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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사라진 향군 혁신의 꿈-박상영
이 글은 박상영 동기가 전역 후 예비역들의 ‘친목·애국·명예’ 단체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에 종사할 기회를 얻어, 보통 3년 이내 근속에 그치는데 유독 10년이나 요직에 봉직하면서, 향군의 조직, 회관, 회장선거, 수익사업, 안보활동 부문 등에서의 혁신을 기하고자 노력했던 시절의 회고입니다.
전역 이후지만, 애국과 안보를 목적으로 한 충정의 이야기여서, 대열임관50주년 기념책자 (가칭: 대열 반세기 여정)에 편성할 동기생 현역시절 국가적 국방이슈와 관련한 역할과 공헌의 회고 속에 함께 수록하고자 올립니다.
여기에는 향군으로 안내해준 홍갑식 동기, 향군에서 함께한 노행환, 김규. 임창희, 김용석 동기의 이야기도 포함돼 있어 대열 공통의 회고로 반갑게 맞이했으며, 지난 7월1일 글에선향군혁신 주장에 중점을 두었던 것을, 향군 복무 시 노력했던 혁신방향과 함께 한 동기생들 이야기 중심으로 방향을 수정해 다시 올린 글이기도 합니다. 이런 노력에 유의해 일독해 주시면 감사할 것입니다. -주(註) 편집위원 김명수-
♣ 사라진 향군(鄕軍) 혁신(革新)의 꿈
박상영
★ 재향군인회에서 퇴역 후 10년을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이하 ‘향군’으로 표기)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2월 1일 창설되어 1963년 7월 19일 법률 제1207호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법”에 의해 법적 법인이 된 ‘친목·애국·명예’단체로, “재향군인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회원의 권익을 향상시키며, 국가발전과 사회공익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재향군인회법 제5조에 의해 모든 퇴역군인 출신과 예비역 및 보충역 그리고 제2국민역으로 대한민국 국군에 소집되어 병역을 마친 사람은 자동적으로 향군회원이 되어 숫자상으로는 1000만 여명에 달한다.
나는 2000년 10월부터 10년간 향군에 종사하면서 나름대로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를 혁신해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고백하면서 내가 체험한 바를 토대로 소회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 향군 혁신을 위한 노력들
1. ‘700만 향군회원’과 지방조직에 대한 전수조사 시행
내가 향군 조직부장으로 부임한 2000년 10월 당시에는 ‘향군회원 700만명 시대’였다. 나는 이러한 거대한 조직을 장악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향군에 대한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향군에서는 잠재적인 회원 중에서 본인이 직접 소정의 입회비(영관장교 5만원)를 납부하고 회원에 가입한 회원을 정회원(正會員)이라고 부른다. 우리 동기생의 경우를 예를 들면 잠재적인 향군회원은 200여명이 넘지만 막상 향군의 정회원으로 가입한 회원은 몇 명에 불과하다.
나는 2001년 10월 향군회원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국내 굴지의 카드회사와 협조하여 향군회원증을 해당 카드사의 신용카드로 발급하도록 하였다.
당시 향군에 보관되어 있는 향군 정회원 명단에는 약 100만 여명의 전화번호가 있어 카드사에서 20여명을 지원받아 20일 동안 일일이 전화를 걸어 전수조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번호변경, 연락두절 등으로 참으로 절망적인 결과로 나타나 향군에서 자랑하는 700만 회원의 실체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향군의 조직은 전국의 행정단위와 괘를 같이하여 13개 시·도(市·道)회와 222개의 시·군·구(市·郡·區)회, 3247개의 읍·면·동(邑·面·洞)회 그리고 13개국에 22개의 해외지회로 구성되어 있다. 시·도(市·道)회에는 회장과 사무처장, 4-5명의 부장, 시·군·구(市·郡·區)회에는 회장과 사무국장, 여직원을 두어 회무(會務)를 처리하고, 읍·면·동(邑·面·洞)회에는 회장은 있으나 회무를 처리할 인원이나 사무실은 없는 상태이다. 나는 직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틈만 있으면 전국을 순회하면서 울릉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의 모든 시·군·구(市·郡·區)회 단위까지 조직의 실태를 파악하였다. 향군에서는 읍·면·동(邑·面·洞)회를 조직의 기본단위로 하고 있으나 운용비용이나 활동공간 확보가 불가능한 읍·면·동(邑·面·洞)회 보다는 시·군·구(市·郡·區)회를 기본단위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그래도 시·군·구(市·郡·區)회 이상에서는 지자체의 도움을 받아 향군회관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규모는 상이하겠지만 회관의 임대료나 회비수익 등을 통해 향군본부의 지원에서 벗어나 자생력을 갖춰 독립채산제 운영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 2월 나는 감사실장으로 보직을 바꾸어 1년에 거의 절반을 지방조직 및 수익사업체에 대한 업무감사와 회계감사에 전념하였다.
