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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金尙台(1862 ~ 1911)】 "이강년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 임명되어 의병 활동에 투신"
1862년경 충청북도 영춘군(永春郡) 군내면(郡內面) 남천리(南泉里, 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아버지 김규병(金奎丙)과 어머니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한편, 다른 자료에 따르면 생년을 1864년경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본관은 삼척(三陟)이고, 본래 이름은 상호(相鎬)이다. 자는 경륙(景六) 또는 정륙(正陸)이고, 호는 백우(白愚)이다. 어려서 남천을 떠나 삼척 김씨가 모여 사는 영월 옥동마을(현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로 이주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유생임에도 불구하고 영월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래서 일제 경찰은 “유명한 유학자로 동학당(東學黨)이었던 자”로 파악하였다고 한다. 이때 의병장 이강년(李康䄵)과 윤기영(尹基永) 등과 연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실시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이강년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 임명되어 의병 활동에 투신하였다. 의병 봉기 직후 안동관찰사를 처단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석현성에서 패한 후 유인석(柳麟錫)의 호좌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유인석 의병장은 이강년을 유격장으로 임명하여 조령 등지에서 작전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조령 방면으로 이동하여 이강년과 함께 활동하였다.
호좌 의병부대는 1896년 5월 충북 제천 남산전투를 계기로 근거지인 제천을 상실하고 서북지방을 거쳐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이동하였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청풍의 능강(綾江)으로 이동하였다가 해산하였다. 이 무렵 향리로 돌아가 다음을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 랴오둥(遼東)으로 이동하였던 유인석이 일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출국하여 퉁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에 거주지를 마련할 때 그를 따라 만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유인석과 함께 백두산 주변과 푸쑹(撫松)·린쟝(臨江)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만주에서 3년간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고향인 남천에서 서당을 열고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정운경(鄭雲慶) 등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런데 함께 의병운동을 전개하던 정운경 등 동지들이 체포되자 은인자중하며 다음을 기약하였다. 1907년 초 이강년이 의병 봉기를 계획하자 합류하였다. 그러나 그해 4월 영춘 용소동(龍沼洞)에서 회합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기습공격을 받아 이강년은 큰 부상을 입었고, 군사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이강년·백남규(白南奎) 등과 함께 청풍(淸風)·단양 등지의 정두용(鄭斗容)·이진원(李進源)·신태원(申泰元)·조동기(趙東驥) 등의 집을 전전하면서 치료해주었다.
1907년 7월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당하고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다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특히 8월 5일 원주진위대의 봉기로 시작된 원주의병의 활동은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재기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의병을 다시 일으킨 직후 원주로 이동하여 원주진위대의 무기를 얻어 무장하고 여러 의병부대와 함께 제천으로 이동하였다. 제천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본군을 맞아 제천 천남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후 이강년을 중심으로 새롭게 호좌 의병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때 또 다시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호좌 의병부대를 재건한 직후 격문을 통해 투쟁목표를 천명하였다. 호좌 의병부대 중군부대를 이끌고 영천의 조령, 문경(聞慶)의 갈평, 영월읍, 원주(原州) 싸리재·죽령·영춘의 백자동과 복상골 전투 등에 참전하였다. 1907년 10월 초 영월읍 전투에서는 앞장서서 일본군의 진지로 돌입하여 9시간이나 지속된 전투를 지휘하였다. 또한 역량을 최대화하려고 다른 지역 의병부대와 연대를 모색하였다. 특히 영남 지역의 의병부대와 연대를 추진하여 금달연(琴疸淵) 등이 이강년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한편, 1907년 12월 중순 이강년 의병부대가 영춘의 복상골 전투에서 패하고 북상할 때, 부대를 이끌고 남쪽에 남아 독자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후 영남 지방을 근거지로 의병 활동을 이어나갔다.
1908년 여름 이강년이 체포되어 사망하자 부대를 해산하고 영월의 칠령산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후 의병 활동을 재개하여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했던 의병들도 휘하에 집결시켰다. 영춘·순흥의 남대동 일대, 소백산의 비려중종사(飛呂中宗寺), 혁암사(革庵寺)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일제 경찰·헌병대와 50여 차례 교전하였다. 1909년 2월 혹한이 닥치자 의병부대원 일부를 귀가시켰다. 그러나 3월에 병력을 보충하여 단양의 동면 지역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특히 단양군 내의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순사 2명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후 가을까지 순흥·문경·덕산·금수산·영춘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말에 모든 병력을 귀가시키고 휘하에 3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있었다. 대체로 칠령산에 근거지를 두면서 영월·영춘·순흥 일대에서 화약기술자를 불러 탄약을 제조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1910년 봄에 다시 병력을 모아 순흥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태백산·소백산 일대에서 계속해서 항전하였기에 ‘양백대장군(兩白大將軍)’이라는 별호도 생겼다.
