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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3월,「국립국악원」부설「국악사양성소」개소 이주환(李珠煥) 선생 초대「국립국악원」원장 초대「국악사양성소」소장 이왕직아악부 3기
이어서 민족음악의 정통성을 잇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1955년도에는「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 국악중·고등학교)를 개소(開所)하고 1기생 30명을 전액 국비장학생으로 뽑기 시작하여 정악(正樂)의 맥을 잇기 시작한다. 1955년부터 1980년도 초반까지 일제시대의「이왕직아악부」출신의 선생님들에 의해 정악의 맥이 국악사양성소와 국립국악원으로고스란히 이어진다. 필자도 1963년도에 제9기로 입학하여 중, 고등 학창시절 6년간의 국비장학생으로 이왕직아악부 출신들의 노악사(老樂士)님들의 가르침을 받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소남(韶南) 이주환(李珠煥:1909∼1972)선생은 155Cm 정도의 왜소한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다부졌으며,「국립국악원」이 국가의 기관이 될 수 있도록 가장 앞장서서 노력한 국악사(國樂史)에 영원히 남으실 분이시다. 서울출생으로 1931년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를 3기로 졸업하고 이왕직 아악수(雅樂手) ·아악수장·아악사(雅樂師)를 지냈고, 광복 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장(雅樂師長)을 지냈다. 전공은 피리였으나 정가(正歌)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필자도 학창시절 1년동안 선생님 으로부터 가곡(歌曲)을 한바탕 배우면서 그분의 당차고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전공을 가르치시던 이왕직출신 선생님들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과 부설 국악사양성소(國樂士養成所) 정문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소재. 돈화문 앞. 1968년)
당시 교실 모습 - 전부 6개학급 (한학년에 한학급)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제9기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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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맨 뒤쪽에 서있는 군바리 ? 4명은 당시 육군본부 군악대에 처음으로 구군악대를 창설당시
인원이 부족하여 특별차출하여 고3. 2학기때 소년병으로 입대해서 죽도룩 빳다맞고 고생을 엄청했다다고 한다.
그 당시 국악을 해서 뭐하나 ? 배곺음 속에 아무런 희망이 없던 회색의 시절이었다....
그래도 다시 그시절로 돌아가고 파라 - -
양성소 6년중 5년간은 종로구 운니동 청사에서 공부하였고.. 고 3때 나머지 1년은 장충동 국립극장
옆에있는 청사(지금은 국립 국어연구원이 있슴)에서 공부하였다...
어려운 시절 우리 고유의 음악의 맥을 잇기위해 애쓰신 선인들이 있기에 오늘 우리들이 우리 음악을 같이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 뭉클함를 느낍니다. 비록 아마추어라도 각자의 좋아하는 음악을 주위 사람들에게 널리 공유하여 조금이나마 우리 음악의 창달에 힘써 봄이 후손으로서 도리이겠지요...
국악도 왕성했던 시절이 있었네요
요즈음은 김포시 수변공원 인근에서 점심시간에 대금을 연습하는데
국악에 대한 것을 직원들이나 지인들에게 많이 설파하고는 있으며, 많은 분들이 정간보라는 것에 대하여 신기해 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