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01 연중8주간 화 – 133위 075° 고시수 야고보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133위 075° ‘하느님의 종’ 고시수 야고보
이름 : 고시수 야고보,
‘하느님의 종’ 고의진 요셉 父, ‘하느님의 종’ 문 막달레나 媤父, 여사울성지 고재성 안당(1929~2017) 曾祖
출생 : 1817년, 신평 원머리
순교 : 1866년, 교수, 수원
고시수 야고보는 충청도 홍주 원머리(현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매산리) 사람으로, 소년 시절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고향에서는 올바르게 교리를 실천할 수 없게 되자 가족들과 함께 목천 소학골 교우촌(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살았다.[1]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고의진 요셉은 그의 아들이고,[2] 죽산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문 막달레나는 고의진 요셉의 아내이며 고시수 야고보의 며느리였다.[2.1]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아들 고의진 요셉이 체포되어 공주로 끌려가자, 그의 아버지 고시수 야고보는 남은 가족들과 함께 더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살았다. 이때 며느리 문 막달레나는 겨울의 산속에서 유복자를 출산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고시수 야고보는 그의 피신 소식을 듣고 산속까지 쫓아온 죽산 포졸들에게 며느리 문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죽산 도호부로 압송되었다.
죽산 도호부로 압송된 고시수 야고보는 이미 주님을 위해 순교할 마음을 갖고 있었으므로 조금도 약해진 마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도호부에서도 특별한 형벌을 가하지 않고 옥에 가두어 두었다. 이후 그는 담당 관원이 바뀌면서 수원 유수부로 이송되었고, 그곳으로 끌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3]
[註]__________
[1] 고길천(재호, 바르나바), 「사기점골 고제환의 비문」(필사본),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소장, 2006년 3월. 고길천(재호)은 고의진 요셉의 차남인 고제환의 후손이라고 한다.
[2] 『치명일기』, 정리 번호 512번; 『병인치명사적』, 1권, 62면; 5권, 2면; 6권, 2면.
[2.1] 고의진 요셉(차기진, ‘성거산성지 자료집’)
병인년에 공주에서 순교한 소학골 출신의 고 요셉도 주목할 만한 순교자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교회 순교록에서 그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들을 발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치명일기』, 정리 번호 512번
· 고 요셉 : 목천 소학골 거주, 배문호와 함께 공주 치명(교수, 1866년 11월 8일).
② 『병인치명사적』, 1권 62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52번(목격자 : 배 안드레아(증언자 안드레아의 삼촌), 증언자 : 진산 저귀골 거주 배 안드레아)
· 고 요셉 : 목천 거주, 공주 치명
③ 『병인치명사적』, 6권 2쪽(전언자 : 전주 대성리 거주 배경집 베드로)
· 고 요셉 : 목천 소학골 거주, 순교 원의 간직해 옴, 1866년 10월 8일 배문호와 함께 체포되어 목천 문초, 공주 이수 후 교수 치명, 1866년 11월 8일, 강치운(청주 절골 거주)이 네 사람(배문호 베드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고 요셉)의 시체를 찾아 묻음.
현재 고씨 집안에서는 1866년 11월 8일 공주에서 순교한 고 요셉을 ‘고의진(요셉)’으로 보고 있다. 또 순교자의 부친은 현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매산리(원머리)에서 신앙을 받아들인 ‘고시수(야고보)’이고, 순교자 고 요셉의 아내는 ‘해주 최씨’였다고 한다. 고 요셉의 아들로는 제영·제환·제화 3형제가 있었는데, 부친 순교 후 목천 소학골을 떠나 제영·제화 가족은 천안 광덕면 부언골(즉 부원골[富源],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리 산194-1 일원)로, 둘째 제환 가족은 공주 유구면의 사기정(장)골(현 공주시 유구읍 명곡리 1구 서재維鴻공소 안쪽)[2.2]로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2.3] 부원골과 사기점골은 박해 후 공주 본당의 공소로 설정된 교우촌이다.
한편 교회 순교록에는 내포 출신으로 공주·수원·죽산에서 순교한 또 다른 고씨 가족 3명이 기록되어 있다.
① 고(의진) 요셉([고시수] 야고보의 아들) : 1866년 공주 순교(교수), 24세.
② 고(시수) 야고보 : 내포 사람, 산곡 이주, 1867년 죽산 체포 수원 순교(교수), 50세.
③ 문 막달레나([고의진] 요셉의 아내) : 시아버지([고시수] 야고보)와 함께 체포됨, 1867년 죽산 순교(교수), 19세
<이상 증언자 : 천안 부언(원)골 사는 고 필립보, 38세>[2.4]
여기에서 앞서 언급한 ‘소학골 출신의 공주 순교자 고 요셉’과 ‘내포 출신의 공주 순교자 고(의진) 요셉’은 일단 다른 순교자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둘의 거주지가 다르고, 증언자가 다르며, 아내(해주 최씨와 문 막달레나)가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학골 출신 고 요셉의 아들들(첫째와 셋째)이 훗날 천안 부원골로 이주해 살았다는 집안의 전승이 있고, 내포 출신의 고 요셉을 증언한 고 필립보도 같은 부원골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소학골 출신 고 요셉의 순교 당시 나이는 동료 배문호의 나이(24세)와 비슷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내포 출신 고 요셉의 나이(24세)와도 거의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두 요셉 순교자를 동일 인물로 볼 수도 있고, 같은 집안의 다른 신자로 거주지가 소학골과 내포 지역으로 달랐다고 볼 수도 있다. 둘째, 동일 인물로 본다면 소학골 출신 순교자 고 요셉의 집안 전승과 교회 순교록의 증언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2.2] 사기점골공소: 공주시 유구읍 명곡리 113~509번지까지 이르는 ‘사기장골길’ 마을에 있다. 1883년 두세 신부에 의해 설립된 공소이다. 명우산을 사이에 두고 동편에 요골공소, 서편에 사기점골공소가 있다. 사기점골공소는 폐쇄 상태이고 강당은 종만 달린 서너 칸 낡은 구옥이다. 1899년에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이곳을 방문하고 성사를 준 사실이 있다.
[2.3] 고길천(재호 바르나바) 제공, <사기점골 고제환의 비문>, 성거산 성지 소장, 2006년 3월. 고길천(재호)은 고제환의 후손이다. 다만, 위의 글에서 순교자 고 요셉의 생몰 연도를 1800~1866년으로 설명한 것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 요셉의 동료인 배문호(베드로)의 순교 당시 나이가 24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4] 『치명일기』, 정리 번호 385번, 426번, 474번; 『병인치명사적』, 23권 42쪽.
[3] 『치명일기』, 정리 번호 385번; 『병인치명사적』, 23권, 42면, 고 필립보의 증언. 증언자 고 필립보는 고시수 야고보의 아들로, 증언 당시에는 천안 부원골(현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에 거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