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바위 - 대연평도 남방 6.4km
소연평도 동남쪽에 위치한 바위로,
연평도의 대표적인 바위로 알려졌다.
여객선을 타고 소연평도에 이르면
가장 먼저 관광객 눈길을 끄는 명소.
.
연평도 해국
인천에서 뱃길로 145km 떨어진 연평도
서해 최북단에 위치, 북한 부포리 10km.
황해도 해주 수양산에서부터., 7번째 섬.
바다 위를 기차가 달리는 것처럼
평평하게 뻗친 형이라 하여, "연평도"
1999년 연평해전 이후 피서지로 각광.
연평도는 섬 전체가 안보체험장
연평포격의 현장이 그대로 보존.
연평해전 전사자 추모 평화공원.
연평도 평화기원 둘레길을 조성.
둘레길에서 북녘 땅을 볼 수 있다.
연평도는 서해 최대어장이자
한때 국내 제일 조기파시 어장.
임경업 장군을 모시고 있는 사당
충민사에서 섬내 어민들이 오색만기를
내세우고 당굿과 배굿으로 북,징을 울리며
풍어제(문화관광상품)를 매년 3월경에 지낸다.
........연평도패총(延坪島貝塚).......
경기도 옹진군 송림면 연평리 연평도
신석기시대 수십 개의 조개더미 유적.
연평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를 말하며
백령도·대청도(大靑島)·소청도(小靑島)와
함께 서해안 5도서를 구성하는.,선사유적지.
이 지역에 대한 학술적 조사는
1958년서울대학교에 의한 조사,
1968년임효재(任孝宰)에 의한 조사,
1981·1982년의 서울신문사 후원으로
이루어진 서해5도서 학술조사 등이 있다.
이 곳의 조개더미 중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곳은
대연평도에서 16군데가 확인되었고,
소연평도에서는 항구 근처에 한 군데였다.
대연평도 조개더미 분포는
크게 3곳, 작게 5곳으로 구분.
첫째는 당도. 모이도.
둘째는 연평마을,
셋째는 까치산 일대.
배가 들어오는 당도(堂島)와 모이도(毛伊島),
그리고, 모두 섬 동남쪽 해안가 따라., 밀집 분포.
유적·유물들을 지역별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모이도 조개더미
패각층은 길이 30m, 깊이 3m
여러 개의 간층(間層)이 보이는데
많은 곳은 7개의 층위가 중첩되어 있다.
출토유물 중 빗살무늬토기들은
평행사단선문(平行斜短線文)·
횡주생선뼈무늬〔橫走魚骨文〕·
점줄무늬〔點列文〕 등의
문양을 가지고 있다. 석기에는
양날석기·긁개·몸돌〔石核〕·
격지〔剝片〕 등이 있다.
② 당도 조개더미
이곳의 4군데에서 패총이 조사되었다.
채집된 유물은 모두 빗살무늬토기편으로서
평행사단선문·조대문(組帶文) 등 문양을 보인다.
한편, 한군데 패총에서는 고려·조선시대 자기편들이
출토되어 이때도 연평도에 주민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③ 교회 옆지구 조개더미
많이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었고
문살무늬〔格子文〕문양의
빗살무늬토기들이 발견.
④ 마을 내 조개더미
대부분 파괴되었고
김해토기편(金海土器片)이
출토되는 패총이 약간 있었다.
⑤ 기타 여덟 지구의 조개더미
모두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조개더미으로서
토기에는 횡주생선뼈무늬·
단사선문(短斜線文)·
마름모무늬〔菱形文〕·
빗금문살무늬〔斜格子文〕·
평행사단선문·물결무늬〔波狀文〕
등이 새겨져 있다.
채집된 석기의 종류에는
찌르개〔尖頭器〕·양날석기·긁개 등이 있다.
이 곳 토기들의 문양은 부위의 구별없이 전면에
동일하게 새겨져〔施文〕 있어 연평도 패총의 연대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각 조개더미의 높이가
약간씩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당시 해안선의 변동에 기인한 것.
또한 이렇게 많은 조개더미들이
한 섬에 밀집 분포하고 있는 사실은
생태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한강유역이나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계절적 주거이동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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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문헌에는 연평(延坪), 연평평(延平坪) 표기.
,
............연평도................
섬의 지형이 대체로 평탄하고
들판처럼 길게 뻗어 유래한 지명.
