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과 결혼 얘기]
90호가 사는 마을에 대학생은 많아야 한둘에 불과하다.
그 두 명에 필자가 들었다는 것은 아직도 남다른 자부심이다.
초.중.고를 힘들게 끝내고, 대학은 넘볼 수 없다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농사일을 거들었지만 서툴렀다.
친구들이 대학생이 된 소식에 마음이 다시 동요되고 있었다.
나도 대학에 한 번 도전을!, 그러나 어림없는 생각이었다. 호구지책도 어려웠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대학생이 된 친구가 찾아왔다. 너의 학문에 대한 열의가 아깝다며 내년에 대학입학을 하라며 용기를 주었다. 학과선택에 대한 참고 서류를 놓고 떠났다. 준비한다 해도 남은 기간이 얼마 없었다. 고교 때 배우던 국.영.수.사 등 참고교재를 찾아 밤 세워 숙독했지만 분위기가 초라했다. 가족 모두 잠자는 방 윗목 호롱불 아래서 책장을 넘겼으니 말이다.
이듬해 봄, 입학시험을 보게 되었다.
대학 정문에는 당락을 기다리던 수험자와 가족들이 발들일 틈도 없이 붐비는 가운데 발표명단이 게시되고 있었다. 나는 괜한 짓을 하는 것 같다며,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친구가 소리를 치며 비집고 내게로 달려왔다. "축하한다. 합격이다. 그것도 1등이다. 입학금 전액 면제자 명단을 보라"고 했다.
순간 그것을 확인하자 친구를 얼싸안고 울었다. 남들에게는 떨어져 우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고향으로 달려가 자랑을 했더니 어머님을 비롯한 가족은 별 반응이 없었다. 좋은 소식인데 뒷바라지를 어떻게 할지 대책이 없다며 탄식의 한숨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다시 친구와 상의를 했다. 합격은 했지만 뒷 일이 너무 많아 포기하는 것으로 말을 했다. 친구는 대책을 마련했다며 자세히 들어보라고 다그쳤다.
입학금은 면제되었으니, 먹고 자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도 잘하면 해결될 것이라며 얘기를 이어갔다.
가정교사를 하면 숙식이 해결된다. 그때까지 자기가 있는 기숙사를 함께 쓰자고 했다. 너무나 고마운 친구였다.
이러한 과정과 4년의 장학금 수혜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취업이 또 문제였다.
어차피 가는 군대라면 장교에 도전하자. 어려운 경쟁을 거쳐 합격통지를 받았다.
당시 갑종장교라면 가장 힘든 군사교육인데 4계절 이상을 거쳐내면서 200명이 넘는 동기생 중에 군번 1번의 영광을 얻었다. 통상 종합성적 1번이 받는 전통이라고 했다.
임관 전 상급장군과 대령을 마주 보며 면접을 했다. 대학 전공학과를 보더니 육본 직속의 측지분야가 어떠냐고 했다. 만약 된다면 전공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다행하게도 원했던 부대에 배치받을 수 있었다.
부산 광안리 해변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부임하는 날부터 부대장이 우수한 장교를 보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장군님께 드렸다고 했다.
그날부터 모범장교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부대원은 군인군속 모두 5~6백명 수준으로, 하는 일들이 전문기술 분야라 소속원 모두가 고학력에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그 후 소대장으로 1년여 근무하던 어느 날 중대장의 호출이 있었다.
김 소위도 이제 장가갈 때가 된 것 같은데 어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 했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중대장님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친구 처제인데 부산 명문학교 졸업에 인물도 그만하면 괜찮은 것 같아 우리 김 소위가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렇게 만난 인연이 지금의 안방을 지키는 대단한 마나님이다.
둘 다 막내로 집도 가진 재산도 없이 건강한 몸하나로 신혼이 시작되었다.
당시 전기수도조차 부족했던 작은 월세집에서 시작되었으니, 고생으로 말하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 서민이 그렇게 살아왔기에 큰 불평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상으로 알고 지내 왔다.
이후 집사람의 직장은 부산, 나는 부산, 김해, 서울 등지로 전근되면서 신혼의 꿈은 연애 시절보다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부산 생활을 정리하고 대구로 와서 3번의 이사를 거쳐 지금의 수성구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벌써 40여 년이 되었다.
1남 2녀로 모두 나보다는 엄마를 많이 닮아서 키나 비주얼이 괜찮은 것을 볼 때마다 흐뭇한 마음이다.
아들도 누나와 함께 뉴욕에서 유학 당시 일본 여학생을 만나고 있었음을 늦게 알았다. 귀국 후 서울에서 자주 만나왔음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일본에 가자고 아들이 청해왔다. 사귀는 아가씨도 볼 겸 함께 가자고 했다.
집사람과 상의를 했다. 일본에 가서 그쪽 부모를 만난다는 것은 결정이 다 되어 결혼 날짜를 잡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국내에서도 아들 정도면 골라서 갈 텐데 하필이면 외국인이냐? 내키지 않으면서도 중대사라 일본 길에 나섰다.
공항에 도착하자 한 아가씨가 마중나와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호텔, 관광지, 음식점 등으로 안내를 하는 1주일 동안 예의와 범절로 보아 마음이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돈 될 분도 유명회사의 중역으로 우리를 대하는 태도나 견문이 남달라 보였다. 영어를 잘하고 있었으며 아직도 직접 대화는 영어나 일어를 서툴게라도 쓰고 있다.
이후 서울에서 결혼한 이후 손자가 나서 유치원까지는 서울에서, 다음은 동경 사돈집에 생활하는 동안 초등 6학년이 되었다. 아빠를 닮았는지 엄마 키를 능가하면서 커가는 귀엽고 든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혼 당시 며느리에게 절을 받으면서 앞으로 자주 찾아뵙지는 못할 것 같고요. 1주에 한 번 정도 안부 전화를 드려도 될까요? 했다. 그냥 지나가는 인사로 들었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약속이 이행되고 있으며, 사정으로 못 받았으면 다음 날 바로 연락을 또 받게 된다.
요즈음은 페이스타임으로 얼굴을 보면서 얘기를 나눌 수 있어 생동감과 즐거움을 더해주는 시간이다.
아! 오늘도 일요 저녁, 일본서 오는 폰 소리가 들린다. 글 작성 도중에 전화를 받았다. 며느리, 손자를 보면서 나도 어린이가 되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 만나 한평생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 많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서로 이해하고 작은 즐거움에도 만족하며 오순도순 이 나이가 되도록 살고 있음에 만족하고 있다.
커가는 자녀들의 모습을 더 오래 건강하게 지켜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첫댓글 인생행로가 지나고 보면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즐겁고 좋은 생활을 보여주시어 감사합니다. 글을 조금 더 다듬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