향군의 소요예산은 크게 본부운영비, 지방조직운영보조비, 안보활동비 등으로 구분되는데, 매년 말에 차기연도 소요예산을 판단하여 산하업체들에게 소위 ‘보훈성금’이라는 명목으로 할당하여 납부하도록 독려하고 있는데, 각 산하업체에서 연간 벌어들이는 이익금보다 초과하여 납부하도록 요구함으로써 기업체의 대부분이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다가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기업체마다 부채비율 또한 상당히 높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따라서 나는 향군은 친목단체이기 때문에 방만한 예산편성보다는 수익사업체에서 벌어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예산을 편성하여 기업체들로 하여금 ‘보훈성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하였으나, 크게 시정되지는 못했음을 자백한다.
2. 향군회관 재건축사업을 착상하다.
나는 2003년 4월 행정관리실장으로 보직되어 향군 전체의 인사업무와 예산집행, 각종 행사주관 등 안살림을 맡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나는 당연히 동기생 일자리 창출을 염두에 두다가 경기도 사무처장 공석이 발생하여 노행환을 발탁하였고, 중간에 경기도회와 궁합이 맡지 않는다고 하여 본회 조직부장으로 끌어 들였다. 노행환과 나는 이렇게 제2 제3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잠실 향군회관 12층 건물에서 근무하던 나는 회관을 관리하는 주무참모 자격으로 잠실에 있는 건물들이 하나 둘 재건축과정을 거쳐 새로운 고층건물로 탈바꿈하고 있음을 보면서 “향군회관 재건축”을 착상하였다. 나름대로 전역직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애서 ‘건설최고경영자과정(APMP)’에서 쌓은 인맥을 동원하여 검토한 결과 재건축사업이 순기능적으로 진행된다면, 향군의 모든 부채를 청산하고 상당액의 여유자금까지 마련할 수 있겠다는 조언을 받아, 용기를 내어 건의한 결과 2004년 12월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승인을 받았다.
2005년부터 나는 회관재건축사업 추진의 중심축이 되어 모든 역량을 집중하였다. 2010년에는 입주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사업명칭을 “2010프로젝트”라고 명명하고, 공군부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2010사업추진위원회’와 추진업무를 집행할 수 있도록 “2010사업단”을 구성·운영하였다.
2005년 가을 나는 공개입찰방식에 의한 설계업체를 선정하였다. 원래 이처럼 큰 프로젝트에는 각종 유혹과 억측이 난무하게 마련이지만 나는 한점 부끄럼 없이 공정하게 국내 최고의 설계업체를 선정하였다고 자부한다.
2006년 4월 나는 보직이 바뀌어 2010사업에서 멀어졌지만, 그 이후의 사업추진은 시공사 선정하는 과정에서 업치락뒤치락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완공된 후에도 잠실향군회관에 주인은 입주도 못한 채 양재동에 들어있는 것을 보면서 “향군의 모든 부채를 청산하고 상당액의 여유자금을 조성하여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친목·애국·명예단체’로 만들어 보겠다”는 나의 소박한 꿈은 일장춘몽으로 돌아가 한없는 허탈감을 느낀다.
