 징표를 고정하는 명목적이고 형식적인 정의와 구분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원은 중점에서 원주까지 그은 선분의 길이가 동일한 도형으로 명목상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원의 본질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원의 파생적이고 부차적인 어떤 속성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정의가 실제로 사물을 거의 만들어 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을 때는 또 다른 문제다. 그 경우, 원은 한 끝이 고정돼 있고 다른 끝은 움직이는 선에 의해 그려진 도형으로 규정돼야 한다. 이런 정의는 실재 공간에서 사물을 제작할 수 있는 양식을 제공한다. 그리고 여기서 명목상의 정의는 관념 대상의 공간적 윤곽을 그려 나가는, 사고하는 육체의 실질적 행위와 더불어 발생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말로 표현되는 기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적절한 관념, 즉 관념적 상도 갖게 된다. 이것이 관념적인 것의 본성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다. 말⋅언어에 의존해 또 대상에 대한 욕구와 창조 행위의 물질적 양식을 결합해 대상을 공간 속에서 재창조하는 능력이 있는 곳에 관념적인 것은 존재한다.(인간233)
그래서 관념적인 것에 대한 규정은 특히 변증법적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외적 사물의 형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능동적 능력으로서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비존재인 존재이며, 외적 사물을 생성하는 주체의 활동이 이뤄지는 단계에서 내적인 상⋅욕구⋅충동⋅목적 등의 형태로 외적 사물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관념적 존재는 그 사물의 실재적 존재와 구별되고, 또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두뇌의 구조는 물론 자신을 주관 ‘내부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언어와도 구별된다. 대상의 관념적 상은 그것이 외적 대상의 형식이라는 사실 때문에 두뇌의 구조나 언^어와 원리적으로 구별된다. 또한 관념적 상은 그것이 자연이라는 외적 물질에서 직접적으로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유기적 신체에서 그리고 주관적 상을 담을 수 있는 언어에서 대상화된다는 사실 때문에 외적 대상 자체와도 구별된다. 결국 관념적인 것은 대상의 주관적 존재 혹은 대상의 ‘타자존재’다. 헤겔이 표현했듯이, 타자존재는 다른 대상을 통해서 하나의 대상이 존재하는 상황을 일컫는다.(인간233-234)
인간의 사회적 활동의 형식인 관념적인 것은 자연을 인간활동의 대상과 노동의 대상으로, 나아가서 노동의 산물로 변형시키는 과정이 발생하는 곳에서 존재한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관념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순환적 운동 속에 존재한다. 먼저, 노동과정에 포함되는 외적 사물의 형식은 대상적 활동의 주관적 형식 속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주관적 형식은 고등신경 활동의 메커니즘이라는 형태로 주관 속에 객관적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이런 행태변화의 역순이 나타나게 된다. 즉 언어로 표현되는 관념은 하나의 행위로 변형되고, 이런 행위를 통해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외적 사물의 형식으로, 하나의 사물로 변형된다. 이렇게 반대되는 두 계열의 변화 과정은 완결된 순환과정을 형성한다. 즉 사물→행위→언어→행위→사물로 나타난다. 관념적인 것, 사물의 관념적 상은 이렇게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순환적 운동 속에 존재한다.(인간234)
관념적인 것은 기호로, 즉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볼 수 있거나 들을 수 있는 외적 언어로 직접 구체화된다. 그러나 이런 언어는 그 자체로 머물면서 동시에 다른 어떤 존재임이 드러난다. 언어는 그 자체로 ‘관념적 존재’ 혹은 눈이나 귀에 의해 직접 지각되는 물체의 형식과 완전히 구별되는 ‘의미’이다. 기호 혹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낱^말은 기호로 나타낸 대상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공통점’은 오로지 말을 행위로 변형시키고 그 행위를 통해 다시 말을 사물로 변형시키는 활동(다시 역순을 거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실천과정과 실천의 산물을 지배하는 과정에서만 발견된다.(인간234-235)
인간은 자신의 노동에 의해 스스로 창출한 형식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적 삶을 능동적으로 산출할 때부터,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자기자신과 주위 세계에 대한 직접적 활동주체, 즉 인간으로서 존재한다. 주위 세계를 변형시키는 노동은 사회적으로 발전하고 사회적으로 설정된 형식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사고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시작해 지속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노동의 독립적 과정을 통해 관념적인 것이 발생하며, 노동과정을 변형시키고 실재, 자연, 사회적 관계의 관념화가 완성되며, 외부세계의 관념적 상을 외적으로 구체화는 기호언어가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에 관념적인 것의 비밀이 있고, 동시에 그 해결책도 존재한다.(인간235)
