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책이야기 11월
기록이 주는 위로
5년 전 겨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받은 사랑이 컸기에 슬픔이 깊었다. 긴 세월 동안 쌓은 추억이 무수히 많은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알레르기로 복숭아를 먹지 못하는 둘째며느리를 위해 자두나무를 밭에 심으신 일이다. 따뜻한 손길이 닿아 빨갛게 익은 자두 알은 마지막 한 입까지 달았다. 산후조리에 좋다며 피문어를 고아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오시고, 생일에는 “혜원아, 축하한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용돈을 보내시고, 해마다 김장철에는 손수 기르신 배추로 손맛 가득한 김치를 담가 친정엄마와 여동생 집까지 부쳐 주시고……. 내리사랑이 각별했기에 어머님의 암투병과 영면은 내 일상을 뒤흔들었다. 불면이 우울로 이어졌다.
그때 만난 책이 같은 해에 어머니를 잃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희병 교수의 <엄마의 마지막 말들>이다. 지은이는 말기 암과 인지 저하로 와병 생활이 길어진 모친을 위해 휴업하고 보호자이자 관찰자, 기록자를 자처한다. 책은 1년간의 기록으로 어머니가 병상에서 발화하는 한두 마디 말을 쓰고 아들의 시선, 인문학자의 시각에서 풀이했는데 애도의 시간이 필요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웃긴다꼬, 웃기.
책장을 넘기며 유독 눈길이 간 문장 가운데 하나다. 지은이는 엄마가 이 말을 자주 하셨다고 썼다. 왜 웃긴다고 그러시는지 이유를 통 알기 어려웠다가 오랜 생각 끝에 그 말이 어머니가 처한 난처한 상황, 그러니까 실존에 대한 아이러니적 발화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엄마는 죽지도 못하고 제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링거 줄을 주렁주렁 팔에 매단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신이(그리고 같은 처지에 놓인 눈앞의 사람들이) ‘우스웠던’ 것이다.
어머님도 투병 중에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여러 병원을 거치며 사무적인 의료진을 상대하는 일이 고단하고, 일터에서 삶의 무게를 견디는 자식들이 돌아가며 병상을 지키는 상황이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하셨을 터다.
‘가서 공부해라. 나는 괜찮다.’ ‘고마 죽어야 할낀데.’ ‘춥다. 목도리 하고 다니라.’ ‘여기서 집이 머나? 고마 이 손 잡고 집에 가자.’……. 책은 엄마의 말과 아들의 해석이 이어지며 내가 동행한 어머님의 마지막을 마주하도록 도왔고 아픈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를 추억하는 일로 죽음을 성찰하고 상실의 슬픔을 다스린 지은이의 지혜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머님의 폐암 재발 소식을 알렸을 때, 전문 상담가로 활동하는 친정 남동생은 “병실에 스케치북을 가져다 두라!”고 권했다. 무엇이든 좋으니 기록을 남기라는 조언이었다. 거기에는 손자 손녀 이름의 뜻, 청각을 넣는 어머님의 김장 양념 비법, 항암 치료 일정 등이 남아 있다. 동창 분들이 병문안 길에 복사해 오신 교가와 동요 <고향의 봄> 악보도 붙어 있고.
‘독감 예방 주사, 다음 주에 의사 선생님 와 봐야 결정.’
‘참깨 3말 정도, 들깨 2말 정도, 검정깨 5되 정도, 땅콩 22.’
스케치북에 남은 어머님의 마지막 메모는 계속될 일상을 향한 계획이다. 어머님이 꿈꾸신 ‘보통의 하루’를 감사히,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게 주신 사랑에 보답하는 길일 테니까.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김혜원
<엄마의 마지막 말들>
박희병 지음 | 창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