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 이기의 <민씨사충정려중수기>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가 지은 단종 때 김종서와 함께 피살된 삼중신(三重臣)이라 불린 이조 판서 민신(閔伸, ?~1453) 아들 삼형제 민보창(閔甫昌, ?~1453, 첨지중추부사, 처 언양 김씨(彦陽金氏, 김계보(金季甫)의 딸)) 민보해, 민보석 민씨사충의 정려 중수기도 단종충신의 문학 자료이다.
古之論人。必信於史。故凡編史者。非獨徵於舘閣之所藏。亦有求於家狀墓志之所載者。盖懼其遺脫而不備也。然至於端宗乙亥之遜。則事出卒遽。又多忌諱。當時殉難之臣。亦顯晦不一。吾未知後世編史者。將何所據邪。於是時也。吏曹判書閔公伸膺。方奉命董顯陵石役。而收者至。竟與左議政金公宗瑞。同日就戮。而公三子甫昌,甫諧,甫釋。皆從之死。其禍雖慘。而其忠亦大矣。榮辱生于一時。是非定于百年。此士君子所以躬處於義而不顧者也。故正祖辛丑。賜謚忠貞。後七年。又贈領議政。純祖壬午。特命㫌閭。閭在今海南郡馬浦面禾內里。盖一閣而四板具。而歲旣久。慮其頹圮。公十代孫今內部主事慶鎬。傾貲募工。易榱桷而改丹雘。煥然一新。功告訖。求余記其事。嗚呼。公之立朝本末。今不可詳。然想其平日 忠義不屈之氣。有足以憚服人。使公在則事未可知。故尙方之誅。自公始焉。及其死也。朝野之人。皆畏不敢言。而其子孫又流落海陬。家狀,墓志。擧失其傳。則安知舘閣之藏。果能無缺邪。其所恃以徵公於百世之後者。唯此閣而已。而今距壬午八十有二年。而僅一修耳。苟能保而存之。嗣而葺之。以竢後之編史者。則豈非幸歟。慶鎬曰諾。因書以歸之。<李海鶴遺書卷八 固城李沂伯曾著 / 文錄[六]○記 / 閔氏四忠㫌閭重修記 壬寅>
閔伸 (? ~ 145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돈암(遯菴). 시호는 충정(忠貞).[1]
1423년(세종 5) 등용되어 경기도 관찰사, 한성부 부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문종 즉위 후에는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으며, 김종서, 황보 인 등과 더불어 세종의 고명대신으로 단종을 보필했으며, 당시 권력을 노렸던 수양대군의 회유를 여러차례 거절했다.
계유정난 당시에 현릉(顯陵, 조선 문종의 능)을 감독하던 중 수양대군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아들 다섯과 함께 참살당했고, 아내와 며느리 등은 1472년(성종 3) 복권될 때까지 계유정난 공신들의 노비 신세가 되었다.
이후 1781년(정조 5) 복권되었으며, 이듬해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는다.
2. 가족 관계[편집]
여흥 민씨의 시조인 민칭도의 13세손이 되며, 태종의 장인인 민제의 동생인 민개의 손자가 된다.[2]
민칭도(시조)-민세형(2세/감찰어사)-민의(3세/호부원외랑)-민영모(4세)-민공규(5세/평장사, 정의공파 파조)-민인균(6세/삼사사)-민황(7세/이부시랑)-민종유(8세/찬성사)-민적(9세/대제학, 상호군)-민변(10세/전리판서)-민제(11세/태종의 장인, 좌의정), 민개(11세, 대사헌, 경상도관찰사, 민신의 조부) 형제[3]
민개 이후 가족 관계도
할아버지 : 민개(閔開, 1360 ~ 1396) - 할머니 : 고성 이씨(固城 李氏, 이강의 딸)
아버지 : 민불해(閔不害, 생몰년 미상, 시윤(寺尹)) - 어머니 : 안동 권씨(安東 權氏, 권집중(權執中)[4]의 딸)
본인 : 민신(閔伸, ? ~ 1453, 이조판서) - 아내 : 단양 우씨(丹陽 禹氏, 우치강(禹治江)의 딸[5])
아들 : 민보창(閔甫昌, ? ~ 1453, 첨지중추부사) - 며느리 : 언양 김씨(彦陽 金氏, 김계보(金季甫)의 딸[6])
아들 : 민보해(閔甫諧, ? ~ 1453) - 며느리 : 경주 이씨(慶州 李氏, 이명민(李命敏)의 딸)
아들 : 민보석(閔甫釋, ? ~ 1454)
아들 : 민보흥(閔甫興, ? ~ 1453)
아들 : 민석이(閔石伊, ? ~ 1454)
동생 : 민중(閔仲)
계유정난 당시 민신 본인과 다섯 아들 중 3명이 같은 날 참살당했고, 보석과 석이는 1년이 지난 뒤에 참살당했다. 또한 해당 문서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딸 셋도 노비로 살았다.
