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하니 문단마다 답글을 달아주시는 세심함에 감사함을 표하는것이 맞겠죠?
제가 바라고 기대하던 일이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답변을 주실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이왕 이렇게 답변까지 해주시니 저도 한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이 말을 듣는 회원님들께서 뭐라고 말씀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활터에서 사우들과 대화하면서 잘쏘는 사람과 잘 맞추는 사람이란 말을 의도적으로 꺼내쓰곤 합니다.
잘쏘는 사람이란 활을 이해하고 바른 활쏘기(활쏘기 기본원리와 몸쓰기)를 배워서 쏘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구요,
잘 맞추는 사람이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활을 쏘아 145m 과녁을 쾅쾅대며 잘 맞추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한산님 말씀처럼 145m에 특화된 잘 맞추는 사람은 그외의 거리에 대해서 잘 맞추지 못합니다. 연궁을 주거나 더 강궁을 주거나 짧은 살을 주거나 긴 살을 주거나 가까운 표적을 주거나 측면에 있는 표적을 주거나 하면 제대로 쏘지도 맞추지도 못하는걸 자주 봅니다. 하지만 잘쏘는 사람은 상황에 맞게 활을 부려가며 활을 쏩니다. 맞춤여부는 차치하고라도요.
물론 어떤것을 배웠는지의 차이가 있고, 무엇을 연습하는데 치중하였는가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으나 활쏘기가 오로지 145m 과녁맞추기를 위한 놀이로만 여기는 사람에게는 잘 맞추는 방법 그 외의 것은 아무런 관심도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데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한산님과 말씀을 나누는 것은 잘 쏘는 사람이 되고싶어 활에 관한 담론을 나누며 배우려는 것일테고요.
글은 있는 그대로 읽는 것도 글 읽는 것이고, 글의 행간을 보아가며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글 읽기라고 봅니다. 저같은 보통 사람은 주로 있는 그대로 읽어서 뜻을 깨치려고 하고 때로는 몇차례 정독을 하는 과정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무릎을 탁치곤 하기도 하지만, 글을 읽으며 단번에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고 무릎을 치며 반응하는 높은 수준의 글읽기를 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행간을 잘 파악하고 숨겨진 비의를 잘 찾아내시는 분이야 금방 깨우침을 얻고 실천에 옮길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보통사람에게는 왜 이 글이 이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인지 똥인지 된장인지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일러주지 않으면 겉모습만 보는 글읽기가 계속 될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스스로 무릎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무지한 사람에게 그것을 알게끔 가르쳐주는 사람은 학습자의 눈높이에 맞춘 가르침이 되어야 그 말을 알아듣고 깨우침을 얻을수 있는것 아닐까요? 개뿔도 모르는 무지한 자에게 자신만이 알고 있는 유식한 말과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려 한들 그 말이 어느 귀에 들어가고 뇌속에 박혀 깨달음에 이를수 있겠습니까? 가르침이 부족하여 배움이 깊어지지 못한것은 아닌지 반구저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많은 내용을 보생깍지나 철사연에 또 국문연에 많이 올려놓으셔서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한 두번 다 읽어본것 같습니다만 때로는 동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해가 안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일방적이지 않는가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허나 그 많은 내용을 읽다보면 너무 깊고 넓은 학문의 세계에 빠져드는것 같은 때도 있고, 자신의 주장에 대해 한없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쓰신 내용도 있어서 겉핥기로 넘어가게 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충분히 설명했고 또 설명해줬다. 못알아먹고 헛소리를 하는 너는 거시기 한거다 라고 하는 식의 말씀은 자기 아닌 타인을 가르치는 분의 태도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제가 이상한 걸까요?
이춘기 공이 활을 잘 쐈다고 하고 박취문 형제가 활을 잘 쐈다고 하고 정조대왕이 활을 잘 쐈다고 하고 주몽태왕도 활을 잘 쐈다고 하는데 옛부터 활을 잘 쐈다고 하는 기준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활쏘는 모습이 멋져서일까요? 쏘는 족족 과녁을 꿰뚫어서 일까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활을 잘 쐈다고 하였을까요? 회원님들은 그 기준을 아시나요?
제 생각엔 무엇보다도 맞추고자 하는 표적을 정확하게 단번에 꿰뚫는 솜씨를 기준으로 활을 잘 쐈다고 했을것 같습니다. 예가 활로 신의 경지에 있다는데 예도 활을 쏘아 표적을 잘 맞추어서 신궁이라는 것이지 어떤 방식으로 활을 쏘아서 활을 잘 쏜다고 하지는 않았을것 같습니다. 조선의 궁술 집필에도 관여했다고 말하기도 하는 성ㅇㅇ 옹 또한 활쏘는 사진을 보면 줌손을 길게 펴고 양궁처럼 화살은 귀밑까지만 당겨서 쏘던데 이 분도 활을 잘 쏘시는 축에 드셨나요?(요즘은 짧은 살로 귀밑까지만 당겨쏘더군요)
어찌되었던건 과연 활을 잘 쏘았다는 분들의 솜씨에 대한 판단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솔직해집시다.
