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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계량(沈季良)
[문과] 숙종(肅宗) 9년(1683) 계해(癸亥)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6위(16/35)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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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직부(直夫)
생년 기해(己亥) 1659년 (효종 10)
졸년 무술(戊戌) 1718년 (숙종 44)
향년 60세
합격연령 25세
본인본관 청송(靑松)
거주지 한성([京])【補】(주1)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관인정보]
제수년월 1693 [계유(癸酉) 10월 13일] 응교(應敎) 래(來: 부임되어 옴)
[출전]
『은대선생안(銀臺先生案)』(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9727])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관인정보]
부임년월 1686 [병인(丙寅) 6월 30일] 도목정(都目政) 이봉상직장(以奉常直長) 래(來: 부임되어 옴)
교체년월 1686 [병인(丙寅) 9월 초1일] 정(政) 검열(檢閱) 거(去: 부임되어 감)
1686 [병인(丙寅) 10월 11일] 정(政) 중래(重來: 다시 부임되어 옴), 10월 21일(十月二十一日) 정(政) 검열(檢閱) 거(去: 부임되어 감)
[출전]
『당후선생안(堂后先生案)』(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9733])
[관련정보]
[진사] 숙종(肅宗) 5년(1679) 기미(己未)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8위(48/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5명 [甲3‧乙7‧丙25]
전력 통덕랑(通德郞)
관직 한림(翰林)
관직 홍문관리(弘文館吏)
관직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문과시제 잠(箴):경덕기명(敬德祈命)
타과 숙종(肅宗) 5년(1679) 기미(己未)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18위
기타 인현폐위도감초관채이장솔군교장상장계량무이발병이장피형 갑술계량이차찬(仁顯廢位都監哨官蔡以章率軍校將上章季良誣以發兵以章被刑甲戌季良以此竄)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補】(주2)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심재(沈梓)[文]
품계 : 가의대부(嘉義大夫)
관직 : 행승정원도승지(行承政院都承旨)
겸직 : 겸 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
겸직 :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
겸직 :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겸직 : 상서원정(尙瑞院正)【補】(주3)
[조부(祖父)]
성명 : 심유행(沈儒行)[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심창(沈昶)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상건(李象乾)[進]
본관 : 광주(廣州)【補】
[처부(妻父)]
성명 : 정도원(丁道元)[進]
본관 : 나주(羅州)【補】
[안항(鴈行)]
형(兄) : 심최량(沈最良)[文]
형(兄) : 심중량(沈仲良)[文](주4)
[가족과거]
자(子) : 심주관(沈周觀)[文]
[주 1] 거주지 : 『계해증광별시문무과방목(癸亥增廣別試文武科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234])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2] 구존 : 『계해증광별시문무과방목(癸亥增廣別試文武科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234])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모 구존을 추가.
[주 3] 부관직 : 『계해증광별시문무과방목(癸亥增廣別試文武科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234])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 관직을 추가.
[주 4] 안항 : 『계해증광별시문무과방목(癸亥增廣別試文武科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234])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심재(沈梓)
[문과] 효종(孝宗) 5년(165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위(13/34)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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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문숙(文叔)
생년 갑자(甲子) 1624년 (인조 2)
졸년 계유(癸酉)【補】(주1) 1693년 (숙종 19)
향년 70세
합격연령 31세
본인본관 청송(靑松)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이조판서, 좌참찬,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문숙(文叔), 호는 양졸재(養拙齋). 심창수(沈昌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창(沈昶)이고, 아버지는 심유행(沈儒行)이다. 어머니는 권씨(權氏)이다.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을 지냈다.
1663년(현종 4)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교리(校理)를 거쳐 승지·경기관찰사·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77년(숙종 3) 사은 겸 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대사간·경기관찰사·도승지·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남인의 과격파로, 1689년 기사환국 때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남인이 쫓겨난 경신옥사의 원통함을 말하였다. 그리고 세자(뒤의 경종) 책봉을 반대한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 등을 강력히 탄핵, 유배시켰다.
