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왜는 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 시스템을 갖춰 찬란한 문화를 공유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절실한 역사다. 박종근 기자
일본 규슈 사가현 앞바다에 ‘가카라시마(加唐島)’라는 섬이 있다. 1950년대에는 주민 수가 500명을 넘겼는데 지금은 100명 남짓만 남아 도미나 오징어를 잡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섬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먼 옛날 한 여인이 이곳에 와 샘물을 마시고 아기를 낳았다. 훗날 그 아기가 아주 귀한 사람이 되었다.”
사가현 앞바다 가카라시마 섬
동굴에 ‘무령왕 탄생지’ 기념탑
“곤지와 일본 동행한 개로왕 부인
갑자기 산통 느껴 그 섬에서 출산”
『일본서기』 속 연도 오차 있지만
양국 교역 시스템 존재는 믿을 만
섬 사람들은 그 아기가 백제 25대 임금 무령왕이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이곳엔 ‘백제 무령왕 탄생지’를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조금 엉성하긴 해도,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해안 동굴과 아기 무령왕을 씻겼다는 우물도 보존(?)돼 있다. 한국인 관광객들을 유치하려는 섬 사람들의 희망이 담겼다. 하지만 가뜩이나 직항 배편이 없어 한국인들이 오기 어려운 데다,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서 한동안 섬 주민들이 즐거워하기는 난망해 보여 안타깝다.
1971년 무령왕 무덤 발굴 때 일본도 흥분
가카라시마에서는 해마다 무령왕 탄생 축제가 열린다. [사진 충청남도 홈페이지]
섬 사람들이 믿는 전설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전한다.
“6월 1일에 임신한 부인이 가수리군(加須利君)의 말처럼, 축자(筑紫·츠쿠시)의 각라도(各羅島·카라노시마)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도군(島君)이라 하였다. 이에 군군(軍君)이 곧 배에 태워 도군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가 곧 무령왕(武寧王)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주도(主島)라 불렀다.” (웅략 5년 461년 6월)
가수리군은 개로왕을 말하며, 군군은 그의 동생 곤지(昆支)를 일컫는다.
『일본서기』의 같은 해 4월, 그리고 3년 전인 458년 7월 기사를 보면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 사연인즉슨 이러하다. 백제의 개로왕이 즉위하자 일본의 웅략천황은 사신을 보내 축하하면서 왕비 감인 미녀를 청한다. 이에 개로왕은 모니부인의 딸 지진원(池津媛)을 단장해 보낸다. 그러나 지진원은 입궁하기 앞서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다. 천황은 대로해 지진원과 정부를 불태워 죽인다. 소식을 들은 개로왕이 천황을 달래기 위해 아우 곤지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을 보필하라고 명하자, 곤지는 대가로 왕의 부인을 청한다. 이에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주며 말한다.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됐다. 만일 가는 길에 출산하면 어디에 있든 배 한 척에 실어 속히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그렇게 해서 곤지 일행이 일본으로 향하던 중 부인이 산통이 오는 바람에 출산을 위해 기착한 곳이 가카라시마 섬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갈 때 쓰시마(對馬)-이키(壹岐)-가카라시마-규슈를 잇는 해상로를 주로 이용했다는 사실이 문헌에 많이 전한다. 2013년 규슈국립박물관 측이 한·일 역사학자들과 함께 백제-왜를 잇는 바닷길을 검증한 결과 문헌 기록이 맞음을 알 수 있었다. 가카라시마를 방문한 한국인들도 해안동굴 앞 해변에 한국산 쓰레기가 많이 쌓여있음을 증언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버려진 쓰레기가 조류를 타고 흘러온 것이다.