전체적으로 삼각형 저평한 구릉성 산지(최고127m)
해안은 주로 암석해안으로 연안에 간석지가 넓게 분포.
1월 평균기온 -4℃,
8월 평균기온 25℃,
연강수량 1,273㎜,
연강설량 255㎜.
대연평도와 소연평도로 나뉘어져 있다.
대연평도는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약 83.2㎞
대연평도에서 남쪽으로 약 5.2㎞ 지점에 소연평도
대연평도는 동경 125°45′, 북위 37°65′
면적은 7.0㎢이고 해안선 길이는 16.6㎞
소연평도는 동경 125°45′, 북위 37°56
면적은 0.24㎢이고 해안선 길이는 5.5㎞.
1995년에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고,
1999년에 연평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7년 기준으로 대연평도와 소연평도가 속한
연평면 인구는 1,536명(남 865명, 여 671명)이고
세대수는 754호(토지0.45㎢, 밭 0.66㎢, 임야 5.57㎢).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으며,
농산물로는 쌀·콩·고구마·땅콩·마늘·고추 등 생산.
한때 조기 파시(波市)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어장.
현재는 명맥이 끊어지고 꽃게잡이 조업과 굴,
바지락 채취가 연평도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
대연평도 동쪽에 방파제(856m) 설치
2종항 연평도항이 있고, 남쪽 끝에 등대.
연평도는 백령도·대청도·소청도 등과 함께
황해의 어업 중심이 되는 섬으로 북서쪽으로
휴전선과 인접하고 있어 전략적인 가치가 크다.
병자호란 때 임경업(林慶業)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세자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중 선원들의
부식이 떨어지자, 연평도에 배를 대고
나뭇가지를 꺾어 개펄에 꽂아두었더니
물이 빠진 뒤 가지마다 조기가 걸려 있어,
이것이 조기잡이 시초라는 설화가 전한다.
면사무소 뒷산에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충민사(忠愍祠) 사당이 있다.
교통은 인천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
교육기관 - 연평유초교. 연평중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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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충렬사
연평도 조기파시
....2017.10.17 경인일보......
국립민속박물관이 인천 연평도
조기파시(波市)가 번성했던 시절을
기억할 유일한 흔적인 '조기 간통'의
민속학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연평도 파시가 한창일 때
조기를 소금에 절이기 위해
섬 곳곳에 있던 간통은 모두
사라졌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다가 2년 전
연평도의 한 가정집 마당 텃밭에
조기 간통이 남아있는 것을 지역주민이 발견
(2015년 7월 9일자 1면 보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19년 인천 민속문화의 해'
사업의 일환으로 올 1월부터 연평도에서 조사활동.
박물관 조사팀이 조기 간통 1곳을 추가로 발견했다.
지금까지 연평도에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조기 간통은 2015년 발견한 장소를 포함해 2곳. 국립민속박물관 조사팀이
새로 발견한 조기 간통은
개인이 소유한 창고 바닥에
있어 연평도 주민 대부분이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연평도는 조선 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 말까지 국내 최대 조기 어획지였다.
조기파시가 번성할 때는 어선과 상선 3천여 척이
연평도로 몰려 그야말로 '황금기'를 누렸다. 조기 간통은 연평도
근해에서 잡은 참조기를
소금을 넣어 절이기 위한 탱크.
염장한 조기는 해변에 말려 굴비로 만들어
서울, 평양, 개성, 인천 등지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현재는 조기의 씨가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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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은 이달 중 현장조사 마무리,
내년 3월 연평도 어촌생활조사 보고서 발간 계획.
조기 간통의 민속가치를 포함한
과거 조기파시, 현재의 꽃게잡이,
피란민과 원주민 생활,해병대 가족
생활상 등을 보고서에 담을 예정이다. 국립민속박물관 관계자 "연평도 조기파시를
실증할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는데, 새로 발견된
조기 간통 2곳은 연평도 조기 어로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인천 민속문화의 해
사업을 통해 조기파시의 기억을 재조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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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5도., 전쟁과 평화
..........2016.06.29. 스포츠 경향.........
