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 장지동성당 연가(牆枝洞聖堂 戀歌) 3 - 첫 소출(所出) / 정연혁 신부
발행일 | 2021-03-07 [제3234호, 3면]
성당 부지를 구입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성모상을 모시는 일이었습니다. 모본당 지역에 거주하던 노부부 집 마당에 모셔져 있는 바뇌의 성모님이었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정중히 부탁을 했지만 사실상 강탈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 집이 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헐려야 했고, 새로 가실 곳에 성모님을 모실 형편이 되지 않았고 신앙 깊은 두 분의 심성이… 심지어 아들이 저와 거의 동년배인 사제인데 어쩌겠습니까?
새 부지 입구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정면에 성모님을 모셨습니다. 화단보다 못한 성모 동산에 신자분들이 이름 없는 꽃들을 심었고요.
부지를 보호하기 위해 얼른 담장을 두르고 측백나무를 심었습니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성지(聖枝)는 자급자족을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작년에 사용한 성지가 이 땅에서 자란 영적인 첫 소출이었던 것 같습니다. 겨우 한 해 반을 넘겨 이제 조금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 나무들에게서 여린 가지를 얻어 성지주일에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올해 재의 수요일엔 신자분들 머리에 그 재를 얹었습니다. 성지로 환영받으시며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는 우리의 성지로 환영했고, 앞으로도 늘 환영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이곳에서. 예루살렘 주민들보다 더 강한 열정으로 메시아를 환대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첫 소출이 있습니다. 가을이 되어 배추를 심었습니다. 성당 부지는 야산 정상을 평지로 만든 곳이어서 이 땅에 야채가 심겨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땅이 모르는 씨앗을 받아들이고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김장을 하기 위해 열심히 뿌린 씨앗은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루 작심을 하고 퇴비를 주었습니다. 향기가 동네를 진동했고 민원이 들어오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비가 내렸습니다. 비는 땅을 부드럽게 하고 퇴비가 잘 스며들게 하였고 냄새도 없앴습니다. 그렇게 넘어가서 배추가 조금씩 그리고 다른 지역의 배추들보다 더디고 조그맣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억세던지요. 김장 때에 소금에 절여도 배추가 밭으로 가는 듯 했습니다. 하기야 땅도 배추도 힘들었겠지요. 그 배추들은 다른 멋진 배추들과는 따로 김장독에 담겼습니다. 멋진 배추들은 맛있었고 사랑받았고 빨리 소비되었습니다. 반찬으로 만두로…. 드디어 봄이 다 지나갈 때쯤 되어서 이 땅의 소출을 꺼냈습니다. 놀랍게도 너무나 아삭하고 맛이 있는 김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성당의 첫 소출들은 이렇게 작지만 의미 있고, 그때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 성당도 측백나무처럼 배추처럼 아직 부족하고 정교하지 못하지만, 우리 신자분들이 하느님 도움으로 이 두 첫 소출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운다면 천천히 감동을 주는 공동체로 성장하리라 늘 믿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정연혁 신부(제2대리구 장지동본당 주임)
첫댓글 넘치는곳보다 부족한곳에 더 사랑이 넘치는것,그곳에 주님의 사랑이 꽃피울 수 있고 깊어지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