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없는 무덤 앞에서
김 선 구
무덤을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시신을 안치시켜 영혼을 편히 쉬게 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죽은 이를 오래 기리려는 의미에서일까. 인간은 혼(魂)과 백(魄)의 결합체. 죽으면 혼은 육신에서 분리되어 떠나고 백은 시신과 함께 땅속에 묻힌다한다. 그렇다면 무덤은 혼백이 잠시 만나 회포를 푸는 공간일까? 시신이 없다면 영혼은 집 없는 고혼이 되어 구천을 헤매게 될까?
정몽주 선생은 백골이 진토 되고 넋은 있건 없건 관심이 없었다. 일편단심 충절만 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무덤 자체보다 살아생전 닦은 덕업이 후세에 더 귀감이 될 일이 아닐까.
봄기운이 무르익는 절기, 청명을 앞두고 있어 주위에 벚꽃들이 만발하였다. 어렸을 때만 해도 벚꽃은 보려면 진해에 가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전국이 벚꽃천국이 되었다. 봄의 전령처럼 함박웃음을 안고 나타나는 벚꽃은 반가운 손님이다. 그렇지만 금방 돌아서 버리니 말 한마디 부쳐보지 못하고 놓쳐 버리기 일쑤다. 늦기 전에 벚꽃구경 가자고 조르는 바람에 집을 나섰다.
선배 K교수 부부를 대동하여 영천호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백리에 걸쳐 벚꽃길이 펼쳐지니 한번 가 볼만한 곳이라고 들은바 있어서다. 가는 길에 먼저 임고서원에 들려 정몽주선생의 충절과 곧은 절개를 회고해 보기로 했다.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스한데 임고서원 뜰 앞 벚꽃들은 봉오리만 맺은 채 미쳐 화사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 하고 있었다. 단심가와 백로가가 주는 무게에 눌려서인지 활짝 드러내고 싶은 속내를 감추고 있는 모습이 수줍어하는 처녀처럼 다소곳하게 보였다.
이어서 영천댐으로 차를 몰았다. 영천호 주변도로는 기대처럼 벚꽃이 만발했다. 나는 운전에 여념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탄성을 지른다. 벚꽃은 나무 하나하나보다 여러 나무가 겹쳐 숲을 이룰 때 더 매혹적이다. 꾸불꾸불 커브를 돌아 갈 때면 한 줄로 배열된 벚나무들이 겹으로 보이니 거기에서 풍기는 모습이 더 장관인 모양이다. 아직 쌍계사 십리길 벚꽃경관에 비할 바 못되지만 영천호길 벚꽃경관도 다른 특색과 감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한참 가다보니 ‘강호정’이란 이정표가 보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정세아공의 학덕과 충의정신을 기려 세운 정자이다. 강호정을 비롯하여 하천재 오희당 등 한옥들이 늘어서 있다. 영천호를 조성하면서 수몰된 마을의 문화제들을 이전한 것이라 한다. 그 옆에는 ‘하절‘이라 불리는 영일정씨 문중묘역이 자리하고 있고, 여기에 시신 없는 무덤이 있었다.
잠시 차를 세우고 묘역으로 들어가 보았다. 들어서는 입구에서 부터 시작하여 노송들이 수천 평이 되는 넓은 땅을 둘러싸고 있었다. 풍광이 수려한 이곳에 어떻게 묘역을 정할 수 있었을까. 총총히 늘어서 있는 무덤들 사이를 한참 걸어 올라가니 시총(詩塚)이란 무덤 앞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했던 정의번공이 실종되어 시신을 찾지 못하자 그의 의관과 친구들이 보내온 만시(輓詩)를 관에 넣어 장사 지냈다는 시무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작은 무덤. 그 앞에 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었다.
정의번은 정세아의 아들이다. 경주성 탈환에 함께 출전했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부친이 사망한 줄 알고 노비였던 억수에게 말했다. “우리는 패했고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 같다. 나는 도적들과 싸우다가 아버지를 따라 가겠지만 너는 살아서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거라.“
억수가 답했다. “주인과 노비관계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그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소인이 어찌 홀로 살아 돌아가겠습니까?” 둘이서 적들과 싸우다가 창열하게 최후를 마쳤다. 이곳에 두 개의 무덤이 만들어지게 된 사연이다.
죽음을 뛰어넘는 두 사람의 영적교감에 관심이 모아졌다. 죽음까지 불사 할 만큼 주인을 따랐을 억수의 충심은 어디서 우러났을까? 신분을 떠나 베풀어준 인정에 대한 보답인가? 그러나 아무리 인정이 깊었다 해도 목숨가지 함께 할 만큼 컸을까? 평소 아랫사람에게 자애롭고 고상했던 덕행에 교화되는 순간이었을까? 시신 없는 무덤 앞에서니 여러 가지 상념과 의문들이 뇌리(腦裏)를 맴돌았다.