그 비밀의 본질과 함께 맑스가 그 비밀을 해결했던 방법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현실을 관념화거나 관념적인 것을 산출하는 행위의 가장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정치경제학의 가격 현상을 분석해 보자. “상품의 가격 혹은 상품의 화폐형태는 상품의 가치형태 일반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제의 물체형태와는 구별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관념적인 혹은 표상화된 상품의 형태일 뿐이다.” 우선 가격은 정신생리학적 현상이 아니라 객관적 범주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러나 여전히 가격은 ‘관념적 형식’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가격에 대한 맑스의 유물론적 입장이다. 반대로 관념론은 가격이 단지 관념적 형식이므로 하나의 주관적⋅심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해석은 특히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인 버클리에 의해 제시됐다.(인간235-236)
화폐에 대한 관념론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맑스는 가격은 인간의 노동산물을 화폐, 가령 일정한 양의 금으로 표현한 가치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금 자체의 본질이 화폐는 아니다. 금은 특별한 사회적 기능, 즉 모든 상품의 가치척도의 기능을 수행하고, 더욱이 생산과정과 생산물의 교환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체계에서 그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화폐로 된다. 바로 이것이 가격 형식의 관념성이기도 하다. 금은 유통과정에서 그 자체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다른 것’의 직접적 존재형식이고 운동형식이다. 그리고 금은 상품-화폐의 유통과정에서 ‘다른 것’을 대변하거나 대체한다. 즉, 금은 ‘다른 것’의 변형태다. “가격으로서의 상품은 한편으로는 그 외부에 존재하는 화폐와 관계하고, 다른 한편 상품은 화폐 자체로서 관념적으로 정립된다. 왜냐하면 화폐는 상품과 다른 실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실재적 화폐와 더불어, 이제 관념적으로 정립된 화폐로서의 상품이 존재한다.” “화폐가 현실 속에서 상품으로서 정립된 후에, 상품은 정신 속에서 화폐로 정립된다.”(인간236)
관념적인 것을 정립하는 것, 혹은 실재의 생산품을 다른 생산품의 관념적 상으로 정립하는 것은 상품의 대량 유통과정에서 이뤄진다. 관념적인 것의 정립은 유통과정 내에서 점차 성장하는 모순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발생하고, 나아가서 유통과정 내에서(비록 두뇌의 도움을 받지만 두뇌 내에서가 아니라) 상품유통에 내재해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발생한다. 그런 욕구는 같은 종류의 상품들로부터 ‘방출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지출의 사회적 표준^으로 전화된 하나의 상품에 의해 충족되고 해결된다. 맑스가 언급했듯이 “문제는 그 해결의 수단과 동시에 발생하는 법이다.”(인간237)
실제적 교환에서, 화폐가 나타나기 이전에(즉 금이 화폐로 전환하기 이전에) 이미 다음과 같은 상황이 조성된다. 즉 “수많은 상품 소유자들의 갖가지 상품이 동일한 제3의 상품과 교환되거나 여러 가치로 등치되지 않고서는, 상품 소유자들이 자신의 물품을 다른 여러 물품들과 등치시켜 교환하는 교역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제3의 상품은 비록 좁은 한계 안에서지만 직접적으로 일반적인 혹은 사회적인 등가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제3의 상품의 교환가치를 통해 두 상품의 상호 교환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필연성이 발생한다. 이때 제3의 상품은 실제의 교환관계에 직접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단지 실제로 교환되는 상품의 일반적 가치척도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이 ‘제3의 상품’은 비록 구체적으로 교환관계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교환 행위 속에 똑같이 포함돼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념, 상품 소유자의 정신⋅언어⋅종이 등에 관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3의 상품은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의 상징으로 변형된다.(인간237)