그 해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1693년 판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죽은 이듬해 갑술옥사가 일어나 관직이 추탈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심재(沈梓))]
[진사] 인조(仁祖) 26년(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9위(24/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4명 [甲3‧乙7‧丙24]
전력 통덕랑(通德郞)
관직 이조판서(吏曹判書)
관직 한림(翰林)
문과시제 책문(策問):지자만사지근저(志者萬事之根柢)
타과 인조(仁祖) 26년(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19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심유행(沈儒行)[文]
[조부(祖父)]
성명 : 심창(沈昶)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심희수(沈喜壽)[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권담(權紞)(주3)
본관 : 안동(安東)【補】
[처부(妻父)]
성명 : 이상건(李象乾)[進]
본관 : 광주(廣州)【補】
[가족과거]
자(子) : 심최량(沈最良)[文]
손(孫) : 심주관(沈周觀)[文]
[주 1] 졸년 :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1713, 국립중앙도서관[古2518-43-14])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 거주지 : 『무자식년사마방목(戊子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223])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 외조부 :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1713, 국립중앙도서관[古2518-43-14])를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十一(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심유행(沈儒行)
[문과] 인조(仁祖) 24년(1646) 병술(丙戌) 정시(庭試) 병과(丙科) 1위(04/07)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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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여수(汝修)
생년 병오(丙午) 1606년 (선조 39)
졸년 경자(庚子)【補】(주1) 1660년 (현종 1)
향년 55세
합격연령 41세
본인본관 청송(靑松)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07명 [甲1‧乙2‧丙4]
전력 참봉(參奉)
관직 교리(校理)
문과시제 부(賦):민유수(民猶水)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심창(沈昶)
[조부(祖父)]
성명 : 심희수(沈喜壽)[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심건(沈鍵)[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명현(金命賢)[進]
본관 : 풍산(豊山)【補】
[처부(妻父)]
성명 : 권담(權紞)(주2)
본관 : 안동(安東)【補】
[안항(鴈行)]
형(兄) : 심유훈(沈儒訓)【補】
서제(庶弟) : 심유업(沈儒業)【補】(주3)
[가족과거]
자(子) : 심재(沈梓)[文]
손(孫) : 심중량(沈仲良)[文]
[주 1] 졸년 :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1713, 국립중앙도서관[古2518-43-14])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 처부 :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1713, 국립중앙도서관[古2518-43-14])를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주 3] 안항 :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1713, 국립중앙도서관[古2518-43-14])를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十(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심희수(沈喜壽)
[문과] 선조(宣祖) 5년(1572) 임신(壬申) 별시2(別試2) 병과(丙科) 4위(09/2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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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백구(伯懼)
호(號) 일송(一松)
시호(諡號) 문정(文貞)
생년 무신(戊申) 1548년 (명종 3)
졸년 임술(壬戌) 1622년 (광해군 14)
향년 75세
합격연령 25세
본인본관 청송(靑松)
거주지 한성([京])【補】(주1)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대제학, 우찬성,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혹은 수뢰루인(水雷累人).
장령(掌令) 심순문(沈順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동녕부사 심봉원(沈夆源)이고, 아버지는 정자(正字) 심건(沈鍵)이다. 어머니는 이연경(李延慶)의 딸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이다.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다.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89년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했으나, 조정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했다. 이듬해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591년에는 응교로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이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다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司成)으로 전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때마침 명나라 조사(詔使)가 오자 다시 도승지가 되어 응접했는데, 이는 중국어를 잘했기 때문이다. 이 해 겨울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접반사(接伴使)로서 오래도록 서도(西道)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 구제(飢民救濟)에 진력하였다.
1599년 예문관제학·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였다. 안으로는 사명(辭命:왕명의 전달)을 장악하고 밖으로는 외국 사신의 접대에 힘썼다.
좌찬성·우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606년 성균관에서 익명의 투서가 나왔는데, 선조가 이를 색출하기 위해 유생들의 심문을 고집하자 그 불가함을 말해 뜻을 관철시켰으며, 그 해 가을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하려 하자, 예전(禮典)에 어긋남을 강력하게 표하여 논의를 중지시켰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재상에 올랐다. 그러나 권신 이이첨(李爾瞻)등이 국정을 장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극형에 처하려 하자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 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이 죽고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 하자,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과 강력하게 그 부당성을 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 영창대군의 처형은 인륜에 어긋나며,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산 정온(鄭蘊)을 적극 변호하여 귀양에 그치게 하였다.
1615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野史)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었다.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둔지산(屯之山)에 은거하여 『주역』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 『일송집』이 있다.