활이 생겨난 옛날부터 활 잘 쏘는 사람이란 표적을 단번에 쏘아맞히는 사람을 일컬었을 겁니다. 그사람이 어떤 요상한 폼으로 활을 쏘았던 먹어야 사는 짐슴을 잡거나 죽여야 하는 적을 쏘아죽이거나 잘 맞추는 것이 최고였을 거구요. 그런때부터 활 잘쏘는 이는 잘 맞추는 이였겠지요. 당연히 활을 쏘아 도성덕립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구요. 오로지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적을 사냥감을 잘 잡느냐가 최대 관심사요, 한방에 쓰러뜨릴수 있는 강력한 활쏘기 방법이 활쏘는이들의 관심사였을 겁니다.
적을 한방에 쓰러뜨릴수 있는 강력한 활쏘기 방법을 찾다보니 찾아낸 것이 몸과 활이 일체화되게 하는 효과적인 사법이었고, 그것이 점차 틀을 잡아가면서 철전사법의 형태로 자리잡았다고 추론해볼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법이 틀을 잡아가는 과정에 의식도 학문수준도 변화하며 발전해왔고, 활쏘기도 학문의 영향을 받아 도성정립을 위한 수련의 한 방편으로 자리잡기도 하였으며, 무인들은 더욱 실전적인 활쏘기 방법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활쏘기를 도성덕립을 위한 수련수단으로만 봐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효과적으로 잘맞추기 위한 방법론으로서만 봐야 하는 것일까요?('도' 와 '예' 에 대한 관점이랄까요?)
저는 이에 대해서 두가지 모두를 다 충족시킬수 있는 방향으로 활쏘기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활쏘기는 정확하게 표적을 맞출수 있도록 인체에 가장 효율적으로 활을 사용할수 있는 사법체계를 발전시켜야 하고, 이러한 사법체계의 수련을 통하여 내면적으로 도성정립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사법체계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고, 그 사법이 어떻게 구성돼야 하는지에 대해서 갑론을박하며 토론을 하고 있는것 아닐까요?
저도 사법에 관해 가타부타 토론하고 씨름할수 있습니다마는 저는 너무 깊고 심오한 활 철학세계에 빠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무거운 활이라도 인체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부려먹을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배워서 건강하게 오래도록 활쏘고 싶을 뿐입니다. 저도 다쳤던 어깨도 철전사법을 알고 익혀가면서 많이 회복이 되었고 경추와 목근육도 바르게 되어서 올바른 활쏘기가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사법을 익혀서 효험을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철학이던 사법이던간에 누가 더 많이 알고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된 노력끝에 발견한 좋은 성과는 널리 알려 모두가 이롭게 쓰게 하라고 한산선생께서 자주 말씀하시던 홍익인간 정신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철사연을 찾고 배움의 길로 들어설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과 주장만이 옳다고(이것이 진리이니 따라야 한다는 식) 외친들 하루아침에 철전사법이 천하제일 사법으로 자리잡히겠습니까? 지동설이 오랜세월 걸쳐서 보편화된것처럼 옳은 것이라면 싸우지 않고도 알리고 또 알리다 보면 보편화되는 날이 올것입니다.
한산선생은 절대 안한다 하시지만 저 또한 그러하면 안된다고 절대로 안된다고 할겁니다. 이 또한 어렵게 발견하고 노력하여 발굴해낸 철전사법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첫댓글 세상사람들이 학교교육 방식에 익숙해져서 도제식 교육에 대하여는 반감을 나타내곤 합니다. 예를 들어 국악 대금에 원장현류 산조가 있다고 칩시다. 원장현 선생을 대학교 강단에 불러올려서 강의를 하고 대금산조를 가르쳐 주게되면 학교교육 방식으로 가르쳐 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은 학교교육방식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원장현선생 문하에 들어가 도제식 교육을 통해 명인으로 거듭납니다. 대부분의 심미적인 현상은 도제식 교육을 통하여 심오한 경지로 나아가지요.
우리활은 어떻습니까? 한산이 인터넷에 동영상을 몇개 올리고 나름대로 상세한 설명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외면적인 것만 가능하고 우리 인체 내면에 일어나는 반응이나 마음으로 전해줄 수있는 부분은 거의 전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송당 박영선생이나 일제 이항선생이 활로서 활연관통을 하여 경을 이루었다고 조선의 궁술 명궁전에 나오는데, 두분 선생이 이루었던 경지가 어떤 경지인지 가보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고 그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론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터넷에 풀어놓아야 할까요? 아니면 1:1 대면에서 깊이있게 가르쳐야 할까요?
식자우환이라고 고민이 깊어지는 시간입니다.
이제 우리활이 사이재도 사이관덕을 위한 활로서 서서 하는 요가, 입선동공인 것도 알았고, 어떻게 하면 경에 도달할 수 있는지 방법론을 알아 냈지만, 한산은 도달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뜻이 있는 청춘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요. 때가 되고 인연이 닿으면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광야에서 목놓아 울게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지점은 인터넷에 대놓고 떠벌리지 못합니다. 그저 그런 경지가 있다 정도만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