가치와 가치형태를 순수상징⋅관계들의 이름⋅협약이나 법률로 제도화된 기호 체계로 환원시켜 버리는 모든 화폐 이론과 가치 이론은 앞서 언급한 상황과 연관돼 있다. 그 기원과 구조의 논리를 볼 때 그런 이론들은 관념적인 것을 사회적 인간의 대상적⋅실천적 활동과정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관념적인 것이 언어(용어나 진술)로 표현된 형식을 협약적 현상−하지만 이 현상의 배후에는 신실증주의자들의 ‘경험’, 실존주의자들의 ‘실존’ 혹은 후설의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비물질적이고 신비적인 ‘형상적 존^재’ 등 신비적이고 파악하기 힘든 어떤 것이 가로놓여 있다−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나 논리학자와 유기적 연관을 맺고 있다. 맑스는 관념적인 것에 대한 그런 이론, 즉 관념적인 것을 비물질적 관계들에 대한 기호나 상징으로 환원하는 이론의 천박성을 단호하게 폭로했다. “상품의 가격 형식으로서 단지 명목상으로만 금으로 전화되고, 다시 금은 명목상으로 화폐로 전화된다는 사실은 화폐의 명목적 표준 이론에서 결과한다. 그리하여 관념상의 금이나 은, 즉 단지 계산을 위한 화폐로서의 금이나 은이 가격 결정에 사용되기 때문에 파운드⋅실링⋅펜스⋅달러⋅프랑 등은 금이나 은의 무게 혹은 물질화된 노동의 어떤 형식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관념적 부분을 표시한다고 주장된다.” 더 나아가 상품 가격은 단순히 관계나 비율을 나타내는 말, 순수 기호로 생각됐다.(인간237-238)
따라서 객관적 경제 현상은 단순한 상징들로 변형된다. 흄이나 버클리의 해석에 따르면, 그 상징들의 배후에는 그 실체인 의지나 혹은 개별적 자아의 ‘내적 경험’인 표상이 숨겨져 있다. 논리학에 종사하는 현대의 관념론자들은 꼭 같은 방식으로 말이나 진술(대상에 대한 관념적 상의 언어적 포장)을 관계들의 단순한 이름으로 바꿔 버리기 때문에, 고립적 개인의 ‘경험’은 기호화하는 언어활동에 의해 그와 같은 이름으로 정립된다. 논리적 관계는 단순히 무엇과 무엇의 연결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연결들의 이름으로 변형된다.(인간238)
상품이 금으로, 금이 사회관계의 상징으로 관념적 변형을 보인 것은 시간적으로도 본질적으로도 상품이 화폐, 즉 경화로 전화하기 이전에 발생했다는 사실이 특히 강조돼야 한다. 금은 그것이 유통과정의 매개물이 되기 이전에 상품 가치의 척도가 되며, 그럼으로써 최초의 화폐로서 순전히 관념적으로 기능했다. “화폐는 개인의^ 두뇌뿐 아니라 사회적 통념(직접적으로는 구매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통념) 속에서 이미 관념상 화폐로 변형돼 버린 그런 상품만을 유통시킬 뿐이다.”(인간238-239)
이것이 가격 현상, 관념적인 것의 문제, 실재 일반을 관념화하는 문제 등에 대한 맑스 입장의 근본 핵심이다. 사실 교환 행위는 항상 사물을 매개로 사람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관계체계를 정착시킨다. 이 점은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사물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사물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즉, 관계체계 내에서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고립적 물체로서 존재하면서도 다른 모든 물체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물체(감각적으로 지각되면서도 관념적 상을 담고 있는 물체)로 변형된 사물이 그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런 사물은 다른 사물의 외적 구현체로서,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다른 사물의 상이 아니라 관계체계 내의 상황을 분석할 수 있게 만드는 다른 사물의 존재법칙, 즉 본질이다. 그래서 이런 특정 사물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그것의 상 외부에, 말하자면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다른 사물들 속에 깃들게 되는 상징이나 의미로 변형되며, 그런 상징이나 의미는 그것이 다른 사물들과 맺는 그리고 역으로 다른 사물들이 그것과 맺는 전체 관계체계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러나 이 사물은 그런 체계로부터 실제로 분리되면 자신의 역할인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그리고 다시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일상적 사물로 변형된다.(인간239)
결국 사물이 상징으로 존재하고 기능하는 속성은 그 사물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속성을 부여하는 체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물에 부착된 자연적 속성은 사물이 상징으로 존재하는 속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물질^적 사물의 겉모습 혹은 상징‘체’(상징으로 변형된 물체)는 상징으로서의 그 사물의 존재에 대해 전혀 비본질적인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맑스가 표현했듯이 한 사물의 “기능적 존재는 그 물질적 존재를 완전히 흡수한다.” 더욱이 사물의 물질적 존재는 그 기능에 종속된다. 결국 상징은 하나의 징표, 즉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다른 대상을 표현하는 대상(사물 자체를 나타내는 사물의 이름처럼)으로 전화한다. 사물이 상징으로 전화하고 상징이 표시체로 전화하는 변증법은 자본론에서 화폐가 가치로부터 유래해 발전해 나가는 예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인간240)
