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광야”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문명의 경계 너머에 있는 황폐한 장소로 결핍과 위험, 심지어 죽음의 위협이 지배하는 장소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공급과 보호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새로운 차원으로 경험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신앙의 여정을 가는 동안 통과하는 고난의 시기를 잘 표현하여 주는 메타포가 됩니다.
출애굽기 16~1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후, 광야를 거쳐 시내산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인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40년을 보냅니다(민수기 10~34장). 마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주님을 향한 마음을 준비시킵니다(마태복음 3:1).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마태복음 3:13~17).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기 이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십니다(마태복음 4:1~11). 히브리서 저자는 지금 이 땅에서 교회의 존재를 이스라엘 광야에 있었던 때에 비유합니다(히브리서 3~4장).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안식)을 향해 가는 광야에서 방황하는 백성들의 이야기라면, 지금 교회는 하늘의 안식을 맛보면서 하나님의 궁극적이면서 종말론적인 안식을 향해 가는 광야에서 방황하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마귀의 공격 중에 광야에서 보호와 공급을 받는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결국 광야는 성경 전반에 걸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입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광야를 지칭하는 하나 이상의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한 24개의 구절이 있습니다. 주로 이사야 35장과 40~45장에 등장합니다. 이 본문들은 예루살렘 함락 후 유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대상입니다. “광야”에 크게 두 가지를 묘사합니다. 하나는 “광야의 길을 예비하라 ”(이사야 40:1~5)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광야를 변화시키신다”(이사야 35:1, 6, 41:18~19, 42:11, 43:19~20, 44:3~4, 45:8, 49:8~10, 51:3, 55:10~13)입니다. 이 주제는 이사야서에 빈번히 등장합니다.
우리는 먼저 이번 시간에 “광야의 길을 예비하라”라고 말할 때 이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신약성경 사복음서 모두에 인용됩니다(마태복음 3:3, 마가복음 1:3, 누가복음 3:4, 요한복음 1:23).
우리는 이사야 40:3절이 이사야 전체를 볼 때 어떤 맥락에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1~39장은 아시리아 제국을 통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을 통해 더 큰 심판이 올 일을 예견합니다. 이사야 39장을 보면 선지자 이사야는 신흥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다윗의 혈통에서 온 사람들을 바벨론 왕의 집에 환관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사야서 39장과 40장 사이에는 적어도 117년의 간격이 있는데, 이 기간에 바벨론은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여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듭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은 불탔으며 많은 백성이 유배를 갔습니다. 다윗의 가계에서 나온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아들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본 후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땅도 없고, 나라도 없습니다. 성전이 없습니다. 왕조도 없습니다. 결국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1~39장의 내용입니다.
이런 절망과 상실이라는 맥락(이사야 1~39장) 속에서 이사야 40장은 그 절망의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강한 빛줄기처럼 희망을 말씀합니다. 회복과 구원을 말씀합니다. 1~2절을 보면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위로하라”는 말은 복수형 명령입니다. 즉, 한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이 명령을 듣는 모든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가져다주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낙담한 백성이 그의 사자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기초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도성이 더 이상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이사야 40:2). 그들의 죄가 용서되었고, 형벌은 끝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듣기를 바라는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이 용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유배 생활을 하는 백성들에게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 죄인들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음과 그 가운데 흘리신 피를 통해 얻은 용서가 놀라운 일과 같습니다. 기쁜 소식, 좋은 소식, 즉 복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복음에는 이사야 40:3~5절을 보면 용서 이상의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복음을 전파한다”라는 동사를 사용한 두 가지 중요한 본문이 있습니다. 이사야 40:9절과 이사야 52:7절입니다. 이사야 40:9절을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라고 말씀합니다. 시온은 높은 산에 올라가 두려움 없이 선포함으로써 “복음”(בשר 바사르, 소식을 전하다, 기뻐하다, 기쁜 소식을 받다)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그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40:9~10절을 보면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오시며, 그의 팔로 그의 통치를 굳건히 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오신다”입니다.
이사야 52:7~8절을 보면 “복음”(בשר)의 사자는 시온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모든 파수꾼이 함께 소리를 높이며 외칠 것이니 이는 모든 눈이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를 볼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의 왕으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의 메시지는 구원의 왕이신 하나님이 시온에 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0:5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이 왕으로 영광스럽게 돌아오실 때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입니다.