무덤들을 등지고 영천호를 내려다보았다. 검푸른 물을 가득히 채운 호수가 깊은 침묵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400여 년 전 주인과 노비사이에 있었던 감동적인 행적이 저 심연 깊은 곳에 묻혀 있어 지금껏 내려오고 있었다. 무덤 속에 시신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절제절명의 순간에 목숨을 버릴 만큼 의기투합했던 두 사람의 행적이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호수 주위는 산세가 수려하고 풍광이 뛰어나서 보는 이의 마음을 후련하게 하였다. 뒤에는 우뚝 솟은 기룡산의 위용이 수문장처럼 보이고 조화로운 산줄기가 병풍처럼 묘소전체를 감싸 안고 있었다. 길지(吉地)란 이런 곳인가. 호수에 비친 산 그림자 맑은 바람을 일으키고 길가에 활짝 피어있는 벚꽃들이 봄기운을 더욱 북돋우었다.
오늘같이 화사한 날 두 영혼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을까? 달 밝은 밤이면 이곳에 내려와서 시 낭송회라도 열지 않을까? 무덤 속의 시문들을 꺼내고, 시를 써 준 친구들을 초대하여 낭송토록 한다면 멋진 연회가 될 터인데. 시를 낭송하는 소리가 영천호의 물결위에 은파를 그리면 억수도 좋아라! 미소 짓지 않을까.
이제 인습의 굴레를 벗어버린 두 영혼은 주인도 노비도 아니다. 함께 저승과 이승을 오가니 외롭지 않겠지. 좋은 길동무가 되어있을 것이다. 시신이 없는 무덤이지만 영혼들의 휴식처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밤도 정의번과 억수가 길동무가 되어 이곳을 다녀갈지도 모른다.
혼자서 상념에 젖어 있는데 선배 교수가 한마디 건넸다. “오늘 안내자를 잘 만나서 좋은 구경을 했네.” “다음은 내가 보답 할 차례. 기회를 만들어 연락하겠네.“ 그래요. 우리도 좋은 길동무가 되어봅시다.
첫댓글 잠깐 선만보고 살아져 아쉬웠는데 다시 올려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시신 없는 무덤 뿐만아니라, 모든 것은 결코 죽은자의 유택이 아니라 산자의 필요에 따라 예의라는 요식행위를 위해 마련된 장소라는 생각을해 봅니다.
시신없는 무덤이라는 제목이 조금은 무섭게 느껴졌는데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참 인간적이고 따뜻합니다. 정의번과 억수도 길동무, 백리 벚꽃길을 함께 하신 선배교수님 부부와도 길동무... 늘 건강하셔서 행복한 나들이 하십시오 잘 읽었습니다.
임진왜란 전쟁중에 실종된 주인과 의리를 지키려고 장렬히 산화한 노비의 이야기가 감동적입니다. 정몽주 선생을 기리는 임고서원 등 영천은 충절의 고향이자 농산물의 집산지입니다. 언제 한번 시간내어 두루 구경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 기룡산 기룡사를 찾아 등산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호수 주변은 벚꽃이 장관이었습니다.
글속의 이야기가 그림이 되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천의 봄을 찾은 벚꽃길에서 길동무와 좋은 시간을 보내셨군요.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는 충성스러운 노비와 주인 아들의 인간미 넘치는 훈훈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묘였군요. 저는 제목만 보고는 장차 누군가를 모실 유택을 미리 지어 놓으셨나 했습니다.. 화사한 벚꽃숲에 내려 오신 두 영혼의 시 낭송회에서는 노비와 주인의 관계는 아니겠지요? 저 세상의 영혼들은 신분의 귀천 같은 것은 없는 모두 순수한 길동무였으면 좋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일면식도 없지만 선생님 글을 통해 어렵던 시절 이밥에 고기국 먹고 행복했던 아이처럼 제게는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좋은 글 읽게되어 감사드립니다.
정의번의 충절과 노비 억수에 대한 이야기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군요. 영원한 영혼의 다정한 길동무가 되었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가슴이 아려옵니다. 이성계의 아들 방원과 방석사이에 왕권 다툼으로 피비린내 나는 형제의 난이 있었던 반면에 정의번과 억수는 노비가 아니라의리를 뛰어넘은 분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숨을 함께할 정도로 서로를 지켜주려다 사랑의산화는 역사속에 길이남을 자료가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시신없는 무덤 꼭 찾아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