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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알기까지 / 겔 10:1-5, 요 4:17-26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가정의 달, 청소년의 달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청소년들을 위해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요즘 청소년들은 레시버를 귀에 꽂고 라디오나 소형 녹음기를 들으면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런데 학생들이 무엇을 듣느냐 이것이 문제다.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한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유행하는 대중가요들을 보면 죽음을 미화하거나 선정적이고 퇴폐적이거나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불건전한 가요들이 너무 많다. 예를 들면 이렇다.
죽음이나 자살에 관한 노랫말 / 김경호의 슬픈 영혼의 아리아(엘리제) : 죽은 후에도 사랑했던 여인을 떠나지 못하는 혼령을 노래하는 내용(나의 묘비 위에 다시 너의 체온이 느껴지고 있어). 김경호의 마지막 기도 : 죽은 애인을 부둥켜 안고 애인의 죽음을 국구 부인하며 눈을 뜨라고 절규하는 내용(내가 여기 있잖아, 눈을 떠봐, 느끼고 있는거야. 이렇게 네 곁에서 잠자듯 널 안고 있는다는 걸). 자우림의 이틀 전에 죽은 그녀와의 채팅은 : 죽은 애인의 뒤를 따라 동반자살을 한 사람에 대한 내용(놀라지 말아줘, 고백할게 있어, 이틀전에 난 이미 세상을 떠났어, 쓸쓸한 자정에는 나와 얘기를 해줘).
선정적인 노랫말 / 자우림의 밀납천사 : 보부기에만 좋다면 어느 누구와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내용(오늘 밤 너를 그냥 둔다면 너를 그냥 둔다면 말도 안돼, 오늘밤 내게 안겨 웃어봐, 내게 안겨 춤춰봐, 내게 안겨 차가운 네 피부 널 만지고 싶어). ECO의 사랑의 포로 : 다른 것보다도 몸을 먼저 가진 후에야 사랑하겠다는 조건적 사랑을 노래하는 내용(너를 다 가지고 싶었어, 니가 내 앞에서 숨길 필요는 없잖아, 네 세계 속에 초대해 준다면 난 내것도 보여줄 꺼야). 조관우의 삐리의 계획 : 누군가를 유혹해 하룻밤을 즐기려는데만 관심을 가지는 남녀에 관한 내용(매끈하게 빠진 몸매에 흐트러진 까만 머릿결, 늘 맴도는 야릇한 시선, 섹시한 그녈 잡으려면 넌 대담해져야 해).
잘못된 가치관에 관한 노랫말 / 터보의 나폴레옹 :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을 끝내 자신의 여자로 만들 것이라는 내용(니가 아무리 튕긴다 해도 끝내 내 여자로 만들 것을 다짐해. 너에게 남자 친구인데도 그리 쉽게 포기하는 내가 아니지. 키퍼있다고 골이 안들어가니). 넥스트의 Lazenca, save us : ‘영혼 기병 라젠카’라는 만화적인 소재를 기반으로 한 폭력적인 가사 내용(강철의 신장 천둥의 날개 펴고 결단의 칼을 높이 든 자여, 복수의 이빨 증오의 발톱으로 우리의 봄을 되돌려 다오). 업타운의 내일을 위해 : 실력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가수이기를 포기하라는 내용. 자우림의 일탈 :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으로 해소하는 내용(할 일이 쌓였을 땐...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선보기 하루 전에 홀딱 삭발을,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 뭐 화끈한 일 신나는 일 없을까). 자우림의 욕 :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려는 내용과 극단적인 행동양식을 말하는 내용(너 땜에 나 꼬이는거야, 너 땜에... 너 땜에...). 젝스키스의 탈출 : 어른들의 충고와 권면을 간섭으로 치부하고 현실을 탈출하라는 내용(그만 좀 떠들어, 닥쳐, 우리가 뭘 잘못해, 그만 좀 내비둬). 젝스키스의 Party time :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각을 비판하는 내용(맘에 든 한 여자가 나의 눈에 들어와, 가까이 너의 곁에 몸을 붙이고 춤을 춰봐, 원하는 건 태초의 감각들). NRG의 나쁜 아이들 :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각을 비판하는 내용. 이 외에도 사람을 죽여 살을 뜯어 먹는다는 등 건전하지 못한 가요들이 너무 많다. 이런 가요에 젖어든다면 결국 청소년들의 정신까지도 이러한 가요의 내용에 일치되어 퇴폐적인 방향으로 빠지고 말 것이다. 부모들이 신앙적으로 잘 교육하고 감시하는 길밖에 없다고 본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다.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지나게 되었다. 사마리아 수가성이라는 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피곤하시고 목이 말랐던 것을 볼 수 있다. 마침 물을 길러온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하셨을 때 여인은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하고 으아해 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며 심지어는 짐승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차라, 여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주님을 유대의 한 청년처럼 생각하였기에 반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나 구세주나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알았다면 분명 다른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무지한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말하시므로, 이 여인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기를 원했다. 생수를 오히려 주신다는 말씀에 이 여인은 자기의 조상인 야곱을 들어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하고 반문하게 되었다. 그 조상 야곱의 덕택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 우물물을 먹었다. 그리고 그 조상 야곱도 그 아들들과 짐승이 다 이 우물물을 먹었으니 한 사람의 조상 야곱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과 짐승들이 혜택을 보았다. 