◈ ‘6·25전쟁 기념행사’의 주관
향군은 매년 6월 25일에는 정부의 위임을 받아 ‘6·25전쟁 기념행사’를 주관한다. 6·25전쟁 참전국의 참전용사들을 포함하여 수천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이다. 대통령이 참석하기 때문에 TV를 통하여 전국에 생중계되는데, 2005년에는 노무현 대통령께서 임석하셨다. 나는 이 행사의 사회자로서 행사를 진행하면서 약간 긴장도 되었지만 육사 인사행정처장 시절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3. 회장선거와 주요직위 독점관행 타파노력
향군은 원래 정부에서 회장을 임명하는 제도였으나, 제28대 회장 때부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궤를 같이하여 각급 회장을 소정의 선거인단 선거를 통해 선출하도록 전환하였다. 각급 회장은 임기를 3년으로 제한하고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 때만 되면 금권선거 논란이 불거져 나오곤 한다. 향군의 총수인 본부회장(통상 본회장이라 칭함)을 선출하는 선거인단은 본회의 이사진, 예하 사업체장, 친목단체장, 그리고 시·도 및 시·군·구 회장으로 구성되는데, 선거인단의 표심을 얻기 위해 후보자들이 경쟁적으로 전국을 돌면서 선거운동을 하기 때문에 간간이 금품을 살포하는 사건이 발생되어 말썽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향군본부 참모조직의 부서장과 산하 기업체의 전무급 이상 간부의 임기는 본회장의 임기와 궤를 같이한다. 즉 본회장이 바뀌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모두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통상이다.
그러한 관행 때문에 본회 회장에 출마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과거의 인맥을 동원하여 선거운동을 하기 마련인데, 이 선거조직은 당선 후에도 그 공로에 따라 참모직위나 산하업체의 주요직위에 보직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는 2006년 4월 회장선거 후 인사참모로서 선거조직의 요직 독점현상을 타파해야한다는 명분으로 공채의 절차를 거쳐 주요직위 충원을 시도하였으나 동기생 김규를 군별 균형보직이라는 명분으로 안보국장으로 보직시킨 것 외에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대부분의 주요직위는 역시 선거조직에 의해 거의 절반 이상이 독식되었다.
수익사업을 담당하는 산하기업체장이나 간부들도 사전 내정 상태에서 요식행위를 거치는 경우가 허다하고, 심지어는 사전에 매관매직한다는 유언비어까지 난무하고 있으니 반드시 개혁과 혁신을 통해 바른길로 가길 소망한다.
4. 시대상황에 부합하는 안보활동 전개
향군은 '대한민국 최고·최대 안보단체'라는 슬로건을 설정하고 국민을 대상으로 안보의식을 계도하고 국가의 안보정책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선 범국민적 안보활동은 통상 정부의 대북정책이 지나치게 좌편향적이거나 한미동맹을 와해시킬 우려가 있을 경우 주로 광화문광장에 향군회원들을 소집하여 반대집회를 개최하였으며, 대국민 안보계도교육은 예비역 영관급 장교들을 선발하여 사전교육을 통해 안보 전문교수로 양성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계도교육을 시행하였다.
나는 2006년 4월 향군에서 남달리 6년을 근무했기 때문에 은퇴할 생각이었으나, 박세직 회장께서 향군에 ‘안보복지대학을 설립하여 명실상부한 안보교육의 도장을 만들어 보라’는 특수임무를 부여받아 교육운영본부장에 보직되었다.
생소한 업무라서 조금 망설여지긴 하였으나, 나는 1단계로 ‘향군평생교육원’을 설립하기 위하여 교육부와 면밀히 협조하여 인가를 받아 예비역 장교들을 대상으로 안보전문교수와 사회복지관련 자격증을 부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다. 그리고 교육부로부터 ‘안보복지대학’을 위한 교육시설은 많은 경비가 소요되므로 ‘대학원대학교’ 형태의 교육기관을 만드는 좋겠다는 조언을 받았다.
◈ “6·25전쟁 바로 알리기 캠페인”을 추억한다.
‘향군안보복지대학원대학교’ 창설을 준비 중이던 나는 2008년부터 “6·25전쟁 바로 알리기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당시 중앙일보 등 언론보도에 의하면 일부 선생님들의 그릇된 교육의 영향으로 초등학생들은 물론 사법고시에 합격한 젊은 세대, 심지어는 군의 장교가 된 초급간부들의 30-40% 정도가 “6·25전쟁을 북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지면을 장식하였다.
