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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채님의 <탐진안씨선계변정록>이 탐진안씨를 분해 시켰다. 그 원인은 문열공 탐진군 안원린이 조선후기(1850년경)에 창조되면서이다. <탐진안씨선계변정록>에 안원린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공부해 본다.
BOOK: 탐진안씨선계변정록(耽津安氏先系辨正錄)
주) 변정(辨正): 분별하여 바로 잡다
저자: 안상천. 발행: 2002년. 발문(跋文. 후기) 작성: 2001년 12월 31일
제2편 안원린(安元璘)과 안우(安祐)의 일생
제2-1-1. 안원린(安元璘)의 일생
공의 휘(諱)는 원린(元璘)이요 초휘(初諱)는 원륜(元崙)이다. 세계(世系)는 보승별장(保勝別張)으로서 흥위위상호군(興威衛上護軍)으로 증직(贈職)된 휘(諱) 자미(子美)공의 8세손이며, 증직추밀원부사(贈職樞密院副使)인 휘 영유(永儒)공의 6세손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치사(致仕)하여 태사(太師)로 추증(追贈)된 휘(諱) 부(孚)공의 5세손(五世孫)이며,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회헌(晦軒) 시(謚) 문성공(文成公) 휘(諱) 향(珦)의 증손이며, 조(祖)는 휘(諱) 우기(于器)로 검교첨의찬성사(檢校僉議贊成事) 호(號) 죽옥자(竹屋子) 순평군(順平君)으로 시호(諡號)가 문순(文順)이며, 선고(先考)는 휘(諱) 목(牧)으로 진현관대제학(進賢冠大提學) 호(號) 겸제(謙齋)로 순흥군(順興君)이요 시호(謚號)가 문숙(文淑)이며, 아들은 3형제로 장자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순성군(順城君) 시(謚) 문혜(文惠)로 휘(諱) 원숭(元崇)이며, 차자는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죽성군(竹城君) 시(謚) 역시 문혜(文惠)로 휘 원형(元衡)이며, 문열공(文烈公)은 계자(季子)다.
공은 대대로 이어오는 문형(文衡)의 혈통을 따라 1324년(고려 충숙11년 갑자)에 개성(開成)에서 탄생하시어 1341년(충혜2년 辛巳)에 백(伯)·중씨(仲氏)와 더불어 약관(弱冠) 18세로 동방(同榜)* 급제하시니 고려 사회가 이를 부러워하였다.
*동방(同榜): 과거에 같이 급제하여 방목(榜目)에 함께 적히는 것
고려말 백문거(白文擧) 선생은 『정 안겸재 (呈安謙齋)』라는 시(詩)에서 『다길조(多吉兆)』와 『신영광(莘榮光』과 『학사당(學士堂)』으로 노래할 정도로 삼자 동방급제(同榜及第)를 축하했다. 이때 원숭(元崇)·원형(元衡)·원린(元璘)·종원(宗源)이 충혜왕(忠惠王) 신사(辛巳)=1341)에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다. 이에 순흥안씨의 많은 인물이 급제하여 마치 학사당(學士堂)을 이룬듯하다고 노래하였다.
次 朴持平韻 呈 安謙齋 : 박지평의 음운 뒤를 이어 (백문거가) 안겸재에게 바치다
盡道新年多吉兆 : 도리를 다한 새해는 길조(吉兆)가 많을 지니
端知慶閥莘榮光 : 방정(方正)한 벌족(閥族) 가문 여러 영광 모였구나.
傳來古儉先人宅 : 전래해 온 옛날 검소(儉素), 지금 역시 선인댁(先人宅)
化作風流學士堂 : 풍류(風流)를 조화(造化)하여 학사당(學士堂)을 만들었네.
뿐만 아니라 목은 이색(牧隱 李穡) 선생은 『竹溪安氏冠群英 : 죽계안씨 영걸(英桀)들 무리지어 벼슬했네』 라고 노래하였다.
공의 벼슬은 정당문학 검교중추부사(政堂文學 檢校中樞副使)이며 이봉(移封) 탐진군(耽津君)으로 시호는 문열(文㤠)이시다. 문열(文㤠)의 시법(諡法)은 근학호문(勤學好問)하여 문(文)이요 충군자민(忠君慈民)하여 열(㤠)이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 선생은 『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에서 밀직첨서(密直僉書) 휘(諱) 문간공 안종원(文簡公 安宗源)이 평소 목은(牧隱)에게 하던 말을 인용하여
『吾族祖文成公之孫政堂公, 有三子又登科, 何天之厚吾安氏之至此也) : 내 족조 문성공의 손 정당공(政堂公)의 아들 삼 형제가 또 과거에 올랐으니, 어찌 하늘의 후(厚)한 대접이 우리 안씨(安氏)에게만 베풀어진 것이라 않겠는가?』라고 하였고, 『猶且歷三世而從基孫之登科)) : 오히려 3세나 지나 그 손자가 과거에 올랐다』라고 하였으니, 역1세하니 (歷1世, 1세를 지나니) 문성공 향(文成公 珦)이요, 역2세하니 (歷2世, 2세를 지나니) 문순공 휘 우기(文順公 諱 于器)이요, 역3세하니 (歷3世, 3세를 지나니) 문숙공 휘 목(文淑公 린諱 牧)이니, 그(珦)의 손자(일반적 후손) 원숭(元崇)·원형(元衡)·원린(元璘) 삼 형제라고 밝혀 놓았다. 그러므로 순흥7세는 확실한 삼 형제이다.