상주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심희수(沈喜壽))]
[진사] 선조(宣祖) 1년(1568)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48위(78/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20명 [甲1‧乙4‧丙15]
전력 진사(進士)
관직 문형(文衡)
관직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문과시제 표(表):의송사마광청진인명무지도(擬宋司馬光請盡仁明武之道)
타과 선조(宣祖) 1년(1568)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三等) 48위
기타 염근(廉謹)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補】(주2)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심건(沈鍵)[文]
품계 : 승의랑(承議郞)
관직 : 행승문원정자(行承文院正字)【補】(주3)
[조부(祖父)]
성명 : 심봉원(沈逢源)[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심순문(沈順門)[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연경(李延慶)[文]
본관 : 광주(廣州)【補】
[처부(妻父)]
성명 : 노극신(盧克愼)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제(弟) : 심창수(沈昌壽)【補】(주4)
[주 1] 거주지 : 『융경6년임신12월초2일문무과별시[방목](隆慶六年壬申十二月初二日文武科別試[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TK 2291.7 1746(1564a)])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2] 구존 : 『융경6년임신12월초2일문무과별시[방목](隆慶六年壬申十二月初二日文武科別試[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TK 2291.7 1746(1564a)])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모 구존을 추가.
[주 3] 부관직 : 『융경6년임신12월초2일문무과별시[방목](隆慶六年壬申十二月初二日文武科別試[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TK 2291.7 1746(1564a)])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 관직을 추가.
[주 4] 안항 : 『융경6년임신12월초2일문무과별시[방목](隆慶六年壬申十二月初二日文武科別試[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TK 2291.7 1746(1564a)])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심건(沈鍵)
[문과] 명종(明宗) 3년(1548) 무신(戊申) 별시(別試) 병과(丙科) 15위(19/22)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2ECAC74FFFFB1519X0
자(字) 중계(重啓)
생년 기묘(己卯) 1519년 (중종 14)
졸년 경술(庚戌)【補】(주1) 1550년 (명종 5)
향년 32세
합격연령 30세
본인본관 청송(靑松)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승문원정자,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계(重啓). 내자판관 심원(沈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령(掌令) 심순문(沈順門)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심봉원(沈逢源)이며, 어머니는 김현조(金顯祖)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친구 윤개(尹漑)의 사랑을 받아, 윤개의 가숙(家塾)에서 배우며 자식처럼 자랐다.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48년(명종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1550년 충청도 지방에 어사로 나갔다가 병을 얻어 공주의 관사에서 죽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심건(沈鍵))]
[진사] 중종(中宗) 38년(154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3위(53/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22명 [甲1‧乙3‧丙18]
전력 진사(進士)
관직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타과 중종(中宗) 38년(154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23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심봉원(沈逢源)[文]
[조부(祖父)]
성명 : 심순문(沈順門)[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심원(沈湲)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현조(金顯祖)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이연경(李延慶)[文]
본관 : 광주(廣州)【補】
[가족과거]
자(子) : 심희수(沈喜壽)[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가정22년계묘8월24일생원진사시방목(嘉靖二十二年癸卯八月二十四日生員進士試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183])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七(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심봉원(沈逢源)
[문과] 중종(中宗) 32년(1537) 정유(丁酉) 별시(別試) 을과(乙科) 2[探花]위(03/09)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2ECBD09C6D0B1497X0
자(字) 희용(希容)
호(號) 우송(友松)
생년 정사(丁巳) 1497년 (연산군 3)
졸년 갑술(甲戌)【補】(주1) 1574년 (선조 7)
향년 78세
합격연령 41세
본인본관 청송(靑松)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장령, 교리, 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희용(希容), 호는 효창노인(曉窓老人)·우송(友松).
영의정 심회(沈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원(沈湲)이고, 아버지는 사인(舍人) 심순문(沈順門)이다.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 감찰 신영석(申永錫)의 딸이다. 영의정 심연원(沈連源)과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의 동생이다.
어려서는 악동들과 어울려 놀기를 즐겼으나,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공부에 힘써 20세에 성균관에서 학문을 익혔다.
1537년(중종 3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어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겸하였다. 이듬해 탁영시(擢英試)에 병과로 발탁되어 사과(司果)에 제수되었다.
그 뒤 정언(正言)을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헌납(獻納)이 되어 경연에서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처단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진언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의 편에 서서 대윤(大尹)의 거두인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탄핵, 숙청하였다.
이어서 장령(掌令)·교리(校理)·사간·사예(司藝)·전한(典翰)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53년(명종 8) 승정원에 들어가 왕의 측근에서 오랫동안 보필하였다.
그 뒤 예조참의·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다가 노환으로 사임하였다.
