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동학사(東鶴寺)
bb0336 ・ 2021. 8. 8. 17:00
동학사 대웅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계룡산(鷄龍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상원이 창건한 사찰.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1606년 제작)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로 구성된 삼세불상(三世佛像) 3구와 그 내부에서 나온 복장물로 이루어져 있다. 복장물 가운데 불상조성발원문은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충청남도 공주 계룡산의 청림사(靑林寺)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불상으로 밝혀졌다.
불상 제작시기는 1605년 음력 10월 대웅전의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과 극락전 아미타불 등 4구를 조성하기 시작하여 1606년 음력 3월에 완성되었다. 또한 중수개금발원문을 통해서 1883년에는 동학사 대웅전에서 삼세불상의 개금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어 1883년 이전에 청림사에서 인근에 위치한 동학사(東鶴寺)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 다라니경
불조삼경(보물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복장전적 (公州 東鶴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腹藏典籍) | 국가문화유산포탈 | 문화재 검색 (heritage.go.kr)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복장전적은 동학사 대웅전에 봉안된 보물 제1719호의 공주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에서 발견된 불서들로 모두 임진왜란 이전의 간사본이다. 이 중에서 희귀본, 귀중본, 완전본 등의 조건을 고려하여 중요도가 높은 7종 8책을 별도의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하였다.
<복장전적 세부목록>
1.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권4,권6
2.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언해 권6
3. 육경합부(참조: 양주 송암사 육경합부 楊州 松巖寺 六經合部 (ggcf.kr))
4. 묘법연화경(언해) 권2
5.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6. 불조삼경
7. 지장보살본원경 권하
복장유물 중 다른 불상 복장물과 비교되는 것은 일부가 잘려진 남자 갓끈과 작은 손잡이 거울이고, 가장 많은 수량의 경전류는 모두 93권 55책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전기에 간행된 불서들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베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묘법연화경』 권4, ‘대공덕주(大功德主) 효녕대군(孝寧大君)’ 묵서가 적힌 『지장보살본원경』 권하 등이 주목되는 등 그 중요성이 평가되어 불교전적 중 8책은 별도로 보물 제1720호로 지정되었다.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앞으로 숙인 자세에 목과 상체가 긴 비례감, 넓은 무릎이 주는 균형감에서 조화가 돋보이며 위엄 있고 작은 얼굴 표현, 측면에서 느껴지는 마른 체형과 간결한 옷주름 등이 특징인 작품이다. 세 구는 수인과 착의법에서만 조금 차이가 있을 뿐 그 특징이 비슷하며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모습을 하고 변형된 편단우견식(偏袒右肩式)의 대의(大衣)를 입었다.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어깨 부위 정도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왼손은 왼쪽 무릎에 거의 닿을 정도로 둔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으며 약사불은 왼손을 든 설법인 자세로 아미타불과 반대의 모습이다. 약사와 아미타불은 편삼(偏杉)을 입고 그 위에 대의를 걸쳤다. 이 불상은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에서 발견된 불상조성발원문에 불상을 만든 사람이 상화원(上畵員) 각민(覺民)이라고 승려 법명이 적혀 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활동한 조각승 각민에 의해 제작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으로 임진왜란 직후인 1606년에 조성된 불상이다.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기에 제작된 불상 사례가 많지 않은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각민이 수화승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현존 작품으로 균형있는 안정감, 위엄있는 얼굴 표현 등 우수한 조형성을 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불상조성발원문과 개금중수기는 불상의 조성과 이안 그리고 중수 개금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며, 많은 수량의 복장전적(腹藏典籍)은 조선전기 인쇄사와 서지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조각승 각민의 작품은 동학사 대웅전 불상, 한국불교미술박물관 소장 목조아미타여래좌상, 1614년 순천 송광사 대웅전 비로자나불삼존상이 있다. 1614년 순천 송광사 대웅전 비로자나불삼존상은 각민의 주도로 행사(幸思), 청허(淸虛), 보옥(寶玉), 희순(熙淳), 심정(心淨), 응매(應梅)가 참여한 불상으로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불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 ‘조선후기 조각승 인균’ - 불교신문 (ibulgyo.com)).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복장전적(公州 東鶴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腹藏典籍))]
인재문 오른쪽에 '삼은각' 현판이 보입니다.
동계사(동계사 왼쪽에 삼은각이 있는데 잠겨 있어 촬영이 어려웠습니다.)
724년(성덕왕 23)상원(上願)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懷義)가 절을 창건하여 청량사(淸凉寺)라 하였고, 920년(태조 3)도선(道詵)이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936년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거달(柳車達)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기 위해 동학사(東鶴祠)를 지었다. 그리고 사찰을 확장한 뒤 절 이름도 동학사(東鶴寺)로 바꾸었다.
중간 왼쪽부터 삼은각, 동계사, 숙모재가 보입니다.
숙모재
이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東鶴寺)라 하였다는 설과, 고려의 충신이자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인 정몽주(鄭夢周)를 이 절에 제향하였으므로 동학사(東學寺)라 하였다는 설이 함께 전해진다.
1394년(태조 3)고려의 유신(遺臣)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雲禪)과 함께 단(壇)을 쌓아서 고려태조를 비롯한 충정왕·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1399년(정종 1)고려 유신 유방택(柳芳澤)이 이 절에 와서 정몽주·이색(李穡)·길재 등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다음해 이정한(李貞翰)이 공주목사로 와서 단의 이름을 삼은단(三隱壇)이라 하고, 또 전각을 지어 삼은각(三隱閣)이라 하였다.
