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원(任鎭元, 1644~1709) 자는 화보(和甫), 본관은 풍천(豊川). 전라도 관찰사 규(奎)의 아들이다.
1681년(숙종7)에 처음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고 이후 개령 현감(開寧縣監)과 여산 부사(礪山府使)를 거쳐 영월 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이곳에서 날뛰던 도둑떼를 소탕하여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 그 뒤 간성 군수로 나갔다가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도곡의 어머니는 고양 군수(高陽郡守) 정창징(鄭昌徵)의 장녀이고 둘째 딸은 임진원의 부인이어서, 임진원은 도곡의 이모부가 된다.
승정원일기 381책 (탈초본 20책) 숙종 24년(1698) 10월 9일 경술 3/23 기사
慶尙都事書目, 開寧縣監任鎭元, 災傷差錯, 罷黜事。
*차착(差錯) : 순서가 틀리고 앞뒤가 맞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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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州牧使任公墓碣銘 幷序
이의현
公諱鎭元。字和甫。系出豐川。豐川之任。爲時顯望。曾ⓟ祖兗承旨。祖俊伯僉正。考奎全羅觀察使。觀察公娶康靖王後李茂立女。生公於崇禎甲申。公旣生長世家。觀察公又富於文藝。所交游盡一時賢雋。薰陶灌沃。固有異於人者。而卒無所成名。年三十八。西河李文簡公薦爲童蒙敎官。陞主司贍內資二簿。以例將試調外邑。亡何。連失怙恃。仍値世道晦塞。屛居不求仕。姓名絶除目者。七八年。甲戌更化。始被檢擬。由司圃別提。出監開寧縣。善於賙賑。一境無捐瘠。尤飭厲戎政。鍛敹戈甲。罔有不弔。水陸使前後上其績。賞階通政。遞拜五衛將。又出礪山府使。時癘疫日熾。ⓟ人死亡且盡。軍額多缺。不得充補。猾吏從而舞弄。公至。親行民間。審其死是實直與成案。以塞奸竇。陰察富而逃役者。盡知其主名起居。一汰定之。流弊悉滌。按臣心服其能。至移牒嘉奬。旣還。又以衛將除原州牧使。臺官言其驟。公議非之。遞臺官。然公竟不赴。是時嶺東西。盜賊大起。其自名爲獨公子者尤梟桀。連結吏民。簒取繫囚。守令莫能禽制。勢益張。朝廷患之。以寧越在其衝要。選公爲府使。兼討捕任以治之。公不動聲色。捕得獨公子者斬之。前跪脅從者饋酒食。敎諭解散。使各復業。是後遂帖然無事。府連二歲飢ⓟ荒。捐俸得米千斛以與民。民甚悅。按臣列其功課。會豪勢家潛斫禁木。爲姦利覺。其人大恐。圖解不能得。乃嗾其黨入臺者。誣以過犯。傅致獄。按臣爲白其狀。府人士奔走寃訟。及査事。皆無實。公得淸脫。後民爲之立碑。行過必拜。仍名拜碑云。復由衛將。出杆城郡守。又管荒政。益刻意救濟。晨夕弗懈。溝壑者盡復廬。頌聲方興。而竟用勞瘁。以丙戌七月十日卒。病時啽囈皆賑事。聞者感歎。御史壹擧以聞。且曰。其憂國愛民之誠。今古所稀。上特下恩旨。賜帛以褒。而公不及見矣。公有二媲。前夫人迎日鄭氏。高陽郡守昌徵ⓟ
之女。右議政維城之孫。外祖洪忠正公翼漢。內外協美。閫則克備。早圽無子。再娶鄭后望女。亦系迎日而有婦道。男長由夏。次宗夏。次述生員。女適柳光烈,兪峻基,申命集。由夏男翼周生員。女適察訪金壽鏶。述男錫周。公葬鐵原松內負壬之原。與後夫人同穴。前夫人別葬。將以歲月祔公墓云。前夫人。寔余先妣之妹也。以此余習知公有素。公天資厚善。任眞無機變。卽古所稱誠長者其人也。至其活民之政。懇惻至到。尤非流俗虗憍者比倫。嗚呼。是可銘也已。銘曰。
東州之土。山回水護。有崇若斧。斯其爲古良吏之墓。
공은 휘가 진원(鎭元), 자가 화보(和甫)로 계통이 풍천(豐川)에서 나왔는데, 풍천 임씨(豐川任氏)는 당대의 현달한 가문이다. 증조 연(兗)은 승지이고 조고 준백(俊伯)은 첨정(僉正)이고 선고 규(奎)는 전라도 관찰사이다. 관찰공이 강정대왕(康靖大王 성종)의 후손 이무립(李茂立)의 딸에게 장가들어 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22)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이미 세가(世家)에서 생장하였고 관찰공은 또 문예가 풍부하여 교유하는 분들이 모두 당대의 명현과 준걸들이었다. 공은 이에 훈도되고 물들어서 진실로 보통사람보다 뛰어났으나, 끝내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이룬 바가 없었다.
