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아기.박중환.조신행,김원성 이폐몽.정종호.정인혁.변득중김종교.이소사. 그 밖의 순교자들
심아기 : 1783〜1801, 세례명 바르바라, 포도청에서 매맞아 순교
박중환 : 1768〜1801, 세례명은 미상, 포도청에서 매맞아 순교
조신행 : ?,•시 801. 세례명은 미상, 포도청에서 매맞아 순교
김원성 : 7-1801, 세례명은 미상, 양근에서 순교
이께몽 : 7-1801, 세례명은 미상, 양근에서 순교
정종호 : ?~1801, 세례명은 미상, 여주에서 참수
점인혁 : ?~1801, 세례명 타데오. 서소문 밖에서 참수
변득중 : 7-1802, 세례명은 미상, 서소문 밖에서 참수
김종교 : 1753〜1801, 세례명 프란치스코, 서소문 밖에서 참수
이소사 : ?~1801, 세례명은 미상. 여주에서 참수
어떻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던 심아기와 박중환
▲ 오빠 심낙훈에게 교리를배워 입교한 심아기는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어머니를 안심 시킨뒤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끌려갔다.
심아기(沈阿只, 바르바라)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오빠 심낙훈(沈樂蕉)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녀는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성인 전을 읽고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하여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기로 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 오빠가 체포되자, 심아기는 얼마 안 있어 포졸들이 자신을 찾아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포졸들이 득이 닥치자. 심아기는 어머니에게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제가 하느님의 성스러운 뜻에 순종하도록 놓아두십시오”라고 말한 뒤, 스스로 포졸들에게 나아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서울로 끌려갔다.
심아기는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20여 일 동안 모진 형벌을 받았다. 그 무렵 오빠 심낙 훈은 마음이 약해져 지방으로 유배되었고, 심 아기는 어떤 형벌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다가 1801년 4월 초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포도청 에서 매맞아 순교하였다.
광주에 살던 박중환(朴重煥)은 심아기보다 일찍 심낙훈과 함께 체포되어 그곳에서 고문을 당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다가 1801년 4월 18일(양 5월 30일) 포도청에서 매맞아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황사영 집에서 열리는 ‘육회’ 모임에 참석한 조신행
조신행(趙愼行)은 서울 도저동에 살면서 황사영 • 이재신과 친하게 지냈다. 명도회 회원인 그는 황사영 집에서 열리는 육회(六會)모임에 이재신과 함께 참석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는데, 황사영도 그를 자기와 함께 천주교를 믿는 신자 중 한 사람이라고 진술하였다. 황사영의 동서 홍재영도 포도청 신문에서 “도저동에 사는 조신행과 이재신 역시 천주교를 믿는 사람 들이어서 함께 따라가 강학을 하였으며, 조신행은 1800년 10월경 이경도의 집에서 만났다.”고 진술하였다. 또 손경윤의 동생 경욱은 도저동 사는 조신행, 최태산, 정동 사는 윤수재, 충청도 사는 이순명, 홍계송, 석정동 사는 남필용,제관득, 고광성 등이 평소 황사영의 집을 왕래하며 교리를 강습하던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제관득 역시 황사영의 집을 왕래하는 사람으로 조신행, 홍재영, 남송로, 이자현, 이순명, 최붕운,한대익 등을 지목하였는데, 이러한 사실로 보아 그는 황사영 등과함께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매맞아 순교하였다.
정약종 윤유일과 교류한 김원성
김원성은 경기도 양평군 저탄(蹄灘, 지여을)에 살았다. 현재 저탄은 팔당 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김원성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양반 집안 출신임은 분명하다. 정약종의 집에 살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된 임대인은 “양근 한강포 윤 생원과 양근 저탄 김 생원이 (정약종 집에) 오갔습니다”라고 하였는데,이 진술에서 윤 생원은 윤유일일 것이고 김 생원은 김원성일 것이다. 따라서 김원성은 정약종이나 윤유일과 교류하며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였음에 틀림없다.
김원성은 1801년 4월 20일에 체포되어 양근 옥에 갇혔다가 5월에 순교하였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마흔다섯 내지 쉰 살이었다.
딸들도 모두 동정녀였던 이괘몽
이괘몽은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백석리(백석골,배석골)에 살았다. 현재는 대감리와 백석리가 합쳐져 대석리로 되었는데,백석리는 권일신, 철신 형제와 권상문,윤유일, 유오 형제 등이 살았던 한강개와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이괘몽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양반 출신인 것은 분명하다. 그는 그의 형 재몽과 함께 1801년 4월 20일 체포되어 양근 옥에 갇혔다. 그리고 누구의 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스물다섯내지 서른 살쯤 되는 딸 둘도 같은 날 체포되어 양근 옥에 갇혔다. 딸들은 모두 동정녀였다고 한다. 이들 네 명은 많은 고문을 당하였지만, 결코 배교하지 않았으며, 5월에 매를 맞아 순교하거나 목 잘려 순교하였다. 그때 이재몽의 나이 쉰다섯이었고, 괘몽은 쉰 살 가량이었다.