상징의 기능적 존재는 정확히 말해서 자기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을 나타내며, 또한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다른 사물들의 본질, 즉 사회적이며 인간적인 그 사물들의 보편적 의미 그리고 사회조직 내에서 그 사물들의 역할과 기능을 나타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상징의 기능은 그것이 바로 외적 사물의 관념적 상을 구현하는 존재이며 혹은 그 사물의 존재법칙이고 보편법칙이라는 데 있다. 사회적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실질적 물질대사로부터 분리된 상징은 일반적으로 관념적 상의 물체적 외양, 즉 상징이기를 중단하는 것이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영혼은 인간화된 자연과 있는 그대로의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인간의 객관적 활동이기 때문이다.(인간240)
관념적 상 없이는 인간은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수행할 수 없으며, 개인은 사회적 생산과정에 편입된 사물을 조작할 수 없다. 그러나 관념적 상은 자신의 실현을 위해서 언어를 포함한 현실적 소재를 요한다. 그러므로 노동은 언어에 대한 필요를 야기시키고, 그리고 언어^ 자체를 산출한다.(인간240-241)
인간이 상징이나 징표에 의존하고 있는 대상이 아니라 상징이나 징표를 조작할 때, 인간은 관념적 수준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수준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들은 종종 말을 통해서 사물의 실재적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 단지 말 자체의 관습적 의미를 이해하며 또한 상징과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상징체를 이해한다. 이 경우 언어적 상징은 실재적 활동의 수단에서 물신적인 것으로 변형돼, 상징체로부터 그 상징이 나타내고 있는 실재를 차단해 버린다. 이때 사람들은 관념적 상의 형식으로 표현된 보편법칙에 따라 외적 세계를 이해하거나 변화시키는 대신 단지 말로 나타난 술어적 표현들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며, 이렇게 하는 동안 그들은 세계 자체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한다.(인간241)
관념적인 것의 언어적 존재에 대한 물신숭배는 쇠퇴기의 헤겔학파 철학의 특징이었으며, 맑스와 엥겔스가 그 당시 주목한 것이기도 했다. 관념적인 것의 언어적 존재에 대한 물신숭배는 물론, 그런 물신숭배가 반영하는 사회적 관계체계의 물신숭배는 관념적인 것이 인간의 대상적이며 실천적인 활동을 통해 생겨나고 재생산되며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모든 철학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종말이다. 요컨대 관념적인 것이 인간의 실천 활동을 통해 생겨난다는 입장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되면, 외적 세계와 상징론에 대한 이런저런 형태의 물신숭배가 발전한다.(인간241)
관념적인 것의 언어적⋅상징적 존재에 대한 어떤 형태의 물신화도 관념적인 것 자체를 포함하지 못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물신숭배는 인간활동 자체를 표현하지 못하고 인간활동의 결과를 표현한다. 그래서 물신화는 관념적인 것 자체를 포함하지 못하고 관념적인 것이^ 외적 대상이나 혹은 언어로 외화된 것, 즉 응결된 산물만을 포함한다. 인간활동의 형식인 관념적인 것은 단지 인간활동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 결과물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활동은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사물의 존재형식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이며, 그 사물을 새로운 형식으로 변형⋅정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인간의 활동은 관념적 형식으로 표현되는 일반적 양식에 따라서 발생한다. 하나의 대상이 산출됐을 때, 그 대상에 대한 사회의 욕구는 충족된다. 말하자면 인간의 활동은 그 산물 속으로 사라지고, 따라서 관념적인 것 자체도 소멸한다.(인간241-242)
예를 들어 빵의 관념적 상은 배고픈 사람이나 빵을 굽는 사람의 상상 속에서 떠오를 수 있다. 집 짓는 일에 종사하는 배부른 사람의 두뇌 속에는 관념적 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를 관념적 빵 전체, 늘 존재하는 관념적 집들, 나아가서 물질적 삶을 생산⋅재생산하는 과정과 관련된 모든 관념적 대상으로 간주해 보자. 그렇게 되면, 인간이 실제로 직접 생산하거나 재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자연의 부분들만이 인간 내에서 관념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이 관념화될 것이다. 인간 생명활동의 현실적 대상을 끊임없이 재관념화하지 않고서는, 대상을 관념적인 것으로 변형시켜 기호화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생산의 능동적 주체일 수 없다.(인간242)
