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요화(妖花) 자운선(紫雲仙)
무신이 정권을 잡으면 거사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어떻든 간에
곧 권세를 부리고 사치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 상례이거니와 최충헌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높은 관직이란 모조리 독차지하다시피 했으며
궁궐을 무색케 하는 대저택을 장만하고 많은 처첩을 거느리게 되었다.
최충헌이 거느리는 여러 첩 중에 자운선이란 여인이 있었다.
자운선은 원래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의 계집이었다.
이의민이 아직 조야를 주름잡고 있을 때 아비의 세도를 믿고
이지영은 전국 각처를 돌아다니며 갖은 행패를 다 부렸다.
☆☆☆
한 번은 그가 삭방도(朔方道) 국경지대를 돌아다닐 때였다.
압록강변 조그만 마을을 지나가자니까 한 집으로 젊은 처녀가 들어갔다.
그 처녀를 보자 지영은 눈이 번쩍했다.
서울서도 보기 드물게 어여쁜 처녀였기 때문이다.
원래 색을 좋아하는 지영이었다.
그냥 보아 넘길 까닭이 없었다.
"저 집에 잠깐 들려가자."
이렇게 말하고 그 집으로 다가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아까 그 처녀가 다시 나오며
"어디서 오시는 손님들이세요?" 하고 묻는다.
백설같이 흰 살결, 검게 빛나는 두 눈, 붉게 물들인 듯한 입술,
삼단같이 늘어뜨린 머리채, 보면 볼수록 아리따운 처녀였다.
지영은 넋을 잃고 멍하니 그 처녀를 바라보다가 은근히 딴 생각도 있고 해서
"지나가는 나그넨데 잠시 쉬어 갈까 해서 그러오." 이렇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누추한 곳이지만 어서 들어오시어요."
처녀는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띠우며 지영 일행을 기꺼이 맞아 들였다.
자리를 잡고 앉자 지영은 벌써 슬며시 수작을 건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 "자운선이라고 하옵니다."
"자운선이라? 좋은 이름인데 그래 넌 어떠한 재주가 있지?"
"이런 시골구석에서 자란 몸인데 무슨 재주가 있겠어요?"
자운선은 고개를 외로 꼬며 수줍어한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흘려 보내는 추파에는 요염한 기운이 가득했다.
"아무리 그러기로 한 가지 재주쯤 있을 게 아니냐?"
그제야 자운선은 겨우 고개를 들며
"재주라고 할 것까지는 없사오나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를 조금 배워 흉내는 낼 줄 아옵니다."
"뭐라구? 춤과 노래를 할 줄 안다? 어디 구경 좀 해보자."
지영이 이렇게 재촉하자 자운선은 영리한 눈초리를 살짝 보내며
"그런 구경은 언제라고 하실 수 있지 않아요.
먼길에 시장하실 텐데 저녁이나 먼저 드셔야지요."
그리고는 부엌으로 나가서 부모들과 분주히 움직이더니 저녁상을 정갈하게 차려 들어왔다.
서울서 고량진미에 식상(食傷)이던 이지영이었지만
산나물과 민물고기로 정성껏 차린 음식에는 그런 대로 별다른 구미가 동했다.
이 고장 특산이라는 술도 좋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이지영의 마음은 다시 자운선에게로 쏠렸다.
"아까 노래와 춤을 구경시켜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어서 보여 주어야지."
그러니까 자운선은 공손히 절을 하더니 사뿐히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은반에 옥을 굴리는 듯한 소리라는 말이 있지만 자운선의 노랫소리가 꼭 그러했다.
그리고 춤은 그대로 꽃밭에 너울거리는 호접이었다.
이지영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
그날 밤 여러 가지 말로 자운선과 그의 부모를 달래어 하룻밤의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
☆☆☆
얼마 후 서울로 돌아올 때 이지영은 자운선을 데리고 돌아왔다.
비록 시골구석에서 성장한 몸이지만 자운선은 천성이 요염한 가인이었던 모양이다.
며칠이 안 가서 여러 처첩을 물리치고 이지영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이지영은 자운선을 위해선 어떤 일도 아끼지 않았다.
으리으리한 별장을 짓고 그곳에서 날마다 유흥으로 날을 보낼 뿐만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문무백관들을 불러모아 자운선의 자태와 가무를 자랑했다.
한 번은 여러 무관들을 모아놓고 술과 음식을 질탕히 대접한 다음
자랑거리인 자운선의 춤과 노래를 구경시켜 준 일이 있었다.
이때 최충헌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풍악소리와 함께 자운선이 나타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하자
최충헌은 눈이 번쩍 띄었다.
(세상에 저렇게 요염한 여자가 다시 있을까?
저런 여자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부귀영화도 헌신짝 같이 버리겠다.)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지만 이내 부질없는 욕심이라고 스스로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개 미미한 무관의 몸으로 당대 세도가의 애첩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허황된 꿈이었다.
☆☆☆
그러나 그 허황된 꿈이 뜻밖에도 이루어질 날이 왔다.
그가 이의민을 죽이고 마침내 이지영까지 죽이게 되자
자운선은 저절로 그의 손에 굴러 들어왔던 것이다.
"너는 나를 알겠느냐?"
처음에는 이지영의 거처에서 자운선을 잡았을 때
최충헌은 가슴을 두군거리며 이렇게 물어보았다.
"어찌 장군을 못 알아 뵙겠어요."
처음에는 피비린내 나는 난투극에
제 신세가 어찌 될는지 알 수 없어 오들오들 떨기만 하던 자운선이었지만
최충헌이 묻는 말을 듣자 이내 그 심중을 간파했다.
그래서 별로 기억에 남지도 않았지만 어림치고 이렇게 대답해 두었다.
다음에 최충헌이 하는 말을 따라 적당히 응수할 생각이었다.
최충헌은 그 그물에 제물로 걸려들었다.
"빈말을 하면 못써. 이지영의 집에서 술잔치를 했을 때 내가 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단 말이지?"
"이를 말씀이어요?
그때부터 장군을 사모하는 마음에 춤을 추면서도 장군께 눈길을 보내지 않았사와요?"
실상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고 최충헌은 생각했다.
자운선은 원래 누구에게나 교태를 부리는 여자였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한 두번 씩 추파를 던져두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렇게 하면 어리석은 남자들은 자기에게 마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좋아할 것이며
그렇게 환심을 사두면 만일의 경우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첫눈에 나를 사모하게 됐다? 그야말로 천생연분(天生緣分)이로군.)
한낱 무부(武夫)로 여자와의 접촉이 별로 없던 최충헌은 자운선의 교태에 완전히 농락되었다.
벌써 오십을 바라보는 초로의 몸인 것도 잊어버리고 젊은이 같은 정열을 불태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 집 깊숙이 자운선을 들여앉히고
애첩이 하자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다 들어주었다.
최충헌이 사상에 유래가 드물게 극도의 사치를 한 이면에는
자운선의 힘이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