순원군 휘 응창 백암공(順原君 諱 應唱 柏巖公)은 『문성공 회헌부자 묘지(文成公 晦軒夫子 墓誌)』와 『문숙공 목 묘지(文淑公 牧 墓誌)』에서 한결같이
『文淑生三男一女 長曰元崇 政堂文學 順成君 文惠公, 次曰元衡 竹城君文惠公, 次曰元璘 耽津君 文烈公, 女適判書閔愉)』라 하여 삼 형제라 하였다.
그러나 문열공(文烈公=耽津君=元璘)은 후세에 어떠한 유적(遺蹟)도 남김없이 요절(夭折)하셨으니 한없이 애석하도다. 공은 슬하(膝下)에 두 형제를 두었으니 장자는 휘가 예(禮)로 1341년(충혜2 辛巳)에 출생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판밀직직제학 상장군(判密直直提學 上將軍)이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켜 조선조(朝鮮朝)에서는 관직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차자는 휘(諱)가 도(堵)로 우왕 14년(1388년) 등과한 후 고려조에서는 출사(出仕)하지 않았고, 조선조 태종조(太宗朝)에 출사(出仕)하여 전사판관(典祀判官)을 거쳐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을 역임하였다.
문열공의 배위(配位)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아들의 등에 업혀 천수백리 망명(亡命)길을 따라 영산의 영축산(靈鷲山) 밑 당포(唐浦)에 우거(寓居)하였다. 그 후 이거()하여 갈현(葛峴) 밑의 효자리(孝子里)에 살다가 쓸쓸히 돌아가시니, 극진히 모시던 헌남공은 여묘(廬墓)에서 피눈물로 슬피 울어 출천(出天)의 효을 다하였고, 태종(太宗)은 을유(乙酉) 1405년에 정려(旌閭)를 내려 세상에서 그의 덕행(德行)이 온 백성에게 귀감(龜鑑)이 되게 하였다.
공의 묘는 경기도 장단(長湍)에 있었다고 하나 표지(標識)가 없어 실묘(失墓)하였고, 배위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묘도 경남 영산 갈현(葛峴)에 모셨으나 역시 표지가 없어 실묘하였으니 후손들의 자괴(自愧)스런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2006년부터 전주최씨 산소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 결과 효촌(孝子里) 갈현에서 장구(長久)한 세월에 퇴폐(頹廢)된 묘지를 찾아 확인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2001년 12월 현재).
주1: 목은 이색의 『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 해석 오류 정정: 문성공에서 1세가 지나니 문순공 휘 우기이요, 2세가 지나니 문숙공 휘 목이요, 3세가 지나니 순성군 휘 원숭이다. 향으로부터 3세 거슬려 내려가면 지나면 향의 증손자인 원숭이다.
주2: 1659년 순원군 휘 응창 백암공이 원숭의 세 아들을 안목의 세 아들로 잘못 해석하여 큰 파장을 일으킨다. 안상채님은 이 해석을 따른다. 바른 해석이 필요함
주3: 급제 기록의 올바른 이해 : 안종원의 아들 급제 (경온 1362년, 경공은 1374년, 경량 1376년). 안원숭의 아들 급제 (원과 수는 1374년, 조동은 1376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경공과 경량은 이색에게 축하글을 부탁하였다.
제2-4-5.1 두 개 탐진안씨(耽津安氏, 康津別號)를 분명히 하고 있다.
① 시조 안우(安祐. 平章事, 配 崇義殿). 현손 지(止)
② 또(又) 일파(一派) 안덕린(安德璘, 벼슬: 典工摠郞)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탐진안씨 시조 안우 이외에 도 한 파(派)가 있다고 한 것은 바로 문열공(문열공 휘 원린)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초간보(初刊譜)를 발간할 때에 시조를 잘 몰라서 안덕린(安德璘)으로 잘못 기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명백한 것은 탐진안씨 시조가 두 사람이고, 이 두 탐진안씨는 시조가 다른 동성동본(同姓同本)이다.