관념적인 것은 인간노동의 형식과 그 산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관념적인 것은 자연적 소재와 인간에 의해 성취된 사회적 관계를 목적의식적으로 변형시키는 형식이나 그 산물로 나타난다. 관념적인 것은 선행하는 인류의 발전에 의해 주어진 형식에 따라 활동하는 개인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발생한다. 인간은 관념적 수준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된다. “그러나 가장 형편없는 건축가라 할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까닭은 그가 밀랍으로 집을 짓기 전에 미리 머릿속에서 집을 짓기 때문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 나타나는 결과는 노동을 시작할 때 이미 노동하는 자의 생각 속에, 즉 관념적으로 있었던 것이다.”(인간242-243)
만약 두뇌가 자연주의적, 즉 개별적 육체의 물질적 기관으로 이해된다면, 건축가와 벌꿀 사이에는 원리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꿀벌이 짓는 밀랍으로 된 벌집도 꿀벌의 중추신경에서 계획된 곤충의 활동 유형으로 사전에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꿀벌의 활동의 산물은 실제로 그 활동이 수행되기 이전에 ‘관념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러나 곤충의 활동 유형은 그 자체로 내재적이고, 해부학적 신체조직과 더불어 유전된다. 활동산물의 관념적 존재로 나타낼 수 있는 활동형식은 활동산물이 과연 참된 산물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동물의 신체와 결코 구별되지 않는다. 인간활동과 동물활동의 근본적 차이점은 인간활동의 어떤 형식이나 능력도 해부학적 신체조직과 함께 유전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간의 모든 활동형식(능동적 형식)은 오직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 낸 모든 대상형식으로 이전된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규정된 활동형식(활동대상과 산물의 관념적 상)에 대한 개인적 지배는 자연의 객관적 변형(자연을 대상으로 구체화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특별한 과정으로 변형된다. 결국 인간의 활동 형식 자체는 특별한 대상, 즉 특별한 활동의 대상으로 변형된다.(인간243)
위처럼 관념적인 것이 인간의 활동형식으로 규정될 때, 이 규정은 엄밀히 말해서 불완전하다. 이 규정은 관념적인 것을 단지 객관적 조건이 붙은 그 내용에 따라 특징짓는다. 그러나 관념적인 것은^ 인간이 외적 대상의 형식에 상응하는 활동형식 자체를 특별한 대상−인간이 실재하는 대상을 만지거나 일정 정도 변화시키지 않고서도 다룰 수 있는−으로 변형하는 곳에서만 존재한다. 인간은 자기 삶의 활동형식에 ‘매몰’되지 않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형식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그 형식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것을 관념으로 변형시킨다. 외적 사물이 인간의 활동과정과 그 최종적 산물(관념)에 포함될 때만 외적 사물 일반이 인간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사물의 상은 그 사물을 작동시키는 활동의 상과 언제나 결합돼 있다.(인간243-244)
이것은 사물과 관념 혹은 실제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인식론적 토대를 이루며, 모든 종류의 관념론의 인식론적 근원을 이룬다. 활동형식이 대상화됐을 때, 활동형식을 사물의 형식으로 간주할 수도 있고 역으로 사물의 형식을 주관적 활동의 산물이나 형식(관념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기 때문에 대상화가 어뤄졌다고 해서 관념론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대상화가 이뤄진 상황은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주어지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자연 발생적 노동분업이 이뤄지면 이런저런 관념론 혹은 물신숭배로 변형될 뿐이다. 이런 노동분업 아래서는 활동형식은 개인으로부터 독립해 있으면서 개인이 파악할 수 없는 사회적 과정에 의해 개인에게 강제로 부여된다. 상품생산에 특징적인 인간활동의 사회적 형식(상품 물신숭배)의 대상화(물화)는 신들의 관념 속에서 나타나는 활동적 인간 능력의 종교적 소외와 아주 유사하다. 이런 유사성은 관념적인 것의 본성을 파악하는 객관적 관념론의 한계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된다. 그래서 헤겔좌파였던 당시 청년 맑스는 고대의 모든 신들이 ‘실재’하듯이 화폐가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고대의 몰록(셈족의 신)이 통치하지 않았던가? 그리스인의 삶 속에서 델포이 신전의 아폴론이 현실의 힘을 갖고 있지 않았던가? 칸트의 비판은 이런 측면에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가 100탈러(독일의 옛 은화)를 갖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가 이런 상상을 임의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그것을 믿는다면, 그때 이 상상의 100탈러는 그에게 실재의 100탈러와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실재의 탈러는 상상의 신이 갖는 것과 같은 존재의 성질을 지닌다. 실재의 탈러가 오직 인간의 일반적이거나 공통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실재의 탈러는 이 상상 말고는 달리 존재할 곳이 있겠는가?”(인간245)