대국민 안보계도교육을 사명으로 내세우는 향군의 입장에서 보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노릇이었다. 나는 1개월 정도 숙고한 끝에 “6·25전쟁 바로 알리기” 소형 만화를 제작하여 전국의 초등학생 전원(당시 교육부에 등록된 초등학생 수는 대략 650만여 명이었음)에게 배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향군에서 지원해 줄 예산은 한 푼도 없었기 때문에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만화제작에 필요한 예산 전액을 모금하는 방식으로 조달하도록 하였다.
당시 경북대학교를 갖 졸업한 아마추어 만화작가를 섭외하여 6·25전쟁 전문작가의 원고를 바탕으로 만화초안을 작성하였다. 여러 번의 전문가들 감수를 거쳐 54쪽 분량의 소형만화가 완성되어 출판사들을 상대로 최저가입찰방식에 의한 공개입찰을 통해 650만부를 제작하였다. 제작과 분배에 소요되는 비용은 최소 12억 원에서 15억 원 정도로 산출되었다. 모금방식은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6.25전쟁을 바로 알리기 위한 책자(만화) 보내기 캠페인’을 전개하여 ‘후원자’ 명의로 모교 학생들에게 배포하기로 하였다. ‘모금운동’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향군의 거대한 조직을 총동원하였고, 종교단체들을 활용해 보려고 기독교총연합회 각 종파와 구단 회장들을 장충동 소피텔 호텔에 조찬기도회를 개최해 보기도 하였지만 비용대 효과면에서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물론, 모금액수는 후원자들의 재량에 맡겼기 때문에 소액(1구좌 5만원)으로부터 다양하였으나 국가안보에 관심이 많은 R그룹의 S회장님께서는 10만구좌(5억원)를 지원해 주셔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물론 마침 내가 대대장 시절에 정보장교로 재직했던 옛 부하가 회장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긍정적으로 말씀드려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모금된 성금은 대략 12억 5,000만원 정도였다.
내가 이런 캠페인을 전개하자 소위 좌파계열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당시 SBS의 ‘아침마당’을 진행하던 S모 앵커는 새벽같이 전화를 걸어 무려 10여 분간이나 인터뷰를 하였고, 좌파성향의 정당들은 물론 전교조까지도 나를 잡으려고 난리법석을 떨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생각하면 ‘13억원 모금’ 참으로 무모하면서도 용감하고 절실한 도전이 아니었나 생각되어 소름이 끼친다.
5. 에필로그
나는 향군에서 남들은 3년이 고작인 것을 10여 년간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공명정대한 사관생도 도덕률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되며, 2006년에 ‘1급’으로 진급도 해보았고, 2008년에 ‘교육문화사업본부’를 설립하여 본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출판사를 만들어 유병헌 장군님의 ‘한미동맹’관련 책자, 김준봉 선배님의 ‘대통령자질론’, 전세한 교수님의 ‘청년들을 위한 리더십’ 관련 책자 등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도 커다란 추억으로 남는다.
지난 10년 2개월 15일 동안 30여년 군 생활만큼이나 열과 성을 바친 제2의 군 생활이라 할 수 있는 향군생활도 2010년 12월 31일 마감하였다.
향군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지면을 고려하여 이 정도로 줄임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글을 끝내면서 나를 향군으로 안내해 준 홍갑식 동기에게 감사하며, 마지막 무렵 짧은 기간이었지만 임창희동기와 김용석동기가 같이 해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지난 6월 소천한, 내가 사랑했던 영원한 전우 노행환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
※ 참고사항 : 향군상조회 보람상조에 매각소식
2005년경에 수익사업을 다각화하기 위해 설립된 향군상조회는 주로 향군회원들을 대상으로 회원을 유치하여 그동안 다소의 잡음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둬 선수금 규모가 3000억 원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조회는 회원들의 동의절차도 없이 보람상조회에 매각되었고, 이 과정에서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라임사태의 김모 회장과 상조회 간부 2명이 횡령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2021.7.1.작성
2021.7.14. 수정보완
박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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