우리 집안에서 문열공 안원린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은 대구에서 발간된 순흥군 안응창(順原君 安應昌)의 백암집(栢巖集)으로부터 인지(認知)한 후였다고 판단된다. 지금까지 백암집의 기록 이외에는 문열공의 휘를 정확히 정확하게 기록한 문헌이 없어 보인다. 누구든지 이러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제시하여 주시면 감사하겠다. 우리나라 성씨의 본관 중에서 이조동성동본(異祖同姓同本)은 탐진안씨 이외에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초간 경인보(庚寅譜)에서 안덕린(安德璘)을 시조라 기록한 것은 안원린(安元璘)의 착오다. 이 사실은 우리 선대 조상들께서 시조를 명확하게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시조의 휘를 원린(元璘: 初諱 元崙)으로 명확하게 기록한 것은 순원군 백암 안응창(順原君 柏巖 安應昌)의 백암집(柏巖集) 기록에 따라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주1: 여기에서 두 명의 시조는 안우와 안덕린이라고 분명히 언급했는데, 족보에는 시조가 안우와 안원린으로 바뀌어진다. 그런데 덕린과 원린의 후손 이름이 다르다.
주2: 경인보(초간)에서 덕린을 시조로 한 것은 원린의 착오라고 한다. 그런데 경인보에는 탐진군이라는 시조만 언급되어 있지 원린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있다. 안원린은 안덕린에서 나왔음을 알 수있다. 元璘은 원숭의 元자와 덕린의 璘자가 합쳐진 단어로 보인다.
제2-4-5.2. 이조동성동본(異祖同姓同本)이면서 시조가 다른 본관이 상당수가 있다
1917년 정사보를 수보하면서 동성동본이면 무조건 시조가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고 우(佑)·예(禮)·도(堵)를 삼 형제라고 억지로 정립하였다. 선조가 만들어 놓은 것을 부인한다는 일을 상당히 죄스러운 일이나 후손들의 갈등과 불화를 해결해야 하는 일이 더욱 시급함으로 사실대로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지나치게 헌납공의 휘는 도(堵)로 기록해야 하는데 영산(靈山)으로 낙향하여 변성명(變姓名)하여 일시적으로 사용한 복(福)자를 억지로 사용한데서 더욱 자연스럽지 못하다. 경신보를 구단하는 과정에서 이의 시정을 강력하게 주장한 필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1: 조선후기와 일제시대에는 정보가 충분치 않았고 동성동본이면 무조건 통합이 대전제이었다. 사실 족보에 대해서는 꼬치고치 따지면서 할 이유도 없다. 당연히 형제가 아니겠지만 같이 묶는데 의의가 있었다. 전체 윤곽만 잡히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주2: 안상천님도 조중운의 씨족원류 탐진안씨에 보이는 덕린- 복 계통을 헌납공파로 이해하신 것 같다. 하지만 그 아래 후손 이름들은 다른 것 같다.
제 2-4-6. 순흥종중(順興宗中) 역사 사실과 비교
순흥문중의 역사적인 사실과 오성군 안우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비교하여 상관관계를 고찰하였다.
연도 | 오성군 안우 역사적 사실 | 연도 | 순흥가문 역사적 사실 |
1341 | 밀양에서 조영휘 채권 이채 사건 발생하다 | 1341 | 안원린: 형인 원숭, 원형 두 분과 함께 18세의 나이로 등과 |
1347 | 안목*: 57세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다 | ||
1352 | 조일신의 난 평정.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다 | 1352 | 안목: 62세로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다. |
1354 | 전리판서(典吏判書), 오성군(鼇城君)이 되다 | 1354 | |
1360 |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事)** | 1360 | 안목: 70세로 졸하다. 시호 문숙공 |
1365 | 안원숭: 밀직부사(56세) |
*안목(1290~1360) : 문과 1315년(25세). 호 겸재(謙齋), 시호 문숙공, 봉호 순흥군, 향-우기-목-원숭(1309년생)-원·조동·수
** 안우의 공신호는 추충절의정난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고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로 임명된다. 같은 해 안우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된다.
제2-4-7. 맺음말
탐진안씨의 시조는 두 사람이다. 시조 안우계의 탐진안씨와 시조 안원린계의 탐진안씨가 있다, 안우계의 탐진안씨는 초간보(壬戌譜, 1742년) 이후 3차에 걸쳐 수보하는 과정에서 순흥안씨와 연관된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정사보(丁巳譜, 1917년 3파 합보)에서 안원린계 탐진안씨와 합보하면서 비로소 문성공을 비롯한 순흥안씨와 연관시켰다.
주1: 안도(堵)는 영산으로 낙향하여 복(福)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고 하므로 덕린-복의 연결은 맞을 수도 있고.
주2: 만약 안덕린이 안원린을 잘못 표현한거라면 안원린은 전공총랑이 아닌가?
주3; 우-현-윤기-사종-기·지로 내려오는 안우계는 족보 제작 시 탐진안씨에서 가장 유명한 우를 시조로 모시게된 것 뿐이다. 너무 혈통을 고집하면 한 명의 시조를 모시는 족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주4: 요즘은 정보가 많아서 연령 추산이 가능하다. 연령으로 보면 기와 지계는 우-윤기-사종-기·지가 적합하다. 우-현으로 이어지는 우의 직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