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미쳐야 미친다> /푸른역사
-삶을 바꾼 만남-
고등국어 미래엔신사고에 수록된 글
다산 정약용,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조선시대 학자다. 그가 강진 유배길에 오를 때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머나먼 강진은 과연 살아서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은 죽으란 법은 없는 것 같다. 유배지에서 배운 도둑질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아전들의 자식들을 몇 명 모아서 글을 가르쳤다.
이 글을 읽으면서 너무 감동이 되어서 워드까지 쳐 보았다. 또 읽어보아도,
역시나 심금을 울리는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아전의 자식인 황상은 배움에 목말라 했던 것 같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황상은 스승께 다가가 나같은 미련하고 게으른 사람도 글을 배울 수 있냐는 질문에 다산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부지런해야함을 강조 하고 당연히 잘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워 준다.
열다섯 살이면, 중학교 2학년 정도의 나이다. 정말 용기 있는 황상이다. 다산에게 다가간 것만으로도 그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때 그런 용기도 없었거니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할 만큼 생각도 못해본 왕 소심한 아이였다.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정약용은 무려 18년을 강진에서 보내며 그곳에서 만난 제자들과 계를 조직하여 관계를 지속해나갔다. 서울로 떠난 스승을 잊지 못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황상의 마음.
황상의 인생을 바꿔준 다산과의 만남은 그를 평생토록 부지런함을 실천하며 스승의 삶을 본받았다.
한 번의 만남으로 삶 자체가 달라지는 맛난 만남, 황상이 쓴 문집<<치원유고巵園遺稿>>에서 볼 수 있다. 다산의 아들들과의 정황계를 조직해서 자손대대로 만남을 유지해 왔던 그 만남도 정말 맛스러운 만남이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약속을 지켜오고 있을까 궁금하다. 광속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편의점에서 쉽게 구입하고 버려지는 일회용만남, 현대인들은 관계의 지속성에 대해 부담을 많이 갖는다.
사제지간의 정은 옛말이다. 스승님, 그림자도 감히 밟지 않는다?라는 말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누가 나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누구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늘 군중 속에서 나 혼자만의 세계를 추구하고 SNS가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삶 속에 나라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래서인지 관심으로부터 숨고 싶어 한다. 혼자만의 세계로 나를 감춘다. 황상처럼은 못하더라도 사제지간의 벽은 없었으면 좋겠다.
절망의 시간에 만난 눈물겨운 제자, 황상
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경험한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만남 앞에서도 길 가던 사람과 소매를 스치듯 그냥 지나쳐 버리고는 자꾸 딴 데만 기웃거린다. 물론 모든 만남이 맛난 것은 아니다.
만남이 맛있으려면 그에 걸맞은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외손뼉만으로는 소리를 짝짝 낼 수가 없다.
한 번의 만남으로 삶 자체가 달라지는 맛난 만남, 그런 만남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시절 제자인 황상이다. 시골의 학구(學究)에 불과했던 황상이 쓴 문집<<치원유고巵園遺稿>>를 뒤적일 때마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뭉클해진다.
황상은 열다섯 살 나던 1802년 10월 다산을 처음 만났다. 당시 다산은 강진으로 귀양 와 있었다.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모두 겁이 나 문을 꽁꽁 닫아걸고 받아 주려 하지 않아, 그는 하는 수없이 동네 주막집 방 한 칸을 빌려 기식하고 있었다.
아둔하고, 꽉 막히고, 융통성 없는 제자를 위한 가르침
황상은 강진 고을 아전의 자식이었다. 서울에서 온 훌륭한 선생님이 아전의 아이들 몇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주막집을 찾았다. 그렇게 며칠을 내처 찾아가 추뼛추뼛 엉거주춤 글을 배웠다. 7일째 되던 날 다산은 수업을 마친 황상을 따로 불러 앉혀 놓고 말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지만 선생님! 저는 머리도 나쁘고, 앞뒤가 꼭 막혔고, 분별력도 모자랍니다. 저도 공부할 수 있을까요?” 잔뜩 주눅 든 소년에게 다산은 기를 북돋워 준다.
“그럼 할 수 있고말고, 항상 문제는 제가 민첩하다고 생각하고,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단다. 한 번만 보면 척척 외우는 아이들은 그 뜻을 깊이 음미할 줄 모르니 금세 잊고 말지. 제목만 주면 글을 지어 내는 사람들은 똑똑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저도 모르게 경박하고 들뜨게 되는 것이 문제다. 한마디만 던져 주면 금세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곱씹지 않으므로 깊이가 없지.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나 대단하겠니?
