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록 : 키르케고르 사상의 중요 개념들 3
- 믿음, 개별자, 주관성, 불안과 자유 -
믿음 (faith, la foi)
키르케고르에게 믿음은 율법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영원한 것에 대한 혹은 자신의 자아의 지반이 되는 신성한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영원한 것과의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시간적인 존재에게 있어서 ‘영원한 것’으로의 ‘열림’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서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것으로, 육적인 존재가 영적인 것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외적인 (현상적인) 확실성과는 대립하는 것이며, 피상적인 믿음(율법에 대한 맹신)과 구별되는 것으로 ‘내적인 것’ 혹은 ‘심오함’ ‘내면성’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본질은 교의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믿고 따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 비록 이것이 사회적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 근본적으로 진리가 내면화되는 것에 있으며,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에 있다. 크리스천의 진리는 개념화된 체계 안에서는 결코 충분히 파악될 수 없으며 오직 진리가 삶 안에서 점진적으로 계시되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한 개인이 이 진리를 자신의 삶 안에서 살아갈 때에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그래서 진리는 지성의 편에 보다는 믿음의 편에 훨씬 더 가까이에 있다. 키르케고르는 실존의 의미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감정은 자신의 자아를 기초하는 있는 그 지반에 대한 관계성의 부재, 다시 말해 믿음의 부재에서 기인된 것이라 통찰하고 있다. 믿음은 애초에 실존으로서의 인간이 이루어야 할 ‘과업’에 대한 신뢰이자, ‘과업’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자(the individual, l’individu)
키르케고르가 말하고 있는 ‘개별자’의 의미는 오늘 날 사람들이 ‘개인’ 혹은 ‘개인주의’라고 할 때의 그 개인의 의미와는 다른 개념이다. 개인이 집단에 속하는 한 구성원을 의미한다면 개별자는 집단으로부터 분리된 ‘자기 세계를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부분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초월하는 인간은 삶과 함께 진리에 대한 앎과 더불어 성장하게 되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실존한다는 것은 ‘되어지는 것’이자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본질적으로 한 개별자의 내밀한 사정에 속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개별자가 된다는 것은 시간성을 통해 믿음의 힘으로 ‘영원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개별적인 실존을 가지는 것 혹은 개별적인 자기-세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별자를 ‘절대자 앞에선 단독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과업을 가진 실존적인 존재의 관점에서 집단(단체)을 초월하여 자기세계를 가진다는 것은 ‘보석과도 같은 것’이며, 개인이 수평적인 의미에서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자라고 한다면 개별자는 수직적인 의미에서 질적인 차이를 가진 ‘유일한 존재’를 의미한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진리라는 의미가 진정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개별자에게 있어서 이다.
주관성(subjectivity, la subjectivité)
학문이나 과학의 진리는 객관적인 진리이지만, 종교적 진리 혹은 믿음의 진리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수십 명이 동일한 이론을 발표하는 학회에서 모든 이들이 동일한 진리에 동일하게 공감을 표할 수 있겠지만, 수 십 명이 동시에 동일한 죄를 고백하거나 동시에 동일한 사랑을 고백하면서 공감을 가지거나 교감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죄나 사랑의 고백은 본질적으로 개별적인 것이며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진리란 곧 개인의 내밀한 삶과 연결된 ‘진정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진리란 무엇보다 먼저 인간과 신(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정립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에 속한다. 즉 진리란 한 개별자에 속하는 것이며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개별자인 신에 대한 실존적인 관계성을 통해서 ‘개별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다시 말해 ‘정신(spirit, l’esprit)’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성 혹은 지성은 객관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정신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영역에 속한다. 오직 정신만이 한 개인으로 하여금 신(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주관성으로서의 진리’가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학문의 진리란 객관성으로서의 진리를 말하지만 종교적 진리란 곧 주관성으로서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개별자의 개념은 한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모든 인간과 구별되는 ‘유일한 개체’, 진리와의 관계성 중에 있는 절대적인 존재의 개념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오직 주관성으로서의 진리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키르케고르의 ‘주관성으로서의 진리’개념은 확실히 이후의 실존주의자들 특히 하이데거의 ‘진정성’개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개념이다.
불안과 자유 (anxiety and liberty, l'angoisse et la liberté)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에서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불안이란 인간이 자유를 자각하는 순간에 주어지는 일종의 책임성에 대한 무게감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사람은 인생의 가장 막중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이는 영원한 구원과 저주가 좌우되는 무한한 가능성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이며, 이것이 오로지 자신의 자유에 의해 선택될 수밖에 없다는 막중한 책임성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같은 선택에 대해 어떠한 학문도, 어떤 교리도, 어떤 철학적 사상도 확신을 줄 수가 없으며, 오로지 인간은 자신의 양심과 믿음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엄청난 현기증(중압감)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불안은 일종의 양면적인 감정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 영원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의 도약이기에 한편으로는 ‘설렘의 감정’이기도 하겠지만, 나약한 인간으로서 이 같은 삶을 감당한다는 것은 또한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불안은 ‘두려움’이나 ‘공포’와는 다른 감정이다. 왜냐하면 불안은 선택의 이후에 어떠한 일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해서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막연한 것에 대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이나 공포는 어떤 특정한 대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가령 사람들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를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다가올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막연한 것에 대해서는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이처럼 ‘불안’이란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는 미지의 것, 무한한 것, 초월적인 것 등에서 가지게 되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감정이다. 키르케고르는 “만일 인간이 천사였거나 혹은 동물이었다면 전혀 불안의 감정을 몰랐을 것”이라고 하면서 ‘불안’을 알 수 있는 인간존재란 보다 심오한 것의 징표하고 말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아를 가지는 것, 영원성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 정신으로 되어지는 것,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동일한 사태의 다른 관점의 표현들이며 여기서 공통되는 것이 ‘불안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안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율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또한 “전혀 두려움이 없는 것은 진정한 신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도약한다는 차원에서 ‘불안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다른 심오한 존재 즉,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것의 분명한 징표이다. 반면 이 같은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지신을 형성하기를 외면하거나’ 혹은 ‘일상의 삶에 완전히 몰입해 버리거나’ 혹은 ‘절망 속에 빠져버리거나’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동불들 보다 훨씬 더 깊은 심연에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존재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키르케고르는 이 같은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진리로부터 돌아서는 것 즉, 신과의 관계성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 그 자체를 곧 기독교적인 ‘ '죄(sin)’의 의미라고 보고 있다. 죄의 개념은 오직 기독교와 더불어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