이후 일제는 ‘토벌작전’을 통해 1910년 11월부터 한 달 이상 지속되는 체포 작전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현상금 500금(五百金)을 걸어 밀고를 하도록 유도하였다. 또한 밀정을 적극 활용하였다. 무로타 히사하루(室田久治) 제천수비대장은 25개 마을마다 밀정을 배치하고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1911년 3월 무로타가 근무처를 옮기게 되자 영천에 주둔하던 수비대장 무네가타(宗片謙)에게 밀정 조직을 인계하였다. 밀정 조직을 인계받은 영천 주둔 수비대가 의병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풍기읍에 살던 유생이면서 한때 의병에 관여했던 장복구(張復龜), 그의 소작농이면서 순흥의 광암리(단산면 좌석리)에 살던 우종응(禹鍾應) 등이 협조하였다.
일본군은 측근인 박서촌(朴西村)에게 우종응의 아들인 우선제(禹善濟)와 우선기(禹善崎)를 접근시켰다. 지속해서 감시한 결과 영월의 미사리(하동면 와석리), 순흥의 석천포(영주시 순흥면 덕현리), 문경의 대문동(가은읍 죽문리) 등 몇몇 은거지가 파악되었다. 감시 과정에서 이 아무개와 무슨 일을 꾸민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우종응의 집으로 유인하는 등 치밀한 체포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 1911년 6월 14일 새벽 순흥의 연화동(영주시 단사면 좌석리)에서 우종응 등 밀정의 고발에 의해 일본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비무장 상태에서 체포되어 영천의 수비대로 압송되었다. 영천수비대에서 받은 심문에서 순흥·서벽·풍기·죽령 등지에서 교전한 사실만 진술하고 부하의 소재나 은거지에 대한 정보를 내놓지 않았다. 이후 대구로 압송되어 8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어 8월 31일 대구공소원에서 최종 사형 판결을 받고, 9월 2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수인복에 수갑을 찬 채로 가부좌한 모습이 전신상 사진과 가로 3cm, 세로 4cm의 십자가가 있었으며 1911년 명치 44년에 쓴 체포전말서와 거괴 김상태지약전(巨魁 金尙台之略傳)이란 기록들이었다.
40페이지에 달하는 체포 전말보고서에 의하면 경상, 충청, 강원의 3개도에 걸쳐 산악지방을 근거로 신출귀몰 교묘하게 추적망을 벗어 나온 적도의 수령 김상태를 6개월 여에 걸친 추적끝에 한국인 밀정의 결정적인 제보로 6월 14일 경북 풍기면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중턱에서 체포하였다고 한다.
또 이 조서에는 김장군은 이강년, 민긍호와 함께 셋이 거의(擧義)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민긍호 의병장(원주 진위대가 해산될때 의병에 가담한 의병장)과도 함께 활동했음으 알수 있다.
이강년, 민긍호 두장군은 1908년 모두 사로잡혀 처형됐으므로 이후 3년간은 수천명의 부하를 홀로 통솔하고 저항해온 것으로 짐작된다.
체포되었을 때의 그가 이끈 부대의 구성원이 9백명, 총은 700정이 있었다고 밝혔다. 또 물음에 대하여 안동의 서벽리 전투와 풍기의 죽령전투를 비롯하여 41호의 전투를 들었는데 , 이들 3개 전투는 일본군이 수백명씩 희생된 전투로서 한국의 병사상 빛나는 전공이었다.
그는 “너는 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에 “나쁜 놈들은 모두 죽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죽이지 않았다"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거괴 김상태 약전“에 의하면 키는 6척, 골격은 크며 태도는 호걸풍이며 얼굴은 검붉고 눈은 보통 크기이나 안광은 사람을 쏘는 듯하다고 하였다.
한학을 수학하고 향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1904년 동학당이 각도에서 봉기하자 이에 가담하여 일부장이 되어 관병에 대항하다가 동학란이 평정되자 향교로 돌아와 학문을 가르쳤다.
1906년 이강년 등과 일천여면의 의병을 모집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상북도 삼도에 걸쳐 일본 관현에 저항하여 더욱 그 세력이 커졌다. 이에 각 관헌은 협력하여 이의 검거에 노력하였으나 신출귀몰하여 포위망을 뚫고 대항하다가 1911년 6월 14일 오전1시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기슭에서 영주수비대에 체포되어 동년 9월 21일 대구 감옥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향년 50세였다.
1911년 9월 29일 영월 옥동의 옛집으로 운구되었다. 유언에 따라 11월 2일 제천 두학 장치미에 있는 이강년의 무덤 바로 아래에 장사지냈다. 이후 1980년대 초 영월 옥동마을에서는 문중의 성금을 토대로 충의사를 지었으나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단되어 허물어지고 말았다. 1991년에 무너진 충의사 자리에 순의비(殉義碑)를 세웠으며, 1994년에 영월 읍내의 금강공원에 ‘김상태의병장충절비’가 건립되었다. 2000년에는 옥동마을에 사당인 충절사(忠節祠)가 건립되었다. 2006년부터는 ‘김상태 추모문화제’가 면 단위에서 개최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