이 사실은 이사야 1~39장에 전개된 모티프의 발전입니다. 이사야 6:1절을 보면 거룩한 “왕”을 본 사람은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33:17절에서 신실한 자들의 눈은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 있는 왕을 “볼” 것입니다. 이사야 35:2절을 보면 변화를 경험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그런데 이사야 40:5절에서는 여호와가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 “모든 육체”가 그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귀환하실 때 모든 민족, 심지어 이스라엘을 억압한 민족조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일을 봅니다.
그러면 이런 맥락에서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사막에서 대로를 곧게 하라”는 명령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씀은 두 개의 평행한 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두 행 모두 복수형의 명령을 포함합니다. “(너희 모두) 준비하라... (너희 모두) 곧게 하라”. 두 행의 명령은 하나님을 위한 길을 대상으로 합니다. “여호와의 길... 우리 하나님을 위한 대로”. 마지막으로 두 행 모두 그러한 행동이 일어날 장소를 명시합니다. “광야에서... 사막에서”.
먼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곧게 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광야”(밋바르), “사막”(아라바)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사막은 바빌로니아와 이스라엘 사이에 뻗어있는 시리아 사막입니다. “광야”는 이사야 32:14~15절을 보면 “황폐화”에 대한 비문자적 이미지입니다. 특별히 이사야 32:15절을 보면 “광야”는 무너진 요새와 버려진 도시입니다. 하나님의 도시, 산인 시온이 크게 황폐해진 것을 상징합니다(이사야 35:1).
지금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곧게 하는 것은 인간이 귀환이 아닙니다. 인간 왕의 귀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귀환입니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귀환입니다. 그 왕의 귀환을 위해, 그 하나님의 귀환을 위해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곧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곧게 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광야”, “사막”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 파괴된 곳으로 가라! 그 광야로 가서, 그 사막으로 가서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라! 그 실망스럽고 황폐해진 곳에서 길을 만들라! 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는 것은 비유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말라기 3:5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자는 백성의 마음을 그 마음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림으로써 하나님이 임하시는 길을 준비합니다(이사야 40:3, 말라기 3:1절을 비교하여 보면 “준비하다”, 즉 “파나”와 “길”, 즉 “데렉”이 같이 등장합니다. 참고 : 이사야 57:14, 62:10). 이와 같은 맥락에서 광야에서 길을 예비하라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길을 방해하는 개인적, 사회적 삶 속의 모든 장애물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측면에서는 다른 신을 거부하고(이사야 40:18~20, 44:9~20, 46:1~7), 불의를 멀리하고(이사야 1:15~17, 56:1, 59:15~17), 정의를 추구하는 일을 가리킵니다(이사야 1:18, 7:14, 42:1~4, 51:7). 결국 하나님이 오실 때에 적합하지 않은 모든 이스라엘 삶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모든 내용을 제거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죄용서입니다. 회복입니다. 구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파한다”라고 할 때 이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만을 위한 세례 주는 일이 그의 사역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장차 왕으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위해 그의 길을 예비하는, 그의 길을 평탄케 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이 일을 위해 세례 요한은 요단강 근처 문자 그대로 광야 지역으로 나갔지만, 그는 거기에서 문자 그대로의 길을 건설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의 오심을 위해 온갖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요한은 당시 사람들에게 죄를 직면하게 하고 세례를 경험하도록 초청합니다. 모든 죄를 끊고 돌이키기를 촉구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다시 백마를 타고 이 땅에 왕으로 돌아오십니다. 오늘 교회가 그때를 준비하고 평탄케 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장소는 “사막”과 “광야”입니다. 즉, 황폐해진 세상입니다. 우리는 그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오심을 준비하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왕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물리적, 도덕적, 영적 황폐화라는 광야로 들어가서 듣는 이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오심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라고 외쳐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선교형 교회로서의 사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복음 안에서 용서에 따른 회복과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를 황폐케 만든 죄와 불순물들을, 하나님의 오심에 전적으로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 외치는 소리, 음성이 되어서 다시 오실 하나님만을 주목하게 하고, 하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 개개인이 자신의 일터에서, 가정에서 선교형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장차 백마 타고 오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