연평도,백령도,대청도 등 서해 5도 지역
어민들이 결성한 서해5도 중국어선 대책위원회가
29일 중국어선 불법조업과 관련 “국가는 우리의 생존권,
해양주권, 어업권, 정주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우리에게
어구 피해에 대해 입증을 요구할 게 아니라, ‘책임정부’와
‘책임국회’로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서해5도 중국어선 대책위원회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어민들은 “우리의
생활은 여전히 비참하기 그지없다”
“생계를 위한 조업활동은 1년에
단 6개월만 할 수 있다. 이마저도
기상악화와 군사훈련 등으로 제대로
하지 못한다. 생존을 위한 전기와 물문제도
심각하다. 지난 연평포격 때는 피폭으로
섬 전체가 정전돼 마비된 일도 있었다.
중국어선들도 우리의 생계와 영토를
유린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민들은 또 서해5도 영해 제도화,
서해5도 대중국 해양경계 획정,
NLL 해상 파시 등 남북 수산경협 추진,
중국어선 불법조업 손실 지원정책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
NLL 해상 파시는 서해5도 어민에게 교역권을 부여해
현행 NLL을 유지하면서도 NLL해상에 대형 바지선을
띄워 수산물 교역을 허가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
정의당 김종대 의원은
“서해 5도에서 우리 어민들의
올해 어획량이 지난해의 30%로 줄어
이대로라면 신용불량자가 속출하고
어민 대다수가 파산할 지경”이라며
“단순히 중국어선 단속·퇴출에
그칠 것이 아니라 지난 18년간
반복되어온 주민들의 생존권과
정주여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어민들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날 개최된
‘분쟁의 바다 서해5도 : 불법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 토론회에서도 국회에
적극적 대책 수립을 요구했다.
........................................
특정 어획물을 어획하는 어장에서
어선과 상선 사이에 어획물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파시'
그러나, '파시'는 실제로는
이보다 넓은 의미를 지닌다.
.
그 어장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육상 근거지에서 어업자와 어부를
고객으로 각종 상행위가 이뤄지는 곳.
파시라는 말이
최초로 나타나는
문헌은 ≪세종실록≫
전라도 영광군에 관한 기사를 읽어보면,
'조기는 동군의 서쪽 파시평에서 산출된다'
.
할주(割註)를 달아 설명하길.,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에 여러곳 어선이 모두 여기에
모여 그물로 이를 잡는데, 관에서 세금을 징수해
국용(國用)에 쓴다."고 세종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황해도 해주목(海州牧)의 기사에는
"조기가 동목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산출된다."고 하고, 할주에서 영광군과
똑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광군 기사에
'파시전(波市田)'이라는 것이 보이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군(郡)의 북쪽 20리.
조기를 산출(産出)한다."
"매년 봄, 경외(京外) 상선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조기를 잡아
판매하는데 왁자지껄 하기가
'한양' 경시(京市)와 같다."
"그 어선들은
모두 세금을 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광군 앞바다.,칠산탄(七山灘).
연평도(延坪島) 부근.,조기 어장.
따라서, 조기 어기가 되면
뒷날 볼 수 있었던 파시가
그 곳에서 열렸을 것이다.
'파시평'이나 '파시전'은
조기 어장을 가리킨 것이 아니면
그 어장 인근의 지명을 가리킨 것인듯 한데,
그 명칭은 파시가 열린 것과 관련성이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파시평이나 파시전에서
파시가 열렸기 때문에 '파시'
라는 말이 쓰여졌을 수도 있을 것.
위에서 본 파시전에 관한 설명은
당시 파시가 열려 상행위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파시 풍경은 파시풍(波市風)이라는데,
파시풍은 고래로 서해안 조기 어기에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과거 조기의 최대어장은
전남 법성포 앞바다 칠산탄,
즉, 칠산도(七山島) 부근에서
위도(蝟島)에 이르는 수역이다.
이곳에서 조기가 많이 잡혔기에
조기를 ‘전라도 명태’라고도 했다.
그 다음 주어장은 연평도 연해였다.
하여, 조기파시는
위도와 연평도에서
가장 대규모로 열렸다.
'구한말, 칠산탄 조기어업 실태' 자료에 의하면,
'어구'는 망선망(網船網)· 중선망(中船網)· 정선망
(碇船網=닻배)·주목망(柱木網)·어전(漁箭) 등이었다.
20세기로 넘어와서는 일본인이 보급시킨
안강망(鮟鱇網)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하며,
망어구(網漁具)를 사용하는 어선과, 척수에
있어서 어선을 능가하는 상선(이는 어장에 가서
어선으로부터 직접 조기를 구입하는 상선이었는데,
出買船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이
팔도에서 이곳에 폭주하여 빈 틈이 없을
정도로 바다를 뒤덮었다고 한다.