2.1. 후손[편집]
이렇게 보면 집안이 멸문당한 것으로 보이나 사실 민신의 아우인 민중(閔仲)과 사촌인 민건(閔騫, 1394 ~ ?)의 후손들은 남아있다.
직계로만 따져보면, 계유정난 당시 아내인 단양 우씨와 맏며느리인 언양 김씨가 당시 7살이던 손자 민중건(閔仲騫, 1447 ~ ?)[7]을 항아리에 숨겨 중건의 진외가인 진도군수 안위(安位)의 집안에 맡겨 기르게 했다.
이후 중건은 성균관 유생(생원)까지 되었다고 족보에 나오며 2남 1녀를 두었는데, 그의 딸은 실록에 열녀로 기록되어 있다.[8]
이후 손자 중건이 정착한 해남 지역을 중심으로 민신의 후손들이 '여흥 민씨 충정공파'를 이루고 있으며, 후손으로는 민동석, 민병초, 민영남, 민병록, 민화식, 민두기, 민형배, 민홍철, 민병덕 등이 있다.
[1] 이하 내용은 '여흥 민씨 대종회' 인터넷 족보(권1 402쪽 1단)와 대종회 홈페이지 내용 등을 참고했다.[2] 바꿔 말하면, 태종 비 원경왕후 민씨는 민신의 당고모(5촌) 관계가 된다.[3] '여흥 민씨' 문서에도 나오지만, 민영모 이후 후손들이 번창했으며, 민적, 민변 대에는 재상지종에 들 정도였다. 여담으로 민변(閔忭, ?~1377)은 슬하에 민제, 민개, 민양(閔亮)과 딸 하나(곽추( 郭樞)의 처)를 두었다.[4] 원 간섭기에 도첨의정승을 지낸 권한공의 증손자로 권집중의 조부 권중달은 이색의 장인이 된다.[5]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있다가 남편과 아들들이 참살당한 후 정난공신이자 3촌 외숙인 안경손(安慶孫, 1416~1479)의 노비로 살았다.[6] 숙인(淑人)으로 있다가 시가가 멸문당하고 나서 이사철(李思哲, 1405년 ~ 1456년, 이천계의 손자)의 노비로 살았다.[7] 장남 민보창과 맏며느리 언양 김씨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민효건(閔孝騫)과 민우건(閔友騫)에 대한 정보는 없다.[8] 해당 기록에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적어도 연산군 때까지는 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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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건(閔仲騫)
[생원]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42위(72/100)
자(字) 모성(慕聖)
본인본관 여흥(驪興)
거주지 해남(海南)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훈도(訓導)
부모구존 ○○하(○○下)
[부(父)]
성명 : 민기(閔沂)
관직 : 훈도(訓導)
[출전]
『정덕2년정묘춘증광사마방목(正德二年丁卯春增廣司馬榜目)』(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고)349.16 사마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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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 중종 15년 경진 > 4월 27일 > 최종정보
중종 15년 경진(1520) 4월 27일(갑신)
15-04-27[03] 열녀 민씨의 여문에 정표하다
열녀(烈女) 민씨(閔氏)를 여문(閭門)에 정표(旌表)하였다. 민씨는 해남현(海南縣) 사람 생원(生員) 민중건(閔仲騫)의 딸인데, 일찍이 부모를 잃고 외숙에게서 자랐다. 사촌 언니가 제 시동생 윤상(尹翔)에게 시집보내려 하였으나 민씨 집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윤상이 드디어 민씨의 사촌 언니 【곧 윤상의 형 윤한(尹翰)의 아내이다.】 와 음모하여 한밤에 침방(寢房)에 돌입하여 핍박하였는데, 민씨가 크게 외치며 항거하므로 윤상은 달아났으나 민씨가 스스로 상심하여 그 오라비 민귀(閔龜)의 집으로 옮겼다. 그 뒤에 윤상이 ‘내가 이미 서로 간통하였다.’고 드러내어 말하여 끝내 장가들려 하니, 민씨는 그 연유를 갖추 말하고 혹 머리를 벽에 부딪으며 통곡하고 30여 일 동안 먹지 않았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여자가 천지간에 나서 헛되게 더러운 말을 들으니 사는 것이 몸을 깨끗이 하여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드디어 목매어 죽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연탁 (역) |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