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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영토 스크랩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의 평화운동
천사나무 추천 0 조회 143 17.09.08 16: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의 평화운동


아나뱁티스트운동의 역사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orea Anabaptist Center, KAC)가 설립되어 활동을 시작한 때는 2001년 11월 2일이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아나뱁티스트운동이 시작된 때는 1525년 1월 21일이다. KAC의 평화운동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나뱁티스트운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KAC는 아나뱁티스트운동의 ‘제자도, 평화, 공동체’라는 핵심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며, 운동 초창기부터 기독교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운동은 처음부터 평화 신학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냈으며, 평화주의자들과 검(무력,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 사이에 대한 성서적 오해와 이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520-30년대의 유럽은 종교개혁이 시작된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서도 개혁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변화는 안정감이나 평화보다는 불안함과 폭력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이는 감정, 사상, 언어의 차원을 넘어서 실제로 물리적인 폭력, 더 나아가 전쟁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한다.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1525년 토마스 뮌처의 농민혁명은 물론이거니와 1534-35년의 뮌스터 사건도 모두 무력의 사용과 전쟁 때문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폭력운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평화주의를 표방하던 다수의 아나뱁티스트와 상관없이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던 역사의 비극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잘못된 통념에 근거하여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아나뱁티스트를 광신도 내지는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복음을 근거로 평화주의를 표방하던 다수의 아나뱁티스트마저 끊임없이 이단의 사설이라며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20세기에 들어서 교회론에 대한 연구와 성서적 교회를 추구하는 진지한 사람들에 의해 아나뱁티스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박해를 당해왔으며, 이들의 평화주의가 얼마나 오해되어 왔는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농민혁명과 뮌스터 사건은 이때부터 아나뱁티스트의 정신에서 벗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재평가되었다. 우선 토마스 뮌처의 농민혁명은 아나뱁티스트운동과는 무관한 역사적 사건으로, 뮌스터 사건은 아나뱁티스트를 표방하였지만, 새 예루살렘을 이루며 살겠다는 잘못된 종말론과 그것을 신봉하는 무리의 비극으로 새롭게 이해되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아나뱁티스트운동은 가톨릭 정부에 의해 받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에게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한 16세기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이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얻게 된 경멸조의 이름이 바로 아나뱁티스트(Ana+baptist=re+baptizer)이다. ‘ana’는 어원상 ‘다시’(re)라는 뜻도 있지만, ‘철저한 세례를 실천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는데, 이들이 베푼 세례를 “신자들의 세례”(believer’s baptism) 혹은 “성인 세례”(adult baptism)로 부른다.
이렇게 가톨릭과 개신교에 의해 재세례신자로 명명된 이 그룹은 1525년 1월 21일 첫 번째 재세례를 시행한 후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다. 16세기 기독교 사회를 표방하던 유럽에서 이보다 더 비난받은 이름은 없었으며, 가톨릭은 물론 개신교에서는 이들을 유럽의 종교와 사회 제도를 폭력적으로 파괴하는 아주 위험한 운동으로 규정하였다. 이 운동을 아주 기괴하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신앙은 악마가 조종하는 이단으로 간주하였다.1 취리히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와 남북부 독일, 모라비아, 네덜란드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일부 폭력과 연결된 경우도 있었지만, 이 운동은 초기부터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평화교회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아나뱁티스트운동의 초기 신앙고백서로 알려진 ‘슐라이트하임 고백서’에 잘 드러나 있다. 1527년 스위스와 독일 국경에 위치한 슐라이트하임에서 개최된 순교자들의 총회(Martyrs’ Synod)에서 나온 이 고백서는 당시에 아나뱁티스트운동이 당면한 문제를 다루는 최초의 신앙고백서로 인정되고 있다. 마이클 자틀러, 조지 브라우락, 빌헬름 로이블린과 같은 초기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들이 참석한 이 모임의 핵심은 박해로 말미암아 위기에 처한 운동, 즉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기본 실천사항을 규정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이 고백서는 다양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아나뱁티스트운동의 일치된 내용을 담고 있다. 총 7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이 고백서의 첫 세 조항은 교회 멤버십의 의미를 위한 “세례”, “권징”, “주의 만찬”에 대한 내용이고, 네 번째 조항은 “세상과 교회의 분리”, 다섯 번째 조항은 “리더십”, 그리고 마지막 두 조항은 “무력”과 “맹세”에 대한 내용이다.2
