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출가
미국에서 돌아와 서울에 작은 집을 잠시 얻었다.
조촐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고, 소소한 공부도 할 겸, 국립도서관 가까운 예술의 전당 앞 어느 빌트인 원룸..
근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몇 달이 지나도 방황이 계속된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며 지낼 수는 없다.
천주교 수도원도 찾아보고, 꽃동네 나환자촌도 연락해 보고..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마음이 진심으로 동하질 않는다.)
어느 때 부터인가 방 안에 들어앉아 멍하니 티비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불교TV에 현각스님의 영어 법문이 나온다. (아~ 왜 이리 마음이 편하지?)
이른 새벽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또는 밤 늦게 도서관에서 돌아오면,
불교방송을 틀어놓고 하염없이 누워 있고는 했다.
2004년 늦가을 어느날.. MBC에서 무언가를 방영한다.
1부는 놓치고 2부를 보았는데,
(아 저 곳에 가야겠구나..) 비로소 마음이 움직인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무작정 월정사를 찾았다.
저녁 무렵 도착하여 버스 기사님에게 물어물어 민박촌에 잠자리를 정했다.
(이제사 알고보니, 19기 혜원님이 운영하시는 민박집 바로 그 자리^^)
다음 날 아침을 간단히 먹고, 아스팔트 길을 걸어,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길을 오른다.
늦가을 이른 아침.. 살풋이 안개 덮힌, 서늘한 전나무 숲길..
그 느낌은 여전히 잊을 수 없다.
종무소에 도착하여 이차 저차 말씀을 드리니,
동글동글한 권미숙보살님(당시 단기출가학교 소임)이 따끈한 차 한 잔을 내어주신다.
스님께서 지금은 회의중이시니, 점심 공양 후에 스님과 상담 시간을 마련해 놓겠다 하셨다.
종무소를 나와 이리저리 거닐었다.
오후에 다시 찾아가니 스님 한 분이 반겨주신다.
별로 스님같지 않으신^^ 편한 인상에, 자상하게 얘기를 들어주시어 마음이 푸근하다.
"그렇게 하세요. 한 달간 수행하시고, 두 달이고 세 달이고 자원봉사 하시며 마음을 보살피다 가세요."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교무국장 소임 및 단기출가학교를 전담하고 계시던 동은스님이셨다.)
무얼 할 말이 많아 이렇게 글이 길어지는지.. ^^;;
해를 바꾸어 2005년 1월 3일, 다시 진부터미널에 내려 (담배 끊은 기념으로) 시골^^치과에서 스케일링을 받았다.
치료중 기계가 자꾸 고장나서 시간이 지연된다. 지각이다 !!
택시를 타고 금강교 앞에 내려 뛰어갔다. 십여분 늦었지만 다행히 두 말 없이 받아주신다. ()
첫 회라서 서론이 길어지네요.^^ 담부터는 좀 더 짧게, 일불님 얘기와 함께 합니다. ()
1. 자자회 (自恣悔)
가끔씩 새로 인사를 나누는 동문 법우님들이 농담삼아 물어보시고는 한다.
수행하러 와서 연애 했느냐고..^^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다. (아~ 십년전 유행어)
내게는 삶의 벼랑 끝에서, 하루 하루가 절박했던 시간들이다.
스님과 상담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불교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기에) 두어달의 시간을 두고 마음을 정하고 싶었고,
수행 과정 내내.. 신(身)출가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
갈마를 하고, 하룻밤을 뜬 눈으로 지새고.. 다음날 삭발을 하고, 삼보일배, 적멸보궁..
며칠이 지나서야, 일과에 겨우 적응을 하여 어느덧 마음의 평온을 찾아갈 무렵이다.
저녁 공양 마치고 법륜전 자자회 시간.
70여명의 행자님들이 벽을 등지고, 반원을 그리며 큰 법륜전에 빙 둘러 앉는다.
앞에는.. 동은스님, 주봉스님, 해욱스님, 선나스님, 현묵스님이 고요히 앉아 지켜보시고,
우리는 마이크를 돌아가며 잡고, 지난 며칠 자신의 생활을 살피며, 중앙에 나가 부처님 전에 참회의 삼배를 올린다.
순서가 돌아오는 사이 사이에 '나는 무슨 참회를 해야 하나' 설핏 고민하던 중..
여행자님 한 분이 마이크를 잡고 주저주저 한다.
고등학생? 은 아닌거 같고.. 대학 초년생쯤? 되어 보인다.
"양말이 없어서.. 세면장에 널려 있던 두꺼운 양말.. 하루 신고 가져다 놓았어요."
얼굴이 붉어져서, 금방이라도 울듯이 어쩔줄을 모르다가, 종종걸음으로 나가 부처님 앞에 삼배를 불안스레 올린다.
적광전 새벽 예불은 참 추웠다.
지금은 양쪽에 공기순환식 히터를 넉넉히 틀어주시지만,
5년전 그 겨울의 새벽, 냉골 법당에는 겨우 석유난로 두 개.. 그것도 냄새와 소음 때문에 왠만하면 꺼놓고는 하셨다.
새벽 예불 끝나고 법륜전으로 이동할 때면, 발끝이 살짝 얼어 있고는 하던 기억..
자자회가 끝나고, 세면 마치고, 빨래 널어놓고 잠자리 펴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내 양말을 하나 그 행자님한테 줄까?'
그러나, 나름대로 꼼꼼하게 준비한다 했는데, 나 역시 양말에서 이미 문제가 생겼다.
평소에 겨울에도 추위를 별로 안타기에, 얇은 양말 세 개, 두꺼운 양말 두 개를 준비해 왔다.
아차.. 적광전 거친 카펫 위에서 절을 하니, 얇은 양말이 이틀만에 해져서 구멍이 난다.
이제 얇은 양말은 비상용으로나 쓸모 있을까,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어져 버렸고
두꺼운 양말 두 개로 겨우 하루걸이 연명하며 지내는 신세..
마음은 안타깝지만 내 것을 줄 수는 없다.
'내일 종무소 권보살님에게 부탁해 볼까?'
행자 신분으로 묵언하고 지내며.. 오지랍 넓게 남의 양말 하나 달라 하기도 아니다 싶다.
'어찌해야 하나..'
명등 소임자의 "소등하겠습니다" 한 마디에...
하루 내내 잠이 부족하던 새내기 행자는,
차거운 한겨울 달빛 고즈넉한 서별당 귀퉁이 잠자리에서
세상 모르고 어느덧 수면 삼매에 빠져 버린다. ()
첫댓글 늦잠자는 율이 덕분에, 토요일 아침 즐거운 추억의 글을 써봅니다. 율이 깼네요? 노트북 딸래미한테 넘깁니다. ^^
안녕하세요..선일님..저 19기 혜초입니다... 어제 보궁에 갔다와서 그런지 오늘아침 선일님의 글이 참 좋습니다 갈마때 점퍼 갔다주셨는데..이제야 고마웠다는 인사을 합니다...정말 고마웠습니다..
합격 소식에 가슴이 설레였던 순간들....저자리에 제가 있었네요
^^*
내가 단기출가에 꼭가야 하는이유... 나를 찾기위해서... 그때의 설레임으로 가슴이 다시 콩당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