칠산탄에서의 조기 어기는
이른봄 시작되어 4월에 끝나는데
이때부터 조기 어군은 북상 회유한다.
그리하여 연평도에서는
조기 어기가 4월에 시작되고
5, 6월경에 끝난다. 이곳에서도
칠산탄 못지않게 조기어업이 성황.
구한말 이미 많은 때에는
수백 척의 어선이 모여들었고,
천리가 넘는 곳으로부터 상선이
몰려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기 어군이 북상함에 따라
어선과 상선이 북상하고
파시도 북상하였다.
어장에서 가까운 육지는
위도나 연평도와 같은 고도.
이 밖에 충청남도의 녹도(鹿島)·
개야도(開也島)·죽도(竹島) 등도
파시가 열린 섬이었다.
조기 어기가 되면
이 고도에 각종 상행위를
위한 일시적 취락이 형성된다.
이 취락은
어기의 북상 이동과
때를 같이하여 이동한다.
따라서,
그 취락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일시적 취락의 성격을 지닌다.
일시적 취락에서
일시적 상행위가
이루어지는 파시.
파시가
일반 시장과
구별되는 특징.
파시의 전형적인 형태가
우리나라 서해안 섬에서
조기 어기에 발견되는 것.
이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1936년에 조사된
전라남도 임자도(荏子島)
서북쪽 대이도(臺耳島:섬타리).
우리나라 서해안 파시를 보면,
그곳에 바라크로 이뤄진 이동취락
파시가 있었는데, 주막· 여관(유곽)·
요릿집· 잡화상· 이발관· 선구상(船具商)·
염상(塩商)·목욕탕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오로지 외지에서 온
어부를 상대로 영업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동할 때는
바라크를 접어서
배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
1930년대 중기 일간지 기사에는
연평도 파시풍을 현장감 있게
다룬 것들이 보인다.
우리나라 3대 어장 중
백미(白眉)로 유명한
연평도 조기어장.
조기 안강망 어선 약 1,000척과
운반선 및 상선 약 1,000척이
몰려와 장관을 이루었고,
육상에는 성어기(盛漁期)
어부의 상륙을 노려
급히 문을 연 요리점 30호,
카페 1호, 음식점 53호를
비롯하여 이발관 9호,
목욕탕 3호, 대서소 2호,
여인숙 5호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조기와 함께
연평도의 명물인
낭자군(娘子群)에서는
예기(藝妓) 5명, 작부 95명,
여급 3명, 합계 103명이 활약.
조기를 쫓는 어부와
어부를 쫓는 낭자군이
뒤범벅이 되어 광복 후에도
조기어업은 주요 어업의 하나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지 않고 있었고, 파시도
예나 다름없이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기 자원의 점차 감소에 이은 고갈로
지금은 서해안의 조기어업은 종언을 고하고 말았고,
이에 따라 파시풍도 전설 속의 이야기로만 남게 되었다.
한편,
파시라고 하면
조기파시 이외에
거문도 고등어파시
청산도 고등어파시,
추자도의 멸치파시
등이 거론되고 있고,
대흑산도에 가면
고래파시라는
말도 듣는다.
그러나
이는 특정 어획물의 거래가
특정 어기에 이동성이 없는
특정 지역에서 성행되어
파시와 같은 광경을
보여주게 되는 데서
생긴 말이며,
이동취락으로서의
본래 의미의 파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
2010. 2. 23.,기사
........................
개도 돈다발을 물고
일제 때 연평도에는 상주하는 경찰이 없었지만
파시 때면 해주에서 임시로 경찰들이 파견 나왔다.
일본인 소장이 순사 3~4명을 데리고 섬에 들어왔다.
순사들만으로 인원이 부족해
파시기간에 임시직원을 썼다.
그들을 "대리 순사"라고 불렀다.
순찰은 대체로 완장과
목검을 찬 대리 순사들의 몫.
하루도 사고없는 날이 없었다.
섬에서 해결이 힘든 큰사고는 해주로 무전.
경찰선이 바로 달려와 범인들을 싣고 갔다.
파시가 끝나면 순사들은 철수하고 다시 연평도는
섬원로와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질서 유지해 나갔다.