나이 38세에 서하(西河) 이 문간공(李文簡公)이 천거하여 동몽교관이 되고, 승진하여 사섬시와 내자시의 주부가 되었다.
준례에 따라 장차 외지의 고을로 조용(調用)하게 되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연달아 부모를 잃었고 이어서 세도(世道)가 어두워지고 막힐 때를 만나서, 물러나 시골에 살며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벼슬을 제수하는 목록에서 성명(姓名)이 끊어진 것이 7~8년이었다.
갑술년(1694, 숙종20) 다시 교화가 펴지자, 처음으로 의망(擬望)을 입어 사포서 별제로 있다가 개령 현감(開寧縣監)으로 나갔는데, 백성들을 잘 구휼하여 온 경내에 수척한 자가 없었으며, 특히 군정(軍政)을 삼가고 신칙하며 창과 갑옷을 잘 단련하여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수사와 병사가 전후로 그 공적을 올려 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이르렀다.
체직하여 오위장에 제수되었으며, 또다시 여산 부사(礪山府使)로 나갔는데, 이때 염병이 날로 치성하여 백성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다. 그래서 군액(軍額 병사들의 수효)에 결원이 많았으나 보충할 수가 없으니, 교활한 아전들이 이 틈을 타서 법조문을 이용하여 농간을 부렸다.
공은 부임하자, 직접 민간을 순시하여 죽은 것이 사실인가를 살피고는 즉시 성안(成案)을 주어 간사한 아전들의 불법행위를 근절하였다. 그리고 부유하면서도 병역을 기피하는 자들을 은밀히 살펴 그 주인의 이름과 기거동작을 모두 알아서 끝내 가려내어 부역을 정하니, 오랫동안 내려오던 병폐가 모두 사라졌다.
관찰사가 마음속으로 공의 재능에 탄복한 나머지 장계를 올려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공은 임지에서 돌아온 다음, 또다시 위장(衛將)으로 있다가 원주 목사(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대관(臺官)이 너무 승진이 빠르다고 하자, 공론이 대관을 그르다 하여 대관을 교체시켰으나 공은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영동(嶺東)과 영서(嶺西)에 도적 떼가 크게 일어났는데, 이 가운데 스스로 독공자(獨公子)라고 칭하는 자가 특별히 용맹하고 뛰어나서 관리와 백성들과 결탁하여 죄수들을 탈취해 갔으나, 수령들이 그를 사로잡아 제압하지 못하였다. 그의 형세가 더욱 떨쳐지니, 조정에서는 이것을 걱정하였다.
영월(寧越)은 영동과 영서의 요충지에 있었으므로 공을 선발하여 영월 부사로 임명하고 토포사의 임무를 겸하여 도적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공은 부임한 다음 목소리와 얼굴빛을 변치 않고 독공자를 체포하여 목을 베었으며, 위협에 따라 도적이 된 자들을 앞에 꿇어앉히고, 술과 밥을 먹인 다음 가르치고 타이른 뒤에 해산시켜 각각 생업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후로는 이들 지역이 조용하여 아무 일이 없게 되었다.
영월부에는 2년을 연이어 흉년이 들었는데, 공은 봉급을 털어 1천 곡(斛)의 쌀을 사서 백성들에게 주니, 백성들이 몹시 기뻐하였다. 이에 관찰사는 공의 공적을 나열하여 보고하였다.
