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삶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순간을 맞는 경우가 생긴다. 주인공 앤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 순간이다. 말기 암, 2달 남았다는 사형선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 대해 절망하고 살기 위해 몸부림 칠 때, 영화는 전혀 다른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주변에 비밀로 하고 남은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 동안 하고 싶었던 일, 남은 사람을 위해 준비할 일, 그리고 자신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10가지 리스트를 써 내려가면서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단순하고 평범한 한 여인이 특별하게 삶을 정리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돌아 보게 된다. 바쁘게만 살아가는 일상을 최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에게 영화 <나 없는 내 인생>은 잠시 쉬어가는 쉼표가 되어줄 것이다.
덥고 치열한 여름과 박진감 넘치는 블록버스터의 잔치를 지나 선선한 바람과 함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그리워 지는 가을, <나 없는 내 인생>은 2006년 가을, 최고의 선물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뻔한 눈물을 짜내는 시한부 인생은 이제 그만,
이제 관객은 새롭고 차별화 된 감동을 원한다.
백혈병, 심장병, 말기 암... 한국 관객들은 유난히 시한부 인생과 관련된 영화를 많이 접한다. 그만큼 젊은 사람의 피해갈 수 없는 죽음, 끝이 보이는 삶이라는 소재는 드라마틱한 감동을 전한다. 그만큼 많이 활용되었던 시한부 인생이라는 소재는 어쩌면 관객들에게 식상하게 다가갈 수도 있다. 극적이고 자극적인 감동이나 눈물을 추구하는 한국 영화계에서는 "시한부 인생"은 어찌 보면 관객에게는 단골 손님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눈물샘을 마르게 할 정도의 감동을 원하는, 끈끈한 정과 현실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경향이 있는 한국 관객에게는 젊은 주인공의 시한부 인생은 눈물과 남겨진 미련, 그리고 미완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페인 제작진과 캐나다 배우들이 손잡은 이 영화 <나 없는 내 인생>은 삶과 죽음에 대한 조금은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두고 떠나는 마음에 어찌 나이, 성별, 국가의 차이가 있을까. 자신의 삶을 안타까워 하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더 살지 못함을 아쉬워 할 시간에, 주인공 앤은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혼자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것들, 또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을 차근차근 목록에 적어가며 앤은 짧지만 행복했던 삶을 반추한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많은 슬픔을 가슴속에서 혼자 삭여내는 앤을 보며 관객들은 저절로 내가 앤이라면 나는 어떤 목록을 만들어 갈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쉬움이 크고 미련이 남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가 삶의 내용과 모양을 결정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앤. 젊은 가슴, 투명한 영혼으로 준비하는 앤의 죽음은 그래서 그 잔잔함 보다 몇 배나 위력적인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최고의 배우, 최고의 연기
세계적인 시네 아티스트를 사로잡다!
미국, 캐나다 곳곳에서 실시된 20번 가까운 오디션은 완벽한 앤을 찾기 위한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많은 배우들과의 길고 긴 오디션에도 앤은 좀처럼 감독에게 다가와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뉴욕에서 사라 폴리를 만나는 순간, 감독 이자벨 코이셋은 "앤이 문을 통해 걸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발걸음, 눈빛, 손짓 그리고 목소리 까지... 사라 폴리는 너무 평범한 인물의 성격 때문에 감독이 미처 구체화 시키지 못하고 고민했던 작은 디테일 까지 앤의 모습을 완벽하게 스크린에 펼쳐 놓았다. 특히 너무나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녹아 든 배우들 덕분에 벵쿠버 외곽에서의 촬영 기간 동안, 일부 구경꾼들은 사라와 스콧이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모습을 보고 실제 가족으로 착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앤이 병원에서 의사에게 병에 대한 소식을 듣는 순간 - 충격에 휩싸였다 이내 진정하고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려고 결심하는 찰나의 순간-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사라 폴리의 열연은 스탭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그 이후 점점 내적으로는 강해지면서 육체적으로는 약해지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면서도 남편에 대한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사라 폴리가 아니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사라의 이런 연기를 보고 감독은 "사라는 앤을 연기한 것이 아니었다. 앤 바로 그 자신이었다."라고 표현했다. 제작자인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눈을 사로잡는 미인은 아니지만, 강하고 아름다우며 달콤한 모든 것을 한번에 표현해 내는 매력을 가진 배우'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알모도바르 최초의 "아메리칸 스토리"
스페인, 캐나다를 넘나드는 국제적인 프로젝트
세계적인 시네 아티스트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보수적인 사회제도에 반하는 도발적인 영화 문법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키카>,<하이힐>,<내 어머니의 모든 것>,<그녀에게>,<나쁜 교육>등의 일련의 영화에서 알모도바르는 양성애와 동성애에 대한 자유분방한 묘사, 부조리, 초현실적인 발상으로 기존 영화 문법과는 전혀 다른 내용과 형식으로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영화는 스페인 영화 특유의 파격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나 없는 내 인생>은 알모도바르가 스페인적인 감성에서 벗어난 첫번째 시도라 할 만 하다.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던 낸시 킨케이드의 "침대를 뗏목 삼아"는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단편소설. 소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감독 이자벨 코이셋은 알모도바르에게 이 소설을 모티브로 영화를 만들 것을 제의했고 그 과정에서 소설의 배경이었던 마이애미 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캐나다 벵쿠버를 로케이션 장소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스페인 최고의 시네아티스트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그의 제작사 El Deseo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던 이 프로젝트는 스페인, 캐나다를 넘나드는 범국제적인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