일본 가카라시마 섬의 해안 동굴에 놓인 무령왕 탄생지 표지판. [사진 충청남도 홈페이지]
무령왕의 무덤이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되자 일본 역시 한국만큼이나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일본 언론들이 발굴 직후 날아와 현장 답사기를 싣는가 하면 이듬해까지 무령왕릉의 의미를 찾는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무령왕릉에서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고 표기된 지석이 발견됐기에 더욱 그랬다. 『일본서기』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사마’는 무령왕의 어릴 적 이름인데, 일본어로 섬을 뜻하는 ‘시마(しま)’를 음차하는 과정에서 사마로 바뀌었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즉 사마왕이란 섬에서 태어난 왕, 도왕(島王)을 말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믿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왕이 동생에게 자기 자식을 임신한 부인을 준다는 점이다. 인륜을 생각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긴 하나, 그것이 지나치게 현대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는 게 사실이다. 그 당시 한국과 일본에서는 왕이 왕비(중 하나)를 총신에게 하사하는 경우도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는 연구도 있다.
더욱 믿기 어려운 것은 『일본서기』의 기사에 연도의 오차가 있는 까닭이다.
『일본서기』는 458년 7월 기사에서 백제 사료인 『백제신찬(百濟新撰)』을 인용하면서, 기사년에 백제가 여인을 천황에 바쳤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기사년이 429년(백제 비유왕 3년)이라고 하면, 웅략천황 시대가 될 수 없고 인덕천황 시대에 해당된다. 또 60년 후인 489년이라고 한다면 백제의 동성왕 시대로 개로왕 때가 아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일본서기』 응신천황 39년(428) 때의 일을 서기 편찬자가 혼동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일본서기』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39년 봄 2월에 백제 직지왕이 그 누이동생 신제도원(新齊都媛)을 보내 조정을 보필하도록 했다. 신제도원은 7인의 부녀를 데리고 왔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하지만 이것도 응신천황 25년 기사에서 “직지왕이 죽고 구이신왕이 즉위했다”고 기록한 것과 모순된다. 이런 착오들이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령왕이 일본 태생이 아님을 결정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한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돼있지만, 이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중요한,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만큼 백제와 왜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인적 교류도 활발했다는 점이다. 무령왕의 관이 ‘고마야키’라 불리는 일본 규슈산 금송으로 만들어진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서울대 권오영 교수는 그 의미를 이렇게 분석한다.
무령왕 아들 성왕 땐 일본에 불교 전수도
“고대 일본인은 석관을 선호했고 목관을 사용하더라도 백제 것과는 달랐다. 따라서 무령왕 부부의 목관이 일본에서 제작되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통나무나 약간의 가공을 거친 상태로 백제로 들어왔을 것이다. 목관을 제작하려면 운반 후에도 건조, 가공, 못과 관 고리의 제작, 옻칠, 비단 제작 등 여로 공정이 필요하므로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 따라서 당시 백제에서는 일본에서 금송을 입수하여 관리하는 체계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령왕릉』)
한·일 교역 시스템이 이미 갖춰져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시스템을 통해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 때 오늘날 일본인들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있는 불교가 일본에 전해지는 것이다.
백제가 멸망했을 때 백제 유민들이 ‘같은 민족’인 신라 대신 일본 망명을 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들에게 신라는 나라를 빼앗은 원수 아니었을까. 대신 수많은 백제계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일본 열도가 오히려 조상의 문화를 유지할 수있는 최상의 공간이었을 터다. 일본으로서도 백제 유민들을 통해 보다 많은 선진 문물을 흡수할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윈윈이었던 것이다.
민족주의란 19세기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런 민족주의 잣대를 고대사회에 들이대서는 곤란하다. 자의건 타의건 민족주의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는 신라와 백제가 한민족이고 일본은 이민족에 불과하지만, 백제인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신라 지배 하에 남은 백제인들보다 바다를 건너간 백제인들이 오히려 일본의 주류사회에 보다 잘 편입할 수 있었고, 8세기 말엽에는 백제계 천황까지 나오게 된다.
그렇다고 우쭐할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다면 그것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부 소아병적 일본인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자랑스러워 하고 공유해야 할 소중한 백제의 역사와 문명이다. 요즘의 한·일 갈등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이기도 하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548672?cloc=joongang|msearch|repor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