이를 ‘동네방’이라 했는데 법규를 위반한 사람이 있으면
구장집 마당에서 주민이 보는 가운데 멍석말이 또는 곤장.
섬에 금주령이 내려졌는데 발각되면
주민들 앞에서 밀주 단지를 깨버렸다.
6.25 이후 파출소 헌병대, 보안대 주재. 파시 때에는
경찰들도 모자라
‘대리 순사’까지 동원.
일제때 조기 생태를 연구하기 위한
일본인 어류학자의 방문도 있었다.
1930년 5월 조선총독부 부산시험장
기사.,우치다 케이타로(內田惠太郞).
그는 인천에서 시험선을 얻어 타고
조기생태 산란 조사차 연평도 방문.
파시 때면, 캬바레, 가설 신파극장,
등도 생기고, 곡마단도 들어왔으며
연예인들이 위문공연을 오기도 했다.
공연은 대부분 배들이 들어오는
조금 물때에 맞추어 주로 열렸다.
1960년대에는 파출소 앞 공터에
가설극장이 생기고 백남봉, 양훈,
양석천 같은 코미디언이나 장소팔,
고춘자 같은 만담가들이 공연했다.
배뱅이굿으로 유명했던
이용관도 와서 공연했다. 공연이 끝난 다음날
가설극장 터에 나가면
돈다발 줍는일도 흔했다.
선주 선원들이 술취해
공연 구경을 나왔다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파시 때에는 개도 돈다발을 물고
다녔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
파시에 사람과 돈이 몰리니 간혹
폭력배들이 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연평도에서 쫓겨났다.
일제시대
어느 해던가
해주 시멘트회사
오야붕이라는 폭력배가
부하들을 이끌고 연평도를
‘접수’하러 왔다기에 선원들과
마을사람들이 해주깡패 구경을 갔다.
해주깡패 오야붕이란 자는
머리에 기름을 잔뜩 바르고
긴 앞 머리카락을 왼쪽으로 돌려
붙였는데 무엇으로 붙였는지 몰라도
바람불어도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야붕은 지팡이 손잡이에
쇳덩이를 덧댄 ‘등산마찌’를
무기 삼아 들고 왔다고 하지만
연평도에 모인 선원들이 모두가
힘깨나 쓴다는 거친 뱃사람들이었다.
연평도 선원들이 해주 깡패들을 에워싸고
“야야, 해주에서나 깡패노릇 하지 연평 와서
깡패 노릇 하려고 하냐”고 엄포를 놓은 뒤에
멱살을 틀어쥐니 바로 항복하고 이내 줄행랑. 바닷물을
마시는 건지
술을 마시는 건지
사리 때, 밀물이 갱변 술집
문턱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어떤 선원들은
만취해 자갈밭에
누워 자고 있다가
물위에 뜨기도 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 사람 죽겠네”
소리치며 달려가
구하기도 했다.
아침이면
또 갈 가마
아궁이에서
잠든 선원이
발견하기도 했다.
밤에 술 취한 선원이
자기 배를 찾지 못하고
온기가 남아 있는 갈 가마
아궁이에서 자버렸던 것이다.
작은 섬에 수만명 사람들이 몰리는
파시 때는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그중
화장실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공중화장실이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벽이면
진풍경이 벌어졌다.
어둑한 해변에
점점이 작은 불빛들이
길게 늘어서서 깜빡거렸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해변에 앉아
함께 대변을 보며 담배를 피우는 불빛.
1934년 연평도에 큰 폭풍이 몰아쳤다.
당시 폭풍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6월1일 아침부터 비 오고 풍랑이 일자
어선들이 내항으로 피항해 들어왔던 것.
내항에 들어온 어선은 600여척.
6월2일 오후 4시경, 강력한 폭풍.
600여척 어선들이 서로 부딪쳐 충돌.
323척 파손, 204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훗날, 황해도 지사와
황해도 수산협회에서
조난자 위령비를 세웠다.
연평 우체국 앞에 세워졌던 위령비는
지금 조기 박물관 근처로 옮겨져 있다. 사라호 태풍 때도 수많은 조기 배들이 뒤집혔다.
해변 판자집들이 쓸려가 버리고 피항을 온 배들도
서로 부딪쳐 파손되고 침몰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눈물의 연평도’를
만든 태풍 사라는
1959년 9월15일,
사이판 섬 해역에서 발생해
한반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동해로 빠져나가 소멸된 태풍 사라.