하지만 맑스가 헤겔좌파를 벗어난 이후에야 비로소 이런 유추의 참된 본성이 자연⋅화폐⋅종교의 표상들에 대한 유물론적 입장의 토대 위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상품 물신숭배와 종교적 소외의 ‘유사성’은 인간의 사회적 관념들과 인간의 실제적 활동⋅실천형식들 사이의 현실적 연관관계, 요컨대 관념적 상(개념)의 능동적 역할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형식(외적 세계에 대한 관념적 상)을 사물 자체에 손대지 않고서도 일정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관념적 상을 자기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대상화함으로써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처럼 그것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가 인용한 건축가의 예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건축가는 단순히 그의 머릿속에서만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리를 매개로 해서 용지나 화판 위에 관념적으로 집을 그려 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변화시켜 그것을 외화시킴으로써 자기자신으로부터 분리돼 있는 대상처럼 취급한다. 건축가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변화시킴으로써 실재하는 집을 가능적으로, 즉 관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또 다른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지각된 하나의 동일한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인간245-246)
바꿔 말하면, 대상의 관념적 상을 변화시키는 표상 활동은 감각적으로 지각된 대상의 상을 변형시키는 감상적⋅대상적 활동이기도 하다. 여기서 변화되는 사물은 특수한 것으로, 대상화된 관념 혹은 하나의 사물로 간주되는 인간의 활동형식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물질적 활동과 이론적 활동 사이의 근본적 차이, 즉 철학적⋅인식론적 차이를 불분명하게 만들 수 있다. 이론가의 이론적 활동은 관념적 상이 언어기호로 대상화된 것만을 변경시키는 활동에 불과하다.(인간246)
사람들은 활동의 순수한 형식인 관념적인 것 자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 화가나 기술자의 행동양식(활동형식)을 포착하려고 하는 경우는 마음껏 그들의 활동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그들이 행하는 작업의 외적 기술이나 방법만을 모방할 수 있을 뿐 결코 관념적 상 자체 혹은 능동적 능력 자체를 모방할 수는 없다. 주관적 활동의 형식인 관념적인 것은 그 활동의 대상이나 산물에 대한 능동적 조작을 통해, 즉 사물의 대상적 형식과 그 대상성의 능동적 제거를 통해 지배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 실재에 대한 관념적 상은 대상형식과 결부된 살아 움직이는 활동의 형식(양식 혹은 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사물로서 혹은 물질적으로 고정된 상태나 구조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인간246)
관념적인 것은 개개인에 의해 실현된 인간적 활동의 보편적 형식^들의 연쇄와 다름없다. 이때 보편적 형식들은 목적과 법칙에 따라 행위하는 개인의 의지와 경향을 규정한다. 관념적 상의 개별적 실현이 관념적 상의 이런저런 편향이나 그 구체적 형태와 언제나 연관돼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요컨대 관념적 상의 개별적 실현은 새로운 사회적 필요나 물질적 소유 등과 같은 특수한 조건에 따라 관념적 상을 교정하는 것과 연관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개별적 실현은 관념적 상을 아직 관념화되지 않은 실재적 현실과 의식적으로 상호 연관시키는 능력을 부여한다. 이 경우에 관념적인 것은 개인에게 특수한 대상, 그의 활동의 필요(요구)에 따라 목적의식적으로 변경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서 기능한다. 반대로 개개인이 관념적 상을 근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조작의 엄격한 유형과 순서 등 형식적으로만 숙달한 후 아직 관념화되지 않은 실재하는 현실과 연관을 맺게 될 경우, 그는 자신과 구별되는 특수한 대상이라 할 수 있는 관념적 상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할 수 없다. 그러면 그는 관념적 상과 결합하지만 관념적 상을 실재와 연관돼 있는 것으로 취급하지 못하고 결국 그것을 변화시킬 수도 없게 된다. 엄밀히 말해 이와 같은 경우는 개인이 관념적 상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단화된 상이 개인 속에서 개인을 통해서 활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관념적 상이 개인의 실질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개인이 관념적 상의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관념적 상은 외적으로 주어진 형식적 도식, 소외된 상, 물질적인 것, 어디선가 불시에 나타난 논증할 수 없는 규칙체계로서 개인의 의지와 정신을 지배한다. 관념적인 것의 본성에 대한 관념론적 입장은 바로 이와 같은 의식에 걸맞다.(인간246-247)