특별히 마지막 두 조항은 아나뱁티스트들이 갖고 있던 국가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설명해놓은 것으로서, 앞의 다섯 조항보다 상대적으로 길고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는 아나뱁티스트들이 국가교회에 의해 비판과 위협의 대상이었음을 드러내며, 신자로서 그들이 취해야 할 분명한 입장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조항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폭력을 의지하거나,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맹세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아나뱁티스트운동은 슐라이트하임 고백서를 기반으로 16세기 출발부터 그리스도의 평화를 삶 속에서 실천해왔으며, 유럽의 박해를 피해 긴 신앙 여정을 걸어야 했다. 이들이 걸어온 평화의 발걸음은 유럽에서 머물 곳이 없자 모라비아, 프러시아를 거쳐 더 멀리 우크라이나와 트란실바니아를 지나 북미와 남미에까지 이르렀다. 여러 시대의 우여곡절을 몸으로 감내하며 비로소 20세기에 와서 평화교회를 형성했다. 이들이 걸어온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이 평화교회를 형성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 기독교에는 다소 생소한 평화교회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메노나이트, 퀘이커, 형제교단이 주창한 교회운동이며,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내에 들어온 메노나이트 교회의 활동, 그리고 KAC
이러한 맥락 속에서 KAC는 메노나이트 교회와 연결되어 설립되었다. 센터는 2001년에 설립되었지만, 한국과 메노나이트 교회와의 인연은 1953년 한국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메노나이트의 역사는 현 KAC가 설립되기 훨씬 전, 한국 사람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피폐해졌을 때, 전쟁고아 및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Mennonite Central Committee, MCC)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현재 춘천에 위치한 KAC에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서 몇 개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이 사진들은 1952년부터 1971년까지 약 20년 동안 한국에서 수고했던 MCC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전쟁고아 및 미망인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영향을 끼친 그들의 땀과 눈물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아직도 한국 기독교 역사에 편입되지 못한 한국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역사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50. 10.-UN이 최초의 MCC 직원의 한국 입국을 허락함.
1952.-MCC 달라스 보랜 한국 파견, 부산 민간협회본부의 봉사단체 연락사무관으로 첫 업무를 시작함.
1953.-어니스트 래버와 데일 위버가 부산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함. MCC 한국대표부의 설립(대구)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함.
1971년까지 20여 년간 총 74명의 메노나이트 봉사자가 한국에서 활동함.

20여 년간의 행간을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첫 메노나이트 활동으로서 이들이 펼친 사역 내용은 물자구제사업,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Mennonite Vocational School), 가족/어린이 지원 프로그램, 전쟁 미망인들을 위한 재봉기술 교육 등이 있다. 이러한 활동 외에도 병원 자문봉사, 지역개발봉사, 기독교 어린이 위탁 훈련교육 등 대구와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구제, 교육, 지역개발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급속한 경제개발과 더불어 MCC 사역은 더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나라로 옮겨지게 되었다. 1971년, 20년 동안 시행되던 메노나이트 직업학교의 마지막 수업이 진행되었고, 결국 한국에서의 MCC 사역이 종료되었다. 당시 한창 전쟁의 피해로 씨름하던 베트남 등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나라로 사무실을 옮겼다. 이렇게 MCC의 사무실이 다른 나라로 이전하게 된 후에도,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 동문 모임을 통해 메노나이트와의 개인적인 교류는 지속되었고, 메노나이트 교회 개척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표출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직업훈련학교 동문을 비롯하여 메노나이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기독교인들이 생겨났고,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와 교류가 시작되었다. 공식적인 교류는 1996년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로부터 선교사가 파송되면서 재개되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한국 메노나이트 교회에 대한 관심이 싹트게 되었고, 현재 캐나다와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는 물론 메노나이트 세계협의회(Mennonite World Conference, MWC)와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현재 한국 아나뱁티스트와 전 세계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여러 형태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2001년에 KAC가 설립되었다.

KAC의 평화운동 전개
KAC는 “성경에 근거한 아나뱁티스트 관점의 제자도, 평화, 공동체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며 이를 위해 네트워크, 교육, 출판을 통해 개인, 단체, 교회를 섬기는” 것을 목표로 2001년에 설립된 선교기관이다. 설립 초기부터 제자도, 평화, 공동체를 핵심 가치로 여겨왔으며, 아나뱁티스트 관련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자료센터의 역할도 감당해 왔다. 목표에 담긴 제자도, 평화, 공동체는 KAC뿐만 아니라, 전 세계 메노나이트 교회가 공유하는 핵심 가치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제자도’는 어떤 프로그램이나 제도가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정의, 구원과 분리될 수 없는 가치로서 평화의 왕이신 어린 양 예수의 길을 구체적으로 따르는 모습을 의미한다. 아나뱁티스트는 평화를 언급하면서 무저항, 비폭력을 그 방식으로 삼아왔으며,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삶의 표준 혹은 행동강령으로 이해한다. 구체적으로는 일상에서의 화해와 평화운동은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후원, 대체복무 실현을 위한 평화기관 및 단체와의 연대, 전 세계 메노나이트들과 평화를 위한 정보 교환 및 연대 등을 통해 평화를 추구한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공동체’란 그리스도인들의 의도적 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선은 신자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를 말한다. 여러 나라에서 도시화가 진행되기 전까지 아나뱁티스트들의 교회, 공동체, 마을은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16세기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아나뱁티스트 그룹이 후터라이트 형제단이며, 1930년 독일에서 시작된 부르더호프 공동체 또한 아나뱁티스트 정신을 표방하고 있는 대표적인 그룹이다.
