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정말 끔찍한 사형틀이라고 한다.
머리만 잘라 고통없이 한 방에 죽이면 더 좋으련만, 사람 몸에 못을 박고 매달아 놓아 고통을 극대화시켰다. 십자가에 매달아 놓으면 못에 박힌 손과 발의 고통 외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이 보고 되어 있다. 십자가의 형틀이 잔인한 것은 고통 속에서도 오랫동안 죽지 않게 해 놓았다는 점이다.
생각할수록 십자가의 형틀은 소름끼친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일 때문에 그런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바로 나 때문에 달리셨다고. 그렇다면 내 죄의 끔찍함은 이것으로 증명되지 않았는가? 내 죄에 해당되는 판결은 '사형'이며, 그것도 참수형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릴 죄라는 것이다. 나는 죄인이며, 바로 십자가에 달릴 죄목을 갖고 있다. 용서가 될 수 없는 죄인. 예수님 주변 십자가에 달려 있던 강도들의 죄목과 나의 죄목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살았다. 예수님으로 인해.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그 분이 대신 달리셨으니 그런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나 대신 죽겠다고 하는 이가 어디에 있는가? 더구나 나는 용서받을 수 없을 죄인으로 그 죄가 너무나 끔찍할 뿐만 아니라 정말 티끌만도 못한 존재이기에 그 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에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나는 삶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특별한' 존재로 영광도 누리게 된다. 사형수가 졸지에 왕자의 신분으로 바뀌는 것과 다름이 없다.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다고 해서 내 과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과거 신분'은 죄인이며, 사형수이다. 교도소에서 살다나온 사람들에게 우리는 '전과자'라는 말을 붙이듯이, 나의 신분도 바로 '전과자'이다. 이것이 바로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분명한 정체성을 갖는다. 바로 십자가에 달릴만한 죄를 지은 '전과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으니 나는 얼마나 끔찍한 사람이더냐.
매일 용서를 받고 살아가는 나같은 존재가 어떻게 교만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잘났다고 할 수 있는가? 내 몸과 내 영혼과 내 생각에는 이미 '죄인'이라는 낙인이 영원히 지을 수 없는 상태로 찍혀 있다. 나는 이 낙인을 보면서 오늘도 살아남에 감격해 하며,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안다.
나는 매일 감격함과 수치스러움을 동시에 갖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구원받은 감격함은 오늘의 삶이 힘들더라도 절망하지 않게 하고, 죄인이었다는 수치스러움은 내가 지금 남보다 더 낫다거나 우쭐함에서 오는 교만함을 꺾게 한다.
첫댓글 선교중앙교회서 찍어드린 사진과 아이노스합창단
(십자가 위에 주님)
잘어울리는것같아 편집합니다ㅡ
전과자 맞습니다,전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