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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는 믿음 / 창 11:1-9, 마 21:23-32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한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번면 작은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 ‘싫소이다’ 하며 냉정하게 거절하였지만 그후에 뉘우치고 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물었다. ‘너희 생각에는 누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한 사람이냐?’ 여러분과 저는 분명히 둘째 아들이라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질문을 받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도 둘째 아들이라고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인정해 주심으로 결국 순종했던 작은 아들이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먼저 상징하는 인물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여기서 한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큰 아들은 질문을 받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작은 아들은 세리와 창기임을 알 수 있는데 31, 32절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하여 두가지 교훈을 얻고자 한다.
1. 회개하는 자가 의인이라는 사실이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제안을 냉정히 거절했다. 정면에서 ‘싫소이다’ 하고 반박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무척 서운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식된 도리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못된 사람의 모습이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불손하고 아버지의 마음에 언제나 부담을 주고 아프게 만들었다. 당시 세리와 창기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전혀 지키지 않고 죄악된 길에 있었던 처지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예수님 당시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던 것을 볼 수 있지 않나? 참으로 작은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상황임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그런가하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율법을 맡은 자들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나 뜻에 우호적이고, 큰아들처럼 순종하는 표면적 자세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그것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세리와 창기들은 비록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작은 아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복음을 듣고 깨닫고 회개했던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아버지를 공경한다 하였지만 실상 아버지의 뜻인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거룩해 보였을 것이고, 세리와 창기들은 죄인 중에서도 죄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돌이켜 깨닫고 회개하면 하나님께 의인이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다.
2. 행하여야 의인이라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오늘 말씀이 어떤가? 결국 행했느냐 행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대답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원하셨던 것은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해 주는 것이다. 요일 3:18절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로만 한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삶이 속히 진실한 행함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약 2: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도 없을뿐 아니라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약 1:22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못에 들어가리라 하였는데 자신을 속이는 자들도 역시 거짓말 하는 자가 아니겠나? 잠 20:7절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온전하게 행하는 자 그들이 의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싱 성서 어느 곳을 보아도 행함이 없는 자에게 의롭다고 인정해 주고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온전하게 행하는 자, 곧 행함이 철저한 자가 될 때만이 옳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행함을 구하는 하나님이셨기에 대답은 잘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더라도 행함까지 따르지 못했던 큰 아들은 결코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행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토록 행함이 있는 열매를 중요시 여기고 있는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들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어떠한 행함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이 시간 저는 두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1. 사랑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 13: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의 새 계명인 동시에 최고의 계명인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엡 3:17-19절에서는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으라’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간곡한 말씀을 명심하고 그리스도의 깊은 곳까지 우리의 사랑이 뿌리내릴 때 비로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고부간의 갈등이 심한 나라여서 그에 따른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하겠다.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항상 구박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 며느리는 누구를 구박하겠나? 당연히 아들인 남편에게 기지를 긁는 것이 아니겠나? 매일밤 바가지를 긁히던 신랑이 한 꾀를 생각해 냈다. ‘여보, 어머님을 빨리 돌아가시게 만들려면 꿀밤을 드리면 된다고 하더군’ 하고 난데없이 말했다. 곧 꿀밤을 많이 먹으면 위벽이 두꺼워져서 일찍 죽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며느리는 좋아라 하고 꿀밤을 갖다 드렸다. 시어머니는 ‘어쩌다 하루 대접하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사흘 계속되니까 시어머니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며느리에게는 시어머니가 일찍 죽는다는 그처럼 복된 소식이 없는데 그걸 하루라도 빠뜨리겠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토실토실한 밤을 갖다 드린 것이다. 계속되는 대접에 시어머니의 마음이 녹아져서 ‘아, 내가 저렇게 착한 먀느리를 괜스레 괴롭혔는가 보다’ 하고 후회를 했다. 그후로는 며느리를 사랑해 줄뿐만 아니라 동네방네 다니며, 그리고 우물가에서 며느리 자랑을 일삼더라는 것이다. 며느리는 자신을 죽이려는 뜻도 모르고 사랑해 주시는 시어머니에게 감복이 되어 지성으로 섬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러분, 이렇게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의 모든 매듭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 집의 주인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가정이었다. 도둑이 발각되자 흉기를 휘둘렀는데 그만 그 집의 아버지가 죽게 되었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나? 아들은 그 도둑의 집에 찾아가 보았다. 도둑의 집은 너무도 가난한 집이었다. 아들은 ‘이렇게 가난하여 도둑이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쌀을 한가마 갖다 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재판관에게 탄원서를 올려 죄의 정상을 참작해 주기를 바랬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과연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이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기를 우리에게 원하고 있는 것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땐 마실 것을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니’ 하고 말씀하셨지 않나?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깊은 곳에서 행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깊은 곳까지 뿌리를 박은 사랑이 여러분에게 있나? 우리의 사랑이 얕은 물가와 같은 사랑이라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일이 되는지 모른다. 여러분이 지금 어느 정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며 스스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얼마나 허울좋은 사랑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겠나?
