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배우는 아름답다.
아니, 배우에게는 나이가 없다. 단지 관록과 경험이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을 본 후에 바로 든 느낌이다.
<에쿠우스>가 무슨 뜻인지도 모를 때부터 이 작품은 내게 참 특별했다. 작품이 주는 정확한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이 작품이 가진 강한 힘에 언제나 압도당하곤 했었다. 때로는 눈빛이 아주 여리고 순수했던, 때로는 꽤 반항적이었던,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에너지를 가진 소년 알런, 그리고 그 주위에 가득한 말들이 주는, 뭔지 모를 강한 힘…. 연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20대 초반부터 나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연극을 꼽으라면 으레 <에쿠우스>를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여러 극단의 여러 알런을 만났다.
조재현알런이 무대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흥분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설렘 반 우려 반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재현알런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어쩌면 시간을 되돌린 듯한- 커다란 설렘, 그러면서도 이미 대중 스타로, 그것도 다소 정돈되지 못하고 망가진 듯한 이미지의 스타로 이미 굳어버린 그가, <피아노>나 <목포는 항구다>에서의 걸쭉한 이미지를 벗고 예전의 그 맑고 핸섬하던 알런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나는 그에게서 아저씨가 아닌 소년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을까?
막이 열리면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다이사트의 공간, 알런의 공간, 말들의 공간을 뜻하는 세 개의 네모진 무대, 양쪽으로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주변 인물들…. 보는 것만으로도 연출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시각화된 무대. 김광보감독이 새로 만든 <에쿠우스>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이사트.
그러고 보니 내가 <에쿠우스>를 보면서 다이사트의 입장에 진심으로 공감하거나 그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아직 다이사트의 나이가 되지 않아서일까? 작품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안목이 부족해서일까? 다만 그 동안 본 다이사트 중 조명남선생님의 정확하고도 세련된 화술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항상 내가 무대 위에서 눈을 떼지 못한 것은 알런이었다.
그런데 이번 <에쿠우스>에서는 처음으로 다이사트가 제대로 보였고, 다이사트의 대사가 들렸다. 오랜만에 다이사트로 돌아온 이승호선생님은 처음엔 대사가 좀 불안했다. 김흥기님의 갑작스런 도중하차로 인한 연습 부족 때문인지 연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알런과의 호흡도 아주 잘 맞는 것 같진 않았다.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다이사트의 담담하고 일상적인 대사-때로는 좀 머뭇거리고 때로는 더듬는 듯한 말투조차-가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정확한 다이사트"에서 느꼈던 아주 논리적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환자를 단지 환자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고뇌하는 중년 남자로서의 다이사트를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강한 자기 연민과 반성, 자기 고백은 오히려 알런의 부르짖음보다 강하게 나를 이끌었다. 처음으로 그에게 정을 느꼈다. -물론 나는 다이사트 스타일의 성격은 결코 아니다.- 이미 내가 다이사트를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는 뜻일까? 누군가가 쓴 "너는 한 번이라도 뜨겁게 타 본 적이 있었던가?"라는 싯귀절과 다이사트의 힘없는 어깨는 극이 종반부로 치달을 때까지 계속 겹쳐져 떠올랐다.
조재현알런은 십여년 전보다 더 알런다웠다. 앞모습이 아닌 옆모습에서 언뜻언뜻 불혹의 나이가 느껴졌지만…….(사람의 나이는 앞모습보다 옆모습이 더 정확히 보여준다는 새로운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러나 십여년 전의 알런이 앳된(그 때도 "앳된"이란 말이 어울릴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 땜 그렇게 느껴졌다) 용모와 모성애를 자극하는 눈빛으로 알런다움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알런은 놀랍도록 배우가 "알런"이라는 인물에 밀착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십 수년의 세월이 가져다 주는 나이의 흔적을, 조재현은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와 섬세한 감정으로 지워버렸다. 어쩌면 오히려 불혹에 가까운 그의 나이가 십대 소년을 더 정확히 바라보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배우의 애정과 노력이 뒤따랐겠지만…….
알런의 강하고 원시적인 힘과 다이사트의 부드러운 무기력함은 후반부로 갈수록 잘 조화되어 작품 속에 녹아든 것 같다. 두 배우가 서로에게 적응해 가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두 배우에게 적응해 간 것일까?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를 다 꺼내놓은 후 알런은 쓰러진다. 신앙과 도덕과 규범을 강조하는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인간의 영역을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이전의 세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었던 알런. 그를 "도덕적이며 규범적인 기성 세계"로 되돌리기 위한 치료를 하는 것이 과연 그를 위한 일이냐고 다이사트는 반문한다. 정말로 치료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지, 다이사트는 관객에게 묻는다.
오랜만에 멋진 작품을 보았다는 뿌듯함, 두 시간 동안 혼을 빼고 한 작품에 몰입했다는 시원함, 배우들의 열기가 내 온몸에 입혀진 듯한 가슴 벅참…. 커튼콜이 끝나고도 한 동안 나는 <에쿠우스>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한참 후 정신을 추스르고 동숭홀을 나오면서, 배우는 작품과 함께 끝없이 자라고 완성된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관객도 그럴지 모른다.
첫댓글 어? 우리가 차타고 오면서 읽은 것이당 +_+ㅋㅋ 에쿠우스 많이 어렵고 얻을것도 많은 연극,, 제대로 보고싶어요 ㅜㅜㅎ
ㅋ ㅋ ^ - ^수업시간에도 말씀 해주셨는데^ - ^//ㅋ ㅋ 저도 어려웟어요//ㅋ ㅋ 하지만//조재현 선생님 정말 멋잇엇어요^ ^
멋진작품이라니 저도 보고싶어요 ..ㅋㅋ
ㅋㅋㅋㅋ 두근두근..!!!
ㅋㅋ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얘기해주신거다~ ^ ^ 저도 꼭 한번 보러 가고 싶어요~ 조재현 선생님 연기두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