사망· 실종 849명,
이재민 37만3459명.
선박 1만1704척 파손.
재산 피해는 1900억원.
연평도에 피항 온 어선들도
서로 몰려 있다가 부딪친 탓에
태풍에 파손, 침몰 피해가 컸다.
어로 저지선
파시의 종말
연평도 일대에서., 조기 황금어장은
구월이 안골을 비롯한 해주 인근 바다.
해방 후에도 38선 이남 대수압도 북쪽
해주만까지가 남한의 조업구역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후 휴전되면서부터
황금어장 대부분 북쪽의 영해가 됐다.
남한 측 어선들은 연평도 북쪽 1.3km
NLL 이남에서 만 조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조기잡이 배들은
황금어장을 눈앞에 두고서
조기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월선 조업을 단속하는
남북 양측 감시가 있지만
감시를 피해 미력리도 등 북쪽
섬들 앞까지 숱하게 넘어 다녔다.
월선하면
잡히는 조기의 양이
대 여섯 배가 넘으므로
위험 감수하고 넘어 다녔다. 그 과정에서 밤에 몰래
북쪽 바다로 넘어가 조업하던
남한 배들이 북한의 포격을 받고
침몰하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했다.
1955년 5월에는 북한군이
월선 조업 남한 어선들에게
집중 포격하여 수십명이 사망.
그후에도 남한 배들의
월선 조업은 계속됐다. 1957년 연평도 선적의 배가
북쪽으로 넘어가 조업하다가
육섬에서 북한포를 맞고 침몰.
3명 만 살아 나오고 5명이 사망.
하지만 월선 조업은
그후에도 중단되지 않았고
남북 간에 잦은 마찰이 빚어졌다.
그러던 중 남한 정부는 1968년,
연평도 북쪽 어선들의.,'항해 금지'.
어로저지선(어로한계선)을 만들었다.
그와 함께
연평도에 있던
서해 어로지도 본부도
덕적도 북리 항으로 이전. 그 무렵은
오랜세월 남획 결과
조기 어획량이 급격히
줄던 시점이고 설상가상
1969년 무렵부터 황해에
한랭전선이 깔려 칠산어장,
연평어장 수온이 올라가지 않아
서해의 조기 떼는 남해에 머물렀다.
바다물 온도가
섭씨 11-12도 이상 되어야
조기가 회유 하는데 수온이 차자
조기떼는 북상하지 않고 남해에 머문 것.
유자망 어선들은
가거도나 홍도 근처에
그물을 내리고 마지막 남은
조기떼를 잡아 올리자 조기떼가
연평어장으로 올라갈 길이 막힌 것.
1969년 어로저지선이 남쪽으로 더 내려오고
어선들의 출입항마저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연평도 근해에서는
어선이나 운반선들의
단독 운항이 금지되고
여객선이 출항 때에만
따라 움직일 수 있었다.
마침내 수백년 이어온
연평어장 조기잡이 마감.
연평도 조기 파시도.,종말.
................
................
10.4공동선언 10주년,
지속가능 서해평화 구축방안
NLL ‘해상파시’는 바다위 개성공단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조성은
문재인 대통령의 인천 공약 핵심.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조성은 2007.10.4 남북
정상 공동선언 합의사항. 노태우 전 대통령
북방정책 개선 시작
남북관계는 2000. 6.15선언
2007년 10.4선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침몰 사건.
이에 대응한 우리나라 정부의 5.24조치로 악화.
2016년 1월 북미회담 압박을 위한 북한의 4차 핵실험.
이에 대응한 우리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조치로 더 악화.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전쟁 위협이 드리우는 곳이
바로 북방한계선(NLL) 일대.
이런 탓에 NLL 인근 수역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지정
남북 정상이 10.4선언을 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진척 된 게 없다.
오히려 최근 북한의 체제 보장과
북미회담 압박을 위한 6차 핵실험과
이에 맞선 한·미·일 공조 대북 압박으로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되는 상황이다. 인천의 경우, 1990년대 초 냉전체제 붕괴와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추진으로 중국과
러시아와 수교하고 북한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인천의 바닷길과 하늘길이 열리기 시작하며 성장.