장발장은 배가 너무나 고파서 빵 1개를 훔쳐 먹고 19년을 옥살이를 하므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감옥을 나왔지만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성당으로 가 보았다. 성당에서 미리엘 신부를 만나게 된다. 미리엘 신부는 장발장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며, 자기 침실에서 잠을 자게 해 주었다. 장발장이 자리에 누어서 보니 그 방을 밝히고 있는 두 개가 촛대가 은촛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발장은 고민에 잠겼다. 훔치자니 잘 대해 주었던 신부에게 인간의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가만 두자니 아까웠다. 결국 그는 은촛대 한 개를 훔쳐 의리를 저버리고 도망쳤다. 잠시후 그는 경찰들에 의해 붙잡혀 왔다. 유명했던 장발장이 은촛대를 가지고 있으니 사람들이 신고했던 것이다. 경찰은 미리엘 신부에게 이 사람이 성당에서 은촛대를 훔친 것 같은데 확인해 달라는 것이다. 미리엘 신부는 그때 ‘아니 이 촛대는 내가 이 사람에게 준 것이요. 두 개를 주었는데 장발장, 왜 한 개만 가져갔소?’ 하며 방에 들어가 한 개마저 가져다 주었다. 장발장은 ‘진리란 이런 것인가?’ 생각하며 그때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시장까지 지내게 되었으며, 코제트라는 아이를 키워 마리우스라는 청년과 결혼을 시키고 그의 전 재산을 물려주었다. 이러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미리엘 신부의 감동적인 사랑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만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구원해 낼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믿는 우리들에게 영원히 전해지게 될 것이다.
3. 우리가 거룩함을 행하는 성도가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거룩이란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오늘은 생각과 마음을 지키는 자가 거룩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겠다. 우리는 생각과 마음 속에 틈타는 것들을 막지 못하면 결코 거룩한 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탄은 먼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정복하고 결국 죄를 짓게 만든다. 다윗이 한가롭게 지붕에서 배회하다가 눈에 보이는 생각과 마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무서운 간음과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 일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던 다윗, 그가 조용한 시간에 마음 속에 밀려오는 허전함과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우리도 마음과 생각을 평안함으로 지켜야 되겠다.
10대나 20대의 연예인들이 자실하는 소동이 작년엔가 있었고, 요즘 청소년들의 탈선과 자살하는 소동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그들은 갈등과 공허한 생각과 마음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지나가는 사탄의 유혹적인 생각과 마음에 붙잡혀서는 안된다. 불순한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된다. 불순한 생각의 초등단계에서부터 끊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리석고 아름답지 못한 생각에 이어서 드라마를 꾸미듯 계속 허용하면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롬 12:3절에서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라 하였으며, 히 3:1절에서는 대제사장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주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어리석은 생각과 마음에서 건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잠 4: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아담과 하와는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생각을 지키지 못하다가 생명을 잃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생각과 마음을 지켜서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지키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자.
(1997-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