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사랑의 노래 '부용산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해방 이후 전남 지역에서 애창되고, 서울에서도 전남 출신들이 주로 불렀던 노래가 '부용산'이다.
그러다가 한국일보의 김성우 논설고문이 1998년 2월 14일자 신문에 '부용산 오리길에'라는
칼럼을 통해 노래가 만들어진 애절한 사연을 소개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해 2월은 공교롭게도 전남 출신의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달이다.
전남 사람들이 숨죽여 불렀던 노래가 김대중 정권의 출범과
더불어 햇빛을 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원래 '부용산'은 여수 돌산 출신의 박기동 시인이 순천 사범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1947년 벌교로 시집간 누이 박영애가 24세의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순천 도립병원에서 숨지자 벌교 부용산에 묻고 돌아와 쓴 시다.
이듬해 박 시인은 목포 항도여중으로 전근을 가
나주 남평 출신의 안성현이라는 음악 교사와 친하게 지냈다.
그 무렵 천재소녀요 문학소녀였던 김정희라는 3학년 학생이
폐결핵으로 죽어 온 학교가 슬픔에 잠겼다.
얼마 뒤 박기동의 시작 노트를 몰래 가져가 안성현이 곡을 붙인 것이 '부용산'이다.
전남 일대에서 유행하던 이 노래가 6ㆍ25를 거치면서 금지곡이 된 적은 없으나
작곡을 한 안성현이 월북을 한데다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기 때문에
전라도 사람들 스스로가 부르기를 자제했던 곡이다.
그는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조카로 전쟁 때 월북, 북한에서 공훈 예술가로 활동했다.
'부용산'이 월북자의 곡이다보니 작사자 박기동에 대한 시선도 곱지않아
결국 교사직에서 물러나 생활고를 겪다 90년대 초반 호주로 이민을 갔다.
이 노래는'복권' 후 국민 애창곡이 됐다.
가수 이동원이 음반 취입을 하고 소설과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지역 방송과 신문에서는 '부용산' 특집이 잇따랐다.
목포와 벌교에서는 서로 자기 고장의 노래라고 주장하면서
각각 '부용산 음악 발표회'를 갖는 등 한때 작은 알력이 있었다.
벌교 부용산에는 2001년 10월, 목포여고에는 2002년 4월 부용산 노래비가 세워졌다.
'부용산'의 작곡가 안성현이 지난 4월 25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북한 신문이 최근 보도했다.
이에 앞서 박기동 시인도 지병이 악화되자 귀국해 지난
2002년 5월 9일 85세로 쓸쓸하게 숨을 거뒀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그들은 저 세상으로 갔지만
'부용산'은 전라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벌교#부용산이야기
우리나라에 금지곡 보다 더 무서운 "금기곡"이 있었다.
전라도 지방, 아니, 남도에서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 왔던,
이 노래는 왜? 금기곡이 되어 쉬쉬 했는가를 알기 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바로, 빨찌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남부군의 수기를 보면, 어린 병사들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피어나지 못한채로" 이 노래를 불러주어 보냈다고 한다.
전해져 내려 오는 이야기로는,
목포 항도 중학교 교사이던 박기동 시인은
동경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서도
우리 나라 말을 가르쳐야 한다고 국어 선생을 택하였다고 한다.
벌교가 고향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고
여수 돌산도에서 한의사 아들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랐으며, 14세 어린 나이로 일본 유학을 갔다.
그는 여러 학교의 교가를 만들었는데,
벌교초등학교,중학교,벌교 상고 교가도 그가 작곡했다.
47년 사랑하던 여동생이 시집 가자마자 폐결핵으로 죽고나서,
벌교의 부용산에 묻고 와서 엉엉 울며 이 시를 지었는데,
그뒤, 바로 또,
자기의 사랑하는 애제자 김정희는
전국 문학 콩쿠르에서 시 부분에서 장원한 천재 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던,
그 수제자가 폐결핵으로 죽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당시, 그 학교에는 안성현 음악 선생이 있었는데,
그 또한 동경 제대 음악과 출신으로 뛰어난 작곡가였다.
그 노랫말을 본 안성현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감동이 일어,
이 곡을 작곡하게 되었는데,
이 노래는 우리나라 가장 슬픈 노래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래는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음악에 귀신인 우리 와이프도 처음 들어 본다고 했다.
나더러 지어내서 부르는것 아니냐고 까지 했다.
더군다나 이 곡을 작곡한 안성현 선생은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작은 어머니시다.
그 부인과 아들 딸, 남매를 두고 작은 어머니와 함께 월북을 하고 만다.
그리고 북한의 공식 발표로는 86년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고향은 나주 남평 대교리인데,
지석강 강가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 나고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노래를 작곡하여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월북 작곡가의 노래,
그리고 빨치산이 즐겨 부른 노래의 작사자는
빨갱이로 몰려 한국에서 살아 남기 어려운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던
박기동 시인은 호주로 이민을 가 살게 되었고,
최근까지 생존해 계시다가 2005년 고국에 와서 돌아 가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인이면서도 시집 한권 내지 못한 이분의 시집을 내고 싶다.>
부용산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 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장흥 부용산芙蓉山609m은
장흥군 용산면에 소재하고 있는 산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의연하다.
1897년 갑오농민전쟁 시
전봉준 장군과 쌍봉을 이루는 이방언 장군을 따르는
장흥인長興人들이 장흥 석대들 전투에 서 패한 뒤, 여기서 최후까지
항거하다 전멸당한 피맺힌 한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부처가 솟은 산이라 하여 불용산佛聳山,
약초가 많다 하여 약다산藥多山이라고도 불린다.
골짜기마다 샘이 솟아 석간의 감로수는 만병에 효험이 있다 하여
찾는 이가 많고 단풍이 고운 가을철이면 약초에서 풍긴 향기로
수명을 더한다고 전해지고 있는 신묘한 산이기도 하다.
첫댓글 부용산 노래의 숨은 이야기를 자세히 검색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느다.
부용산 노래는 별교의 부용산(196m)을 소재로 작사한 노래란 걸
알수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