마침 세력가가 몰래 벌채를 금하는 나무를 베어 부정한 이익을 취하다가 발각되었는데, 그 사람은 크게 두려워하여 풀려날 길을 도모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이에 그 무리 중에 대관(臺官)으로 들어간 자를 사주하여, 공이 과오를 범하였다고 모함해서 옥사를 만들었다.
관찰사가 이 내용을 임금께 아뢰고 영월부의 인사들이 달려가 공의 억울함을 말하였는데, 일을 조사하자 모두 사실무근이었으므로 공이 깨끗이 벗어나게 되었다.
그 후 백성들은 공을 위하여 공덕비를 세우고 비 앞을 지나갈 때마다 반드시 절하여, 그 비를 ‘배비(拜碑)’라고 이름 붙였다. 공은 위장으로 있다가 다시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나갔는데, 또다시 흉년을 만나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정사를 관장함에 있어, 더욱 마음을 다해 구제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궁창에 시신이 뒹굴 뻔한 자들이 모두 다시 집으로 돌아가 칭송하는 소리가 일어났으나, 공은 끝내 과로로 쓰러져서 병술년(1706, 숙종32) 7월 10일에 별세하였다. 병환 중에 중얼거리는 말씀도 모두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이었으니, 듣는 자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어사(御史)는 이 내용을 일일이 들어 아뢰고 또 말하기를, “그의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사랑한 정성은 고금에 드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상은 특별히 은혜로운 명령을 내리고 비단을 하사하여 표창하였으나, 공은 미처 보지 못하였다.
공은 두 배위(配位)가 있었는데, 전부인(前夫人)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고양 군수(高陽郡守) 창징(昌徵)의 딸이고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녀이며, 외조는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이다. 내외가 모두 아름다워 규문의 법칙을 구비하였는데 일찍 죽고 자식이 없다. 다시 정후망(鄭后望)의 딸에게 장가드니, 부인 또한 관향이 영일이며 부도(婦道)가 있었다.
장남은 유하(由夏)이고 그 다음은 종하(宗夏)이고 그 다음 술(述)은 생원이며, 딸들은 각각 유광렬(柳光烈)ㆍ유준기(兪峻基)ㆍ신명집(申命集)에게 출가하였다. 유하의 아들 익주(翼周)는 생원이고 딸은 찰방 김수집(金壽鏶)에게 출가하였으며, 술(述)의 아들은 석주(錫周)이다.
공은 철원(鐵原)의 송내(松內)에 있는 임좌(壬坐)의 산에 장례하니 후부인(後夫人)과 한 무덤이고, 전부인은 따로 장례하였는데 장차 아무 해 아무 달에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려 한다고 한다.
전부인은 바로 나의 선비(先妣)의 매씨(妹氏)이기 때문에 나는 공을 평소 익숙히 알고 있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후덕하고 선량하고 진솔하여 임기응변으로 남을 속이는 일이 없었으니, 공은 바로 옛날의 소위 ‘진실로 장자(長者)’라는 분이다.
백성을 보살펴 살려준 정사에 이르러는 정성이 간곡하고 백성들을 측은하게 여김이 지극하여, 더더욱 유속(流俗)에 헛되이 꾸미는 자가 견줄 바가 아니니, 아, 참으로 명문(銘文)을 지을 만하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동주의 땅은 / 東州之土
산이 감싸고 물이 감돌아 흐르네 / 山回水護
도끼 모양의 무덤 있으니 / 有崇若斧
바로 옛날 양리의 무덤이라오 / 斯其爲古良吏之墓
이모부 임 간성 군수 진원 에 대한 만사〔姨叔任杆城 鎭元 挽〕
이의현
外氏凋零甚 외가(外家)의 쇠락함 매우 심하니 /
餘存有幾人 남아 있는 사람 몇 명이나 되는가 /
吾姨悲未逮 이모를 미처 못 뵈었음을 슬퍼하여 /
夫子倍相親 이모부와는 갑절이나 서로 친하였네 /
嶺嶠魂初斷 영동에서 부음이 처음 들리매 /
門闌恨轉新 집안에 한은 더욱 새롭구나 /
風姿那復見 아름다운 풍모를 어찌 다시 보겠는가 /
吏績尙稱循 치적은 아직도 순리(循吏)라고 일컬어지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