숙모전(처음에는 초혼각)
인재문
1457년(세조 3)김시습(金時習)이 조상치(曺尙治)·이축(李蓄)·조려(趙旅) 등과 더불어 삼은단 옆에 단을 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단종의 제단을 증설하였다. 다음 해에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제단을 살핀 뒤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定順王后)·안평대군(安平大君)·금성대군(錦城大君)·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정분(鄭奔) 등과 사육신, 그리고 세조 찬위(簒位: 임금의 자리를 빼앗음)로 원통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였다. 인신(印信: 도장)과 토지 등을 하사하였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하고 승려와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이 절과 초혼각이 모두 불타 없어졌고, 1785년(정조 9) 정후겸(鄭厚謙)이 위토(位土: 묘에서 지내는 제사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경작하던 논밭)를 팔아버리자 제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신천영은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가담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history.go.kr))
1814년(순조 14) 월인(月印)이 예조에 상소하여 10여 칸의 사옥과 혼록봉장각(魂錄奉藏閣)을 세웠다. 1827년 홍희익(洪羲翼)이 인신을 봉안하는 집을 따로 지었으며, 충청좌도어사 유석(柳奭)이 300냥을 내고 정하영(鄭河永)이 제답(祭畓)을 시주하여 다시 제사를 베풀었다.
1864년(고종 1) 봄에 금강산에 있던 만화 보선(普善)이 이 절에 와서 옛 건물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2칸을 지었는데, 초혼각은 1904년 숙모전(肅慕殿)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 4월 20일 임신 2번째기사 1836년 청 도광(道光) 16년
공주의 동학 서원을 절로 만들게 하고 중들에게 수호하게 하다
공주(公州)의 동학 서원(東學書院)은 본시 동학사(東鶴寺)였다. 단종조(端宗朝) 육신(六臣)의 초혼기(招魂記)가 있어 중들로 하여금 이를 간수케 하였었는데, 뒤에 향유(鄕儒)들이 옮겨다가 서원을 만들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규흠(鄭奎欽)의 일이 터지자, 서원을 헐어 절로 만들게 하고, 옛날대로 중들에게 수호하게 하였다.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 4월 13일 을축 1번째기사 1836년 청 도광(道光) 16년
정규흠이 복주되다
정규흠(鄭奎欽)이 복주(伏誅)되었다. 정규흠은 공주(公州) 사람인데, 경향(京鄕)에 출몰하며 교원(校院)에 의탁하여 거짓을 꾸미고 사람을 속이는 것을 기량(技倆)으로 삼았다. 동학사(東學祠)의 사유(祠儒)들과 틈이 생기자, 스스로 통문(通文)을 지어 숭현 서원(崇賢書院)에 전했는데, 그 중 한두 마디가 위로 막중한 곳을 촉범(觸犯)하여 거의 부도(不道)한 말에 가까웠다. 그리고 미워하는 사람들의 성명을 모록(冒錄)하여 화(禍)를 전가(轉嫁)할 계책을 꾸몄으며, 또 스스로 자신의 조부를 욕하여 형적을 감추려 들었다. 일이 발각되자, 처음에는 형조에서 사핵(査覈)하다가, 이내 의금부로 옮겨 국문(鞫問)하고 범상 부도(犯上不道)로 결안(結案)하여 정형(正刑)하였다.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9월 20일 양력 2번째기사 1905년 대한 광무(光武) 9년
단종 때의 충신 정분과 정지산에게 벼슬을 추증하도록 하다
예식원 장례경(禮式院掌禮卿) 이근교(李根敎)가 아뢰기를,
"종1품 정낙용(鄭洛鎔)의 상소문으로 인하여 예식원(禮式院)에서 품처(稟處)하게 하겠다는 비지(批旨)가 있었습니다. 그 상소문 내용을 가져다 보니, ‘단종(端宗) 때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절개를 지켜 의리를 고수한 사람으로서 삼상(三相), 생육신(生六臣), 사육신(死六臣), 칠현신(七賢臣)이 있었는데 우의정(右議政) 충장공(忠莊公) 신 정분(鄭苯)은 곧 3정승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아들 호조 정랑(戶曹正郞) 정지산(鄭之産)은 칠현신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계유년(1453) 충장공이 광양(光陽)의 귀양지에서 죽음을 당하자 정지산은 공주(公州)에 자취를 감추고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으며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고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습니다. 정축년(1457) 상왕이 세상을 떠나자 동학사(東鶴寺)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성의를 다해 제사를 지내면서 3년 상을 마쳤습니다. 정조(正祖) 때에 칠현신을 동학 서원(東鶴書院)에 배향(配享)하라는 명(命)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홍재전서(弘齋全書)》와 《장릉배식록(莊陵配食錄)》, 《상왕복상록(上王服喪錄)》, 《초혼각제관록(招魂閣祭官錄)》을 통해서 명백히 징험할 수 있으니 속히 정문(旌門)을 세워주고 신주를 묻지 않는 은전을 의논해주소서.’ 하였습니다. 그의 충성과 효성에 대하여 포양(襃揚)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이니 추증(追贈)하는 일을 궁내부(宮內府)에서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궁내부에서 아뢰기를,
"정2품 내부 대신(內部大臣)으로 추증하였습니다."
하였다.
위와 같은 사유로 동학사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졌겠지요.
동계사, 삼은각, 숙모전과 관련된 비(1960년 건립)가 갑사로 가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비문에는 '동계사, 삼은각, 숙모전은 국가 대의의 기초이고, 기미년 3월 1일 독립운동은 민족 정신의 봉화이다. 이 대의와 이 정신으로 조국 통일을 염원하는 바이다. '며 '국가 대의의 기초'로 보는 생각이 흥미롭습니다.
[출처] 공주 동학사(東鶴寺)|작성자 bb0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