그래서 예수라는 사람도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제 한 사람의 평범한 유대인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이 여인은 자기의 조상과 비교함으로 한 단계 더 높은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생수를 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조상 덕에 호의호식할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아직은 젊음이들이 돈을 쓰는 것을 보면 다 부모님 덕에 그렇게라도 쓸 수 있다. 물질이나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조상과 같은 분으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여인이 물질적인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유산을 물려주었던 조상 야곱과 비교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주님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물질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조상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물론 우리가 주님을 통하여 물질이나 필요한 것을 구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여인이 그리스도와 메시야로 예수님을 본 후에는 야곱이라는 존재는 그 마음 속에서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지 않나? 혹시 이 자리에 앉아있는 분 가운데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물질적인 면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커서 조상을 섬기듯이 주님을 생각하는 분들이 없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눈을 더욱 떠주기 위해서 게속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인이 남편이 없다고 말하자 ‘네 말이 옳도다.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네 남편이 아니며,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이 여인은 ‘지금 보니 당신은 선지자 중의 하나시군요’라고 대답했다. 이제 조상의 차원에서 예수님을 선지자의 차원으로 올려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과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이 여인의 눈은 제대로 열려가고 있다. 우리도 주님과 교제가 자주 있을수록 신앙은 성숙해져 갈 것이 분명하다. 이 여인이 조상에서 선지자로 주님을 보게 됨으로 한단계가 올려진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도 부족하며 무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자신의 죄를 지적했으며, 자신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도 아는 것에만 그치면 아직도 주님을 구세주나 메시야로 영접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이 여인처럼 선지자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되겠나?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 요한 때까지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을 조상님처럼은 생각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선지자로서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고 죄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우리의 신앙 수준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죄를 깨닫는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사람 정도로 깨달은 사람이 누구이겠나? 그러한 사람은 성서 지식이 넘쳐난다. 교리적으로도 분명하다. 그래서 성서를 몇 번씩 통독했는지도 모른다. 교회생활에 대해서도 훤히 잘 알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 하나님의 뜻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의 변화의 열매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결코 거룩할 수 없고, 새생활로 변화받을 수 없다. 그들은 복음과 말씀에 동의할 뿐이요, 결코 그 능력을 체험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인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지 않은가?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예리한 선지자적인 지적과 권면에 경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생각과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한단계 더 높은 곳을 보여주어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여인의 눈을 완전히 열어주고 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하시며 영과 진리로 섬기는 차원을 가르쳐 주셨다.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때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을 다시금 들려주시는데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이 무슨 이야기인가? 이 여인 뿐아니라 이스라엘 족속 모두가 기다리는 메시야가 지금 수가성 한 우물가에서 말하고 있는 청년과 같은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여인은 의심없이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예수님을 메시야로 바로 보고 알게 된 이 여인은 큰 변화를 받게 되었다. 조상이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처럼 생각했을 때는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오늘 이 여인의 변화를 세가지로 생각해 보겠다.
1. 이 여인의 마음과 생각과 생활에 대전환이 일어났다.