이와 반대로, 유물론적 입장은 공산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회의 문화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소외되고 독립적인 어떤 것으로서 개인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참다운 활동형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가 보여 줬듯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문화의 모든 형식이 오로지 인간 스스로의 활동형식이 될 것이라는 점은 너무도 분명하다. 부르주아 사회의 조건에서는 이런 현상은 그런 조건 아래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난 환상을 제거하는 이론적 분석을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을 뿐이다. “생산물 등과 같이 고정된 형식을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운동에서 단순한 계기, 즉 소멸하는 계기로 나타난다. … 이 과정의 조건과 대상화 자체는 똑같이 그 과정의 계기이며, 그리고 그 과정의 유일한 주체는 개인들, 다시 말해서 그 개인들이 새롭게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상호관계 속에 있는 개인들이다. 그 고유한 운동의 지속적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창조하는 풍부한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듯이 그들 스스로도 새롭게 한다.”(인간247-248)
물론 사고에 대한 일관된 유물론적 입장은 논리학의 핵심적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법, 특히 논리적 범주를 해석하는 방법을 변화시켰다. 맑스와 엥겔스는 무엇보다도 외적 세계가 단순히 관조에만 빠져 있는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외적 세계를 변형시키는 과정에 참여하는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립했다. 즉, 관조하는 인간 자신은 물론 관조되는 세계도 역사의 산물이다.(인간248)
따라서 사고의 형식인 범주는 비역사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에서 단순히 추상된 형식으로 이해돼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도 의식 속에 반영된 사회적 인간의 감성적⋅대상적 활동의 보편적 형식으로 이해돼야 한다. 논리적 형식에 상응하는 객관적 실재는 단순히 개인에^ 의해 사색된 대상의 추상적⋅일반적 윤곽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따라 자연을 변형시키는 인간의 현실적 활동형식에서 이해된다.(인간248-249)
“인간사고의 가장 본질적이고 직접적인 토대는 단순히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변형되는 자연이다. 그리고 인간지성의 진보는 자연을 변화시킬 줄 아는 인간의 능력과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사고의 주체는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개인,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개인이다. 그리고 개인의 모든 삶의 활동형식은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인간 문화의 형성과정에서 주어지는 것이다.(인간249)
인간의 활동형식(그리고 이 활동형식을 반영하는 사고형식)은 결국 개인의 의지와 의식과는 독립적인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그런 형식은 역사적으로 발전된 문화 체계의 형식으로 개인과 맞서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 체계는 결코 심리학의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의식의 발전은 심적 과정의 단순한 산술적 총합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회의 물질적 삶의 발전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특수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법칙은 개인의 의식과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개인의 의식과 의지를 능동적으로 규정한다. 고립된 개인은 혼자 힘으로는 인간 활동의 보편적 형식을 발전시키지 못하며, 비록 그가 그 어떤 추상의 위력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오히려 개개인은 인간이 문화를 스스로 이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기존의 보편적 형식에 동화된다.(인간249)