이에 <시사인천>은 10.4선언 10주년과
문재인 정부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조성 계획에 맞춰, 서해 평화를
지속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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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7 경인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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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이
인천 연평도 조기파시
번성했던 시절을 기억할
유일한 흔적인 '조기 간통'의
민속학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연평도 파시가 한창일 때
조기를 소금에 절이기 위해
섬 곳곳에 있던 간통은 모두
사라졌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다가 2년 전
연평도의 한 가정집
마당 텃밭에 조기 간통이
남아있는 것을 지역주민이
발견(2015년 7월 9일자 1면)
보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19년 인천 민속문화의 해'
사업의 일환으로 올 1월부터
연평도에서 조사활동을 벌여온
박물관 조사팀이 조기 간통 1곳을
추가로 발견했다고 16일 밝혔다.
지금까지
연평도에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조기 간통은
2015년 발견한 장소를
포함해 총 2곳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조사팀이
새로 발견한 조기 간통은
개인이 소유한
창고 바닥에 있어
연평도 주민 대부분이
그 존재를 몰랐다.
연평도는 조선 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 말까지 국내 최대 조기 어획지였다.
조기파시가 번성할때 어선과 상선 3천여척이
연평도로 몰려 그야말로 '황금기'를 누렸다. 조기 간통은
연평도 근해에서
잡은 참조기를
소금을 넣어 절이기
위한 일종의 탱크다.
염장한 조기는 해변에 말려 굴비로 만들어
서울, 평양, 개성, 인천 등지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현재는 조기의 씨가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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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은
이달 중 현장조사 마무리,
내년 3월까지 연평도
어촌생활조사 보고서를
발간할 계획이다.
조기 간통의
민속학적 가치를 포함한
과거 조기파시, 현재의 꽃게잡이,
피란민과 원주민 생활, 해병대 가족
생활상 등을 보고서에 담을 예정이다. 국립민속박물관 관계자
"연평도 조기파시를 실증할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는데,
새로 발견된 조기 간통 2곳은
연평도 조기 어로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인천 민속문화의 해 사업을 통해
조기파시의 기억을 재조명하겠다".
파시,
서해 바다
'노스텔지아'
파시철이면 술집
100개 작부만 500명
파시때 연평도에는 요정이나
요릿집 색주가만 100여집 이상.
한집에 작부 5명씩 줄잡아 500명.
봄, 조기 파시철이 돌아오면 연평도에
고기배보다 먼저 들어온 상점 색주가들.
점포를 세내고 가건물을 짓고 상품을 진열.
손님 맞을 준비에 분주했고
색주가에서는 술을 비축하고
안주 장만, 작부들을 구해오고
파시 한철 장사 준비로 들썩였다.
장사꾼은 흑산도 위도 파시를 거쳐
오는 이들도 있었고 한몫 잡을 심산으로
인천 등지에서 처음 들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이때가 되면 마을의 가장 앞줄,
'갱변'쪽 집들은 장사꾼들에게
한철 세를 놓고 자신들은 마을 안쪽
집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이사를 갔다.
그때부터 가정집이
색주가로 바뀌었다.
해변가인 '갱변'에는
판자 가건물들도 생기고
그곳에도 색주가가 들어섰다.
'어부들을 쫓는 철새' '물새'라
불린 작부들은 연평도에 들어오면
사진과 증명서 제출. 면사무소에 등록.
주점도 영업허가를
받아야 했지만 무허가
주점 미등록 작부도 많았다.
400명 작부가 등록을 하면
미등록 작부가 200명은 됐다.
색주가는 주인 고향에 따라
인천옥·목포옥·해주옥·군산옥·
비금옥·위도집·흑산집 등 간판.
해변 식당, 신선 요릿집 등
식당 간판을 단 집들도 이름만
식당이지 다들 색시장사를 했다.
일제 때는 연평도에
일본 기생에 카페까지
일제때 일본 유곽도 있었고
일본기생 '게이샤'들도 많았다.
1930년대 연평파시에는 상점 중에서
요릿집과 음식점 간판이 가장 많았다.
어느 해에는 요릿집 게이샤 만 50명이 넘었다.
조선인 업소는 60여개, 작부가 150여명이었다.
그당시, 연평도 작부수는 해주 시내보다 3~4배.
1936년, 연평파시에 신고된
요리점은 300개, 음식점 53 개,
카페 1호. 이발관 9개, 목욕탕 3,
여인숙 5. 대서소 2. 작부 95, 예기 5.
그때도 미등록 작부는
그 숫자가 훨씬 더 많다.