이는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과 그가 많은 동네 사람들을 향해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친 것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제6시는 낮 12시를 말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낮잠을 잘 시간임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시간이었다. 이 여인은 한적한 시간에 사람들을 피하여 우물가로 나왔다. 세상을 비관하고 낙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 물동이만큼은 버릴 수 없었다. 생명의 젖줄과도 같은 물동이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 지금까지 그렇게 꺼려했던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삶에 좀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으며, 생각과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구세주를 만난 사람들마다 이렇게 변화를 받게끔 되어 있다.
두 자매가 있었다. 어느날 언니가 이렇게 고백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동생을 대하기가 참 편해졌어요. 그전엔 까다롭고 이기적이며 쌀쌀맞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참 편하고 부드러워졌다고 한다. 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이 동생이 주님을 영접하고 새롭게 변하게 되었다고 했다. 메시야를 만난 사람마다 이렇게 변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성서에는 삭개오 한 사람의 예를 들 수밖에 없었겠지만 사실 삭개오의 변화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의 변화가 어떠한지를 표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특수상황이 아니다.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모든 인생들이 이 삭개오와 같은 과정으로 주님을 만나야 한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젠켄스 박사라는 분을 통해 조지아주의 한 큰 부자가 예수님을 소개받고 은혜를 받아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다. 어느날 젠킨스 박사가 그 부자집 앞을 지나가는데 값비싼 가재도구들이 차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이사를 가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 부자가 ‘아닙니다. 박사님, 제가 지금까지 술집과 도박장을 운영하여 벌었던 많은 돈들이 주님을 알고보니 너무도 큰 죄악이어서 이 죄의 영향이 내 자식들에게까지 내려갈까 두려워서 지금까지 애지중지했던 보석과 가재도구를 다 처분하는 것입니다.’ 이 부자는 그 값비싼 것들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거저 나누어주게 되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세서만 찾아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겠나?
2. 주님을 알고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이 여인은 메시야를 만난 즉시 삶의 가치관과 푯대가 달라졌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그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있지 않은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꺼려했던 그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달려가고 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희생된 모습이다.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이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바울이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된 것처럼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오직 주를 위해 살았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라는 고백은 그가 얼마나 주님의 영광만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제 나의 명예, 체면, 인기, 욕심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 더 이상 될 수 없다. 구세주를 만난 사람마다 그러한 것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두 젊은이가 기찻간에서 아주 오래만에 만났다. 두 사람은 악수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아서 껴안으며 인사를 나눈다. 한 젊은이가 ‘우리 다음 역에서 같이 내리세. 그리고 이 밤에 멋있는 계획을 세우세‘ 하며 흉악한 죄를 꾸미며 즐기려는 계획을 세우자 하였다. 하지만 다른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내 아버지는 이제 이 지역의 유지가 되었네. 내 아버지의 얼굴에 누가 되는 일을 나는 결코 할 수 없네’ 하며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플로리다에 나올린이란 목사님 교회에 존이라는 믿음 좋은 청년이 있었다. 주일학교 총무로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인데, 사업이 점점 잘 되어 교회에 결석하는 일이 자주 생기게 되었다. 어느날 목사님이 이 청년을 불러 기도하자 했다. ‘하나님, 존의 사업 중 반만 불태워 주옵소서. 너무 바빠 주님을 잊을까 두렵습니다.’라고 기도하였다. 존은 떨리는 목소리로 ‘목사님, 다시금 열심히 충성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데 있어 어떠한 장애물도 있어서는 안되겠다.
3. 생수를 구할 수 있었고 또한 얻었다.
4: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잇듯이 구세주를 만난 사람마다 구하게 되는 것이며, 이내 그분의 생수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14절의 말씀과 같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여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 지금 주님으로 인해 여러분의 갈급함은 해결되었나? 주님이 참 만족을 주셨나? 주님을 만난 사람마다 인생의 목마름을 다 벗어서 그분의 능력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목마름이 사라졌다. 우리 모두 구세주요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바라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분 안에서 참 기쁨과 평강을 얻도록 하자. (청소년들도 예수를 진정 만나면 세속적인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에수님이 여러분의 인생과 영혼에 참된 생수가 되어 있지 못하다면 더욱 주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크게 떠서 주님을 확인하라. 유대인 - 조상 - 선지자 - 그리스도(메시야).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참 행복을 주실 때까지 더욱 찾고 구하도록 하자. 충만한 축복의 문이 열리게 된다. (1998-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