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책상 / 김석수
이번 주에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3박 4일 연수를 받았다.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는 사람에게 시키는 교육이다. 퇴계와 도산서원을 잘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서원 맨 위에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상덕사(尙德祠)’가 있다. 그 아래 강당 역할을 하는 ‘전교당((典敎堂)’이 있고 양옆으로 유생의 숙소인 ‘박약재(博約齋)’와 ‘홍의재(弘毅齋)’가 있다. 가운데 ‘진도문(進道門)’을 나오면 책을 보관하는 ‘광명실(光明室)’이 있다. 이곳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면 왼쪽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있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서당에서 공부하는 사람의 기숙사라 할 수 있는 ‘농운정사(隴雲精舍)’를 볼 수 있다.
출입문에서 나와 왼쪽으로 올라가면 ‘옥진각(玉振閣)이 있다. 1970년 도산서원을 성역화하면서 퇴계 선생의 유품을 전시하려고 만든 건물이다. 여기에는 선생이 생전에 쓰던 벼루, 책장뿐만 아니라 지팡이와 투호, 혼천의도 있다. 여러 가지 물건 중에서 내 눈에 띄는 것은 투호 옆에 있는 '앉은뱅이책상'이다. 직사각형 모양이다. 밥상보다 작다. 세로 면의 양쪽은 약간 높게 굽이 나왔다. 판을 지탱하는 다리는 곡선형이다. 책 한 권을 펴놓으면 딱 좋은 크기다. 옆에서 함께 구경하던 사람이 "이렇게 작은 책상으로 공부해서 대학자가 되었다니 참으로 놀랍다!"라고 나직하게 말한다.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여 최고의 성리학자가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뒤 의관을 정제하고 서재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이런 생활은 집을 떠나 다른 사람 집에 가서도 한결같았다. 특히, 심경(心經)을 외우는 일은 빼놓지 않았다. 낮에는 주로 책을 읽고 밤에는 사색했다. 제자에게도 낮에 독서하고 밤에는 생각하는주독야사(晝讀夜思) 공부법을 권했다. 관과 허리띠를 항상 끄르지 않았으며 바른 자세로 앉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의 책 읽기는 정독이다. 즉,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독서법이다. 그 당시의 성리학 서적 대부분을 통달하여 강의할 때는 그 내용을 술술 외어가며 인용한다. 읽으면 반드시 생각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했다. 털끝만큼도 속임수를 쓰거나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이치를 따지면서 공부한다. 권위가 있거나 유명한 사람이 주장한 학설이라도 당연시하지 않고 의심한다. 미숙하게 결론을 내지 않으며 간단한 용어나 작은 주석 한 부분이라도 깊이 탐구했다. 기본에 충실한 학자다.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여섯 살에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열두 살에 숙부에게 논어를 배운다. 15세에 숙부를 따라 넷째 형과 함께 경치가 아름다운 청량산에 들어가서 공부한다. 다음 해 봄에 안동 천등산에 있는 봉정사에서 수학(修學)했다. 스무 살에 그의 집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용두산 용수사에서 역학 공부를 하면서 끼니를 거르고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얻은 병으로 평생 고생한다. 산수를 즐기면서 심기를 단련하려고 경치 좋은 자연을 찾아보기를 좋아했다. 그는 "요산요수(樂山樂水)는 인성을 기르고 학문을 탐구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라고 <<자성록(自省錄)>>에서 말하고 있다.
서른네 살에 과거에 급제하지만, 벼슬살이보다 학문에 더 정진하려고 마흔아홉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듬해 제자를 기르려고 그의 집 근처 시냇가에 '계상서당'을 짓는다. 서당은 방과 마루가 한 칸인 작은 집이다. 서당을 연 지 7년 뒤 58세 때 23세의 율곡이 이곳으로 그를 찾아온다. 서른네 살이나 아래인 율곡에게 존칭의 뜻인 '공(公)’이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대했다. 율곡은 하룻밤만 묵고 갈 계획이었지만 비가 사흘 동안 내려서 더 머물렀다. 겸손한 자세로 처음에 율곡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며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율곡의 거듭된 요청에 마지못해 응한다. 그는 "학문의 길은 힘들지만 중단하지 않고 정진하면 외진 이 산골을 찾아온 일이 후회되지 않을 것이요."라고 율곡을 격려했다고 한다.
퇴계가 62세 때 손자 몽재(蒙濟)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서 털옷이 있어야 하는데 양모(羊毛) 한 벌로 20년을 지냈더니 이젠 구멍이 나고 털이 다 헤졌다. 여간 큰일이 아니구나. 살 자금이 없으니 걱정이다. 베 몇 필이면 살 수 있는지 그 값이나 알아보아라.” 그 당시 환갑을 넘긴 노인이 구멍 뚫린 양모를 입고 추운 겨울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가난해서 먹는 것이 늘 부족해도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아들이 처가살이 하면서 가난을 하소연해도 흉이 아니라고 달래며 참아 내자고 한다. 연수 중에 강사는 "그의 검소한 생활과 고고한 인품을 알려 주는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라고 강조한다.
그의 책상을 자세히 보면 왼쪽 아랫부분이 낡아서 닳았다. 왼쪽 손을 짚고 책을 많이 읽었거나 세월이 오래돼서 낡았을 것이다. 당대 최고 학자의 책상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초라하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사물의 이치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자세하고 꼼꼼하게 관찰하면서 우주의 원리를 공부했다. 그가 사용한 책상은 작고 좁은 탁자뿐만 아니라 활짝 트이고 넓은 ‘자연환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첫댓글 퇴계 선생 일대기의 요약본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넓은 자연환경이 그의 책상이었을 것이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탁월하십니다. 더 공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글감에도 거침없어 보이세요. 고수세요.
고맙습니다.
작년에 도산서원을 방문했을 때 옥진각을 둘러보며 우리집 식탁이 부끄러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