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인간적인 삶’에 대한 성찰
현재의 한국사회는 매우 혼란스럽다, 꼭 집어서 어느 하나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총체적으로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그래서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여기서 플라톤이라는 희랍의 철학자가 하나의 열쇠를 주고 있다고 보았고, 나름 간략히 정리 해보았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데아론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데아의 개념이 우선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도덕적인 형식으로 나타날 때이다. 이데아가 우선적으로 ‘도덕적인 형태’아래서 제시되고 있다는 진술은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또 논리적인 범주의 형태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실상 이상적인 교사나 이상적인 어머니를 묘사한다는 것(즉 이상적인 존재를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며 많은 연구와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반면에 교사가 지닌 어떤 하나의 덕, 어머니가 지닌 어떤 하나의 덕에 대해서 그 이상적인 덕의 모습을 생각한다는 것(즉 이상적인 하나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설명)은 전자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가령 이상적인 소통법이라든가, 이상적인 자녀 훈계방법에 대해서 묘사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데아’에 대한 사유는 우선적으로 도덕적인 영역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 사상 안에서 이데아(l’idée)는 동시에 ‘이상적인 것(un idéal)’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이데아의 개념이 과거에 관련되어 있는 것일 때는 이데아이겠지만, 하나의 목적처럼 미래에 관련되어 있을 때는 이상적인 것(idéal)이 된다. 그래서 플라토니즘은 항상 존재에 대한 가능성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물에 대해서는 이데아를 그리고 현실(실재, réel)에 대해서는 이상적인 것의 우위를 인정하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모든 비판적인 행위가 정당성을 가지는 것은 비판하고 있는 기준이 비판하는 대상 보다 더 나은 것 혹은 더 이상적인 것일 때뿐이다. 여기서 척도가 되는 이상적인 것의 개념으로부터 곧 가치의 개념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치란 질적인 차이를 긍정하는 것에서 주어진다. 동일한 옷을 사더라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것은 질적으로 나은 것, 즉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늘 가치 있고 이상적인 것만을 추구할 수야 없겠지만, 만일 이상적인 것, 보다 가치 있는 것을 무시하고 외면하게 된다면 어느 순간 ‘인간적인 것’은 찾아 볼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오직 생존만을 문제 삼지만, 인간은 더 나은 삶, 보다 행복한 삶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것’은 ‘비-상식적인 것’에 비해 ‘이상적인 것’이며, ‘합리적인 사유’는 ‘비-합리적인 사유’보다 ‘이상적인 것’이다. 관습이나 규범에 따른 상식적인 행위는 우악스럽게 궤변을 밀어붙이는 행위보다 이상적인 것이며, 법을 준수하는 일은 범법적인 것보다 이상적인 것이며, 투명한 소통은 야합과 비밀주의보다 더 이상적인 것이다. 패어 플레이를 통한 정당한 경쟁은 서로 속이고 속는 야만적인 투쟁보다 훨씬 이상적인 것이다. 대화와 소통을 통한 화합은 힘의 원리를 통한 대결보다는 훨씬 이상적인 것이다. 처세술이 난무하는 이기주의적 문화풍토 보다는 보편적인 도덕규범을 지키며 공동선이나 공익을 생각하는 삶의 형식이 훨씬 더 이상적인 것이다. 결국 이상적인 것을 지향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삶에 있어서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질적으로 향상된 것을 지향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의미에서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평등이란 누구나가 이 같은 질적인 향상을 추구할 수 있는 동일한 조건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누구나가 동일한 질적인 삶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롭다는 것은 보다 이상적인 삶의 조건 안에서 자신의 질적인 향상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이상적인 삶의 조건을 없애버리면서 질서를 이탈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시인은 “인간이 종교를 만들면서 신의 노예가 되었고, 국가를 만들면서 권력의 노예가 되었고, 자본주의를 만들면서 돈의 노예가 되었다”라고 노래하였다. 하지만 이 노래는 가사가 잘못 표현되었다. 보다 정확한 가사는 다음과 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지만 신의 음성을 외면하였기에 우상의 노예가 되었고, 국가를 만들었지만 국민이나 국가보다는 권력자의 시선만을 바라보았기에 권력의 노예가 되었고, 또 자본주의를 만들었지만 이를 오직 욕망의 추구로만 사용하였기에 돈의 노예가 되었다.” 노예란 무엇인가? 노예란 자유가 없고 오직 생존하기 위해 주인에게 복종하여야 하는 사람을 말한다. 노예의 삶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더 이상 보다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즉 생존이라는 하나의 가치만 남고 나머지 모든 가치의 추구가 불가능한 그러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 생존만 보장 된다면 인생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가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그러한 삶이 노예의 삶이다.
따라서 인간이기 위해서, 인간적인 삶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같이 되물어야 한다.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지. 무엇이 정당하고 올바른 것인지, 무엇이 양심적인 것인지,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 한 마디로 삶의 총체적인 국면에서 무엇이 보다 나은 것인지를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질문이 있어야 미래의 ‘보다 나은 것’ ‘보다 이상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현재의 삶은 우리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도두봉에서, 사진 찍어주는 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