음률(音律)·의술(醫術)·서법(書法)에도 밝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심봉원(沈逢源))]
[문과] 중종(中宗) 33년(1538) 무술(戊戌) 탁영시(擢英試) 병과(丙科) 3위(06/12)
[생원]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6위(56/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09명 [甲1‧乙3‧丙5]
전력 교관(敎官)
관직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관직 직제학(直提學)
문과시제 책문(策問)
타과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26위
본인문과 중종(中宗) 33년(1538) 무술(戊戌) 탁영시(擢英試) 문과(文科) 병과(丙科) 3위
기타 연벽(聯璧[兄弟同榜]):弟 沈通源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심순문(沈順門)[文]
[조부(祖父)]
성명 : 심원(沈湲)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심회(沈澮)
[외조부(外祖父)]
성명 : 신영석(申永錫)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김현조(金顯祖)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형(兄) : 심연원(沈連源)[文]
형(兄) : 심달원(沈達源)[文]
제(弟) : 심통원(沈通源)[文]
[가족과거]
자(子) : 심건(沈鍵)[文]
손(孫) : 심희수(沈喜壽)[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정덕11년병자식생원진사방(正德十一年丙子式生員進士榜)』(개인)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심순문(沈順門)
[문과] 연산(燕山) 1년(149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5위(08/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2ECC21CBB38B1465X0
자(字) 경지(敬之)
생년 을유(乙酉) 1465년 (세조 11)
졸년 갑자(甲子)【補】(주1) 1504년 (연산군 10)
향년 40세
합격연령 31세
본인본관 청송(靑松)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성균관전적, 병조정랑,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경지(敬之). 영의정 심온(沈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송부원군 심회(沈澮)이고, 아버지는 내자판관 심원(沈湲)이다. 어머니는 부사정(副司正) 이의구(李義坵)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沈連源)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학업에 뜻을 두지 않고 방황하였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여 엄히 훈계하고 교육하니, 마침내 깨달은 바가 있어 열심히 학문을 닦게 되었다.
1486년(성종 1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5년(연산군 1) 증광시(增廣試)에서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다. 이어서 박사에 승진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성균관전적·감찰이 되고, 이 해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어서 부수찬(副修撰)·정언(正言)·부교리(副校理)·지평(持平)을 거쳐, 1503년 장령(掌令)에 올랐으며, 이어 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이 때 국왕 의복의 장단을 지적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사고, 이듬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개령현(開寧縣)에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직언을 잘하여 연산군의 폐정을 자주 지적하였다. 중종 때에 복관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심순문(沈順門))]
[진사]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甲3‧乙7‧丙23]
전력 진사(進士)
관직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관직 교리(校理)
문과시제 책문(策問):인재(人才)
타과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심원(沈湲)
[조부(祖父)]
성명 : 심회(沈澮)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심온(沈溫)[麗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의구(李義坵)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신영석(申永錫)
본관 : 미상(未詳)
[가족과거]
자(子) : 심연원(沈連源)[文]
자(子) : 심달원(沈達源)[文]
자(子) : 심봉원(沈逢源)[文]
자(子) : 심통원(沈通源)[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五(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심회(沈澮)
출생일 1418년(태종 18)
사망일 1493년(성종 24)
조선전기 경기도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청보(淸甫).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 심용(沈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심덕부(沈德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심온(沈溫)이다. 어머니는 영동녕부사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아버지 심온은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1418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태종을 비난한 사건에 관련되어 의주에서 체포, 사사되었다. 이 때문에 등용되지 못하다가 세종 말년에 아버지가 신원되자, 문종이 즉위한 뒤 음직으로 돈녕부주부에 등용되었다.
이어 동지돈녕부사를 거쳐, 1454년(단종 2) 첨지중추원사·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고, 1457년(세조 3) 지충추원사(知中樞院事)·공조판서를 지냈다.
1458년 중추원부사·판한성부사를 거쳐, 1459년 안주선위사(安州宣慰使)를 겸하고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1461년 영중추원사·형조판서를 거쳐, 1463년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1466년 좌의정이 되었다.이듬해 영의정이 되고,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봉되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졌다.
1471년(성종 2)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에 참여하였다.1473년 진충협보(盡忠夾輔:임금을 잘 보좌하고, 정치를 잘함)의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고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성종의 신임을 받아 국가의 대소 정사에 참여했고, 1491년(성종 22)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모친인 윤비(尹妃)의 폐출 사건에 동조했다는 죄로 관직이 추탈되고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심회(沈澮))]
첫댓글 안변부사(安邊府使) 강세윤(姜世胤)은 이예의 처부로, 연산군 대 인물이며, 이천부사 강세윤은 숙종대 인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