온 가족이 신자였던 정종호
정종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온 가족이 신자였다는 것과 이중배, 원경도와 함께 1800년 4월 부활 대축일을 성대하게 지내다가 체포되었고, 1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이듬해 서울로 압송된 뒤 사형선고를 받고 이중배와 같이 여주에서 3월 13일(양 4월 25일) 순교하였다는 것뿐이다.
주문모 신부를 보좌한 정인혁
정인혁(鄧仁赫,타데오)은 천주교가 전래된지 얼마 안 되어 교리를 배워 영세한 초기 신자였다.
그는 1791년 신해 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풀려 난 적이 있는데. 이때 풀려 난 이유는 배교해서가 아니라 훈방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1794년에 백상옥, 최필제 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정인혁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늘 주 신부를 보좌하며 신앙생활을 하였고, 신자들의 모임에서 열심히 봉사하였으며, 교회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그는 손경윤과 현계흠을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이들 외에 정인혁과 가까이 지냈던 신자들은 김범우의 동생인 이우와 현우 형제. 그리고 초대 평신도 총회장이었던 최창현 등이었다.
1801년 신해 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된 정인혁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으니 다른 마음이 없다”며 신앙을 고백하였고, 1801년 4월 2일(양 5월 14일)서 소문 밖에
서 참수되었다.
배교를 취소한 변득중
변득중(邊得中)은 본디 양민으로 서울 대묘동에서 살았다. 1785년 명례방에 사는 김범우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최창현 등과 오가며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몇 해 동안 신앙생활에 전심하지 못하고 자주 십계명을 범해 신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러다가 장덕유와 이합규의 설득으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로 하층 계급의 사람들을 모아 밤낮으로 교리를 강습하였다. 그리고 남대문 밖에 있던 손인원의 약방에서 처음으로 황사영을 만난 뒤부터는 그와 아주 친밀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변득중은 덜컥 겁이 나 집을 팔고 공북문 밖 원동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3월 17일 체포되었다.
포도청에 체포된 그는 황사영을 반드시 잡아들이겠다고 속이고 풀려 나왔다. 그리고 황사영이 도망친 곳을 염탐하던 중 말죽거리 지천동의 집에서 한대일과 대열을 만나 그들을 고발하였고. 또 천주교 신자를 염탐한다는 핑계로 남의 재물과 부인을 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황사영을 체포하지 못해 다시 수감되었다.
형조로 이송되어 신문을 받을 때에도 그는 다시 한번 살아나갈 목적으로 잠시 거짓 배교를 하였다. 그러나 2차 신문에서 즉시 배교를 취소하고 남의 재물과 부인을 범한 죄를 뉘우쳤다. 그리고 자신이 천주교를 믿은 것은 그것이 바른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며, 형벌을 받고 죽을지언정 결코 배교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변득중은 천주교를 믿은 죄 외에 남의 재물과 부인을 범한 죄가 더해져 사형 판결을 받고 12월 26일(양 1802년 1월 29일)서 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지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놀라운 사람
김종교(金宗敎,프란치스코)는 일명 ‘치회’라고도 하며, 의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김범우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으며, 최필공, 최창현, 김종순, 최인길, 최인철 등과 교유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김종교는 성품이 좀 쌀쌀하고 호감이 가지 않는 얼굴에 숫기가 없고. 게다가 집이 몹시 가난하여 교회의 큰 인물들과는 별로 접촉이 없었다. 하지만 차분하게 공부하는 데 취미가 있어서, 이벽은 그를 매우 존중하여 자주 “치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놀라운 사람”이라고말하곤 하였다.
그는 1795년 포도청에 체포되었으나. 배교하고 곧 풀려났다. 그러나 마음속에 깊이 박힌 신앙심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던 그는. 최인길의 집으로 직접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 교리를 배운 뒤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최인철, 최필공, 최필세, 황사영, 정광수, 최해두, 홍정호, 이현 등과 교류하며 신앙 생활을 계속하였다.
1800년 5월 신자들이 5년 전에 배교한 일로 꾸짖으며 비방하자, 그는 약간 심기가 불편하여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최필공이 체포되었다는 말에 겁을 먹고 양천 김 좌수의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었다. 김종교는 포도청에서 형벌을 피할 목적으로 잠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형조에서는 배교한다는 말을 모두 취소하고 자신이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은 것은 천주교를 바른 진리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8월 27일(양 10월 4일) 홍필주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여주에서 순교한 이소사
이소사(李召史)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이소사는 완산(完山)이씨로 젊어서 과부가 되었고, 여주 읍내에서 살다가 체포되어 그녀의 친척중 한 사람과 함께 여주에서 목 잘려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