둔한 끝으로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는 큰 구멍이 뚫릴 거다. 꼭 막혔다가 뻥 뚫리면 거칠 것이 없겠지. 미욱한 것을 닦고 또 닦으면 마침내 그 광채가 눈부시게 될것이야.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하겠니?
첫째도 부지런함이요, 둘째도 부지런함이며, 셋째도 부지런함이 있을 뿐이다.
너는 평생 ‘부지런함’이 란 글자를 절대 잊지 말도록 해라. 어떻게 하면 부지런할 수 있을까? 네 마음을 다잡아서 딴 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꼭 붙들어 매야지. 그렇게 할 수 있겠니?”
황상은 스승의 이 가르침을 평생을 두고 잊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으로 스승을 모시다
다산은 강진에서 19년에 걸친 긴 귀양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1818년 8월 그믐날, 다산은 강진을 떠나면서 제자들과의 작별이 못내 아쉬워 다신계(信茶契)를 결성했다. 그 후로도 제자들은 해마다 힘을 합쳐 차를 따서 서울에 계신 스승에게 부쳐 드리곤 했다. 하지만 스승을 잃은 다산초당은 점차 황폐해져 갔던 듯하다. 황상은 스승의 체취ㄹ가 못 견디게 그리우면 문득 다산초당을 찾아 한참을 머물다 가곤 했다. 이미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초당의 옛터를 서성이며 스승이 손수 파서 새긴 정석(丁石)이란 두 글자를 어루만지다가, 스승이 일군 대숲과 연못을 보며 지난날의 맑은 풍경을 그리워했다. 그러면서 스승이 계시던 옛터를 백 년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서글퍼했다.
그러던 그가 다산이 강진을 떠난 18년 후 1836년 2월 무슨 느낌이 있었던지 두릉땅으로 다산을 찾아뵈었다. 스승 내외의 회혼례(回婚禮)를 축하드리고, 살아계실 때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뵙자는 생각이었다.
이때 다산은 병세가 위중해 잔치를 치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열다섯 소년이었던 제자는 쉰을 눈앞에 둔 중늙은이가 되어 죽음을 앞둔 스승께 절을 올렸다. 곁에서 며칠 머물며 옛날이야기를 나누다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아뢰었을 때, 다산은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그의 마디 굵은 손을 붙들고 작별을 아쉬워했다. 그냥 보내기 안타깝다며 접부채와 운서(韻書), 피리와 먹을 선물로 주었다. 스승과 제자가 헤어지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그저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그렇게 헤어진 뒤 며칠이 안 되어 다산은 세상을 떴다. 황상은 도중에 스승의 부고를 듣고, 그 길로 되돌아와 스승의 영전에 곡을 하고 상복을 입은 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황계를 맺은 뜻
황상은 스승의 10주기를 맞아 다시 두릉을 찾았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은 10년 만에 기별도 없이 불쑥 나타난 황상을 보고 신을 거꾸로 신고 마당으로 뛰어 내려왔다. 황상은 이제 예순을 눈앞에 둔 늙은이였다. 꼬박 18일을 걸어와 스승의 묘 앞에 섰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부르튼 발을 보고 학연은 아버지 제자의 손을 붙들고 감격해 울었다. 그의 손에는 그 옛날 스승이 주었던 부채가 들려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그립고 제자의 두터운 뜻이 고마워, 늙어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부채 위에 시를 써 주었다. 그러고는 정 씨와 황 씨 두 집안 간에 계를 맺어, 이제부터 자손 대대로 오늘의 이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할 것을 다짐했다. 그 <정황계안丁黃契案>은 황상의 문집에 실려 있다. 황상과 정학연, 정학유 형제의 아들과 손자의 이름과 자, 생년월일을 차례로 적은 뒤, 끝에다 이렇게 썼다.
이것은 우리 두 집안 노인의 성명과 자손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정학연은 침침한 눈으로 천리 먼 길에 써서 보낸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대대로 신의를 맺고 우의를 다져 갈진저, 계를 맺은 문서를 제군들에게 돌리노니 삼가 잃어버리지 말라.
이 해가 1848년이니 이때 정학연은 예순여섯, 황상은 예순하나였다. 그 옛날 더벅머리 소년에게 던져 준, 오로지 부지런하면 된다던 스승의 따스한 가르침은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정민 <미쳐야 미친다> /푸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