KAC는 삶과 신앙의 일관성을 지향하며, 핵심 가치 그대로 프로그램에 실현하고자 애써왔다. 우선 센터 창립 처음부터 1,000권이 넘는 아나뱁티스트 관련 서적을 갖추어 도서관 역할을 감당해 왔고, 사역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한국아나뱁티스트출판사를 설립하여 제자도, 평화, 교회 관련 도서를 출간하였다. 또한 시대에 맞는 강연회와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였고, 세계의 석학들을 초청하여 순회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2013년 스튜어트 머레이를 초청하여 아나뱁티스트 성서해석학 강연회를 연 것과 2016년 1월 존 로스를 초청하여 아나뱁티스트 학술대회를 연 것이 그 예이다.
한편 청년들에게 봉사와 섬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2002년부터 현재까지 26명의 청년을 북미에 보내 MCC 국제문화 체험프로그램으로 자원봉사를 하도록 안내하였고, 20명의 북미 청년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MCC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이었으나 KAC가 그 역할을 담당해왔고, 2014년 MCC 동북아 사무실이 춘천에 마련되면서 프로그램이 이관되었다. 이 모든 프로그램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자도, 평화, 공동체”를 이루는 신학이 오롯이 녹아 있다.
이외에 KAC는 설립 초기부터 자급자족을 위해 평화 커피숍, 평화 및 관계 중심의 어학원, 동북아시아 평화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에서 사무실을 운영하였고, 2012년부터는 춘천으로 이전하였다. 많은 것이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 상황에서 사무실을 춘천으로 이전하면서 그동안 진행해온 평화훈련 프로그램은 현재 남양주에 있는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rea Peace Institute)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관계 중심의 영어학원인 커넥서스어학원과 한중일 청년들을 대상으로 평화 훈련을 시키는 동북아 평화교육훈련원(Northeast Asia Regional Peacebuilding Institute)의 프로그램은 KAC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KAC는 관련 아나뱁티스트 교회와 네트워크를 이루며, 새로이 시작되는 한국메노나이트교회연합회(Mennonite Church South Korea)와 협력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평화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한국에서 기독교 평화그룹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KAC의 활동은 미미한 편이지만, 모든 프로그램의 저변에 평화의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단기적인 평화의 효과나 결과를 추구하기보다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KAC는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회복적 정의’ 운동을 처음 시작한 단체이며, 회복적 정의 및 단체와 관련된 많은 책을 출간하고 있다.3 비록 KAC의 주요 프로그램이 한국 평화교육 훈련원으로 이전되어 시행되고 있지만, 정의와 평화 실천 시리즈를 출간하는 출판사로서 다른 곳에서 출간하지 않는 평화 및 공동체 자료를 발간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평화교회의 전통에 기반을 두어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작은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여전히 낯선 분야이긴 하겠지만, KAC는 평화 신학, 평화 건설, 회복적 정의, 갈등 해결 등의 주제에 대해 끊임없는 목소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성서적 평화주의에 기반을 둔 평화의 목소리가 사그라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좀 더 바라기는 한국에 더 많은 평화교회가 생겨나기를 기도하고, 평화 관련 세미나 및 발표의 장을 더 자주 마련함으로써 구체적인 평화를 맛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1 월터 클라센, 김복기 역, 『아나뱁티즘』(KAP, 2017), 27.
2 코넬리우스 딕, 김복기 역, 『아나뱁티스트 역사』(대장간, 2013), 78-85.
3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는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 잘못, 피해, 범죄행위를 바로잡기 위해 피해자, 가해자, 관련 공동체 구성원을 참여시켜 가해자에게는 책임을 지게 하고, 피해자에게는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과정, 철학, 사법 지침을 뜻한다.


김복기 | 캐나다와 미국의 메노나이트 신학교에서 신학학사와 목회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북미에서 10년간 메노나이트 목회 후, 2013년부터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서 사역 중이다. 『트라우마의 이해와 치유』,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평화가 아이들에게 말하다』, 『정의 프로젝트』 등을 번역하였다. 현재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총무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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