파시때면 술 담글 줄 아는 주민들은
막걸리와 청주를 담가서 내다 팔거나
색주가에 술을 댔고, 쌀밥을 먹지 못해도
연평도 주민들은 술은 쌀로 빚어다 팔았다.
파시때
연평도에서
유명한 술은
'박문주' 청주.
연평도 사람들이
용수박아 뜬 쌀술.
술의 빛깔이
꽃처럼 빨갛고
입에 척척붙었다.
색주가에서 박문주는 됫술로 팔았다.
주민들은 쌀 한말로 막걸리를 만들어
내다 팔면 쌀 한가마니 값을 벌었다.
조기배가 정박하면
나이가 어린 화장이나
늙은 영자는 배를 지키고
뱃동사 6~7명이 술집으로 갔다.
뱃동사들 틈에 색시들
2~3명이 앉아 술을 쳤다.
남자들 숫자에 비해
여자 숫자가 워낙 적으니
맘에 드는 색시를 차지하려고
뱃사람들 간에 주먹다짐도 흔했다.
색시들 중에는 장구 잘치고
창을 잘하는 이들도 있었다.
고급술이라야
정종이나 박문주
대부분 막걸리 소주.
안주는 생선탕.
생선구이, 돼지고기
등이 주안상에 올랐다.
거미줄 친
맥주병 섞어
바가지 씌우던
연평도 작사판
고단한 뱃일에 지친 뱃동사들은
색주가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몇잔을 못 마시고 취해버렸다.
그러다가 그대로
방에 누워 잠들기도 하고
깨어나 다시 마시기도 했다.
뱃동사들은 돌아가며 쓰러졌다가
일어나며 그렇게 밤새워 술마셨다.
막걸리나 소주를 마시던 뱃동사들도
막판는ㄴ 입가심 맥주를 마시곤 했다.
하지만 그쯤되면 거의 모든 뱃동사들이
취해서 쓰러져 그 자리에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에 배임자가 술값을 계산하려고
색주가에 들르면 맥주병이 방안에 가득.
뱃동사들이 잠든 사이 빈 맥주병을 가져다
방안에 슬쩍 놔두고 바가지를 씌웠던 것이다.
그중에는 거미줄이 처진 맥주병도 더러 있었다.
술집 주인은 밤새 거미줄이 처진 것이라 우겼다.
그러면 선주도 별 수 없이 속는 줄 알면서 속았다.
매번 선주가 술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선원들 자신이 돈내고 먹었다.
술값을 못내면, 덜미 잡혀 갇히기도 했다.
그때는 선주가 와서 빼내 주었다.
힘든 뱃일로 어렵게 번돈을 술집에서
쉽게 탕진하는 일이 다반사으며 집에는
한푼 가져다주지 못한 어부의 아내들은
혼자 힘으로 아이들 기르며 생고생 했다.
"밤새도록 술들 처먹고 돈 떨어뜨리고,
개가 돈다발을 물고 다니고 그랬는데 뭐."
봄철 파시때 '술집 누나들이 오면'
동네 아이들 마음도 덩달아 설렜다.
어린 마음에 누나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술집에 드나들며
누나들의 담배 심부름도 해주곤 했다.
어떤 술집 누나들은 개차반처럼 구는
손님에게는 병을 깨면서 덤벼들었다.
"파송을 치고나서
술집 누나들이 떠나면
어린 마음들도 쓸쓸해졌다."
조금때를 제외하면
바람이 불어서 피항해 온
배들이 많을 때가 색주가들
술집 누나들에게는.,큰 대목.
그래서, 연평 파시때면
"기생들이 갈바람 불라고
굿을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연평도 보건소장은 1주일에 한 번씩
색주가를 돌면서., 작부들의 성병 검사.
6·25 이후에는 연평도에 미군부대도 주둔.
미군들도 색주가에서 술마시고 가곤 했다.
화사하게 치장한 겉모습과는 달리
색시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밤낮 없이 술을 마시고 험한 사내들의
비위를 맞추고 몸까지 팔아야 했으니
파시 끝날 즈음.,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
게다가 연평도 작부들 중에는
색주가 포주에게 번 돈을 뜯기고
노예처럼 생활해야 하는 일도 흔했다.
색주가를 비롯한 장사치들은
봄철 조기잡이가 파송을 치면
미련없이 연평도 섬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