그러므로 인간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외적 세계의 반영 활동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은 논리학을 발전시키는 수단이 될 수 없다. 개^개인은 자기자신에 앞서 독립해 있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일반적(논리적 규정들에 이미 숙달해 있는 경우에만 사고한다. 그리고 하나의 과학으로서 심리학은 인간의 문화나 문명을 개인과 독립해 있는 전제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 발전과정을 탐구하지 않는다.(인간250)
헤겔은 이런 사실을 관념론의 입장으로 설명한 반면에, 맑스와 엥겔스는 논리적 정의와 법칙의 실질적(객관적) 전형들을 사회적 인간의 대상적 활동에 대한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형식과 법칙에서 고찰함으로써 활동 자체를 주관주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단호히 배제했다. 인간은 외부로부터 자연에 작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과 대립하기” 때문에 인간의 대상적 활동은 매 단계마다 객관적 자연법칙과 연관돼 있으며, 또 그 법칙에 의해 매개돼 있다. “인간은 사물들의 역학적⋅물리학적⋅화학적 속성을 다른 사물을 지배하는 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물을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게 한다. … 결국 자연은 인간활동의 수단, 즉 그의 신체적 기관에 덧붙여 스스로의 자연적 체구를 늘이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관념론이 이성이 인간 내에서 작용한 결과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인간활동의 보편성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보편성은 자연 전체를 자신의 비유기적 신체로 만드는 보편성에서 실천적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자연은 (1) 인간의 직접적 생활 수단이기도 하다, (2) 인간의 생명활동의 재료⋅대상⋅도구이기도 하다.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다. 말하자면 자연 그 자체는 인간의 신체가 아닌 한에서만 자연이다.”(인간250)
그러므로 인간활동의 법칙은 특히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 즉 문명이라는 객관적(물질적) 신체를 구성하는 자연적 소재의 법칙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 대상의 운동과 변화의 법칙이다. 또한 인간의 기^관으로 변형되고 사회의 물질적 삶을 생산하는 과정의 계기로 변형되는 법칙이기도 하다.(인간250-251)
노동(생산)을 할 때 인간은 하나의 자연적 대상이 그 속성과 존재의 법칙에 따라 다른 대상에 작용을 미치도록 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인간 행위의 논리적 형식과 법칙은 대상에 작용하는 인간 행위의 실재적 법칙의 결과(반영)이고, 대상의 모든 영역과 발전에 작용하는 실천의 결과이며, 그 어떤 사고로부터도 독립해 있는 법칙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줬다. 유물론적으로 이해된 실천은 하나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때 그 과정의 운동에 포괄되는 모든 대상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변화 가운데서 저마다 고유한 형식과 척도를 드러냄으로써 고유한 법칙에 따라 기능(행위)한다.(인간251)
그러므로 인간의 실천은 아주 구체적인(특수한) 과정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의 실천은 물질 운동의 모든 형식과 유형을 그 추상적 계기로서 포함하며 물질 운동의 법칙에 따라 행해진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키는 보편적 법칙은 외부로부터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활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자연 자체의 보편적 변화 법칙이다. 또한 자연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보편적 법칙은 자연을 성공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따를 수밖에 없는 자연의 보편적 법칙이기도 하다. 일단 자연법칙이 현실화됐을 때, 그것은 또한 이성의 법칙 혹은 논리적 법칙으로 나타난다. 이 법칙들의 ‘독특성’은 바로 보편성에 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보편적 법칙은 주관적 활동의 법칙(고등 신경 활동에 관한 생리학적 법칙 혹은 언어 법칙)이며 객관적 실재의 법칙(물리학과 화학의 법칙)일 뿐 아니라 객관적 실재의 운동과 주관적인 인간 생명활동의 운동 모두를 지배하는 법칙이다(물론 이것이 결코 사고^는 탐구해 볼 만한 ‘특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 실재의 운동과 구별되는 특성을 지닌 특별한 과정, 즉 인간 개인의 정신생리학적 기능의 측면에서 사고는 심리학이나 고등신경생리학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탐구돼야 하지만 논리학에서 사고의 그런 측면은 탐구될 수 없다.) 주관적 의식 속에서 이와 같은 법칙은 대상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대상의 보편적이고 관념적인 상으로 나타난다. “논리학의 법칙은 객관적인 것이 인간의 주관적 의식 속에 반영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