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로 향하기 전날에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그 비는 아침에야 그쳤는데 그래서인지 송광사 풍경이 한결 산뜻해 보인다. 선열당에서 작을 개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니 화엄전이다. 송광사 조실 법흥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전각. 빗장을 열고 들어선 경내는 단아하면서도 쾌적했다. 무언의 선미라 할까! 왼쪽 당우에 걸린 주련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 밑 진흙소가 달을 머금고 달아나니(海底泥牛月走),
바위 앞에 돌호랑이가 아이를 안고 졸고 있다(巖前石虎抱兒眠).
철뱀이 금강신장의 눈에 끼어드니(鐵蛇鑽入金剛眼),
곤륜산이 코끼리를 타고 백로가 이끈다(崑崙騎象白驚牽).
『선요』에 나오는 말이지만 이 말 속에 깃든 선지는 헤아릴 길이 없다. 편액이 걸려 있는데 언뜻 보아서는 ‘목우산방(牧牛山室)!’ 아니다. ‘방우산방(放牛山室)’이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스스로 소를 먹이는 사람’이란 뜻으로 호를 ‘목우자’라 했다. ‘목우’는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방우’는 낯설다. 작은 의문은 법흥 스님과 마주하면서 금방 풀렸다.
“방우(放牛)라 함은 풀어 놓은 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의 소는 ‘자유로운 소’를 말합니다. 대학시절 은사이시던 조지훈 선생이 말년에 보낸 오대산 토굴의 당호를 ‘방우산장’이라 이름 했는데 뜻이 좋아서 차용했지요. ‘산장’은 여관의 정취를 풍기는 것 같아 ‘산방’이라 해 ‘방우산방’이라 한 겁니다.”
조지훈 시인은 당시 ‘방우산장’에 지내며 오대산에서 수행하고 있던 스님들에게 ‘외전’을 강의 했다고 한다. 그가 자신이 거처하던 집 이름을 ‘방우산장’이라 지은 이유는 그의 수필집 ‘방우산장기’에 잘 나타나 있다.
‘집이란 물건은 고루거각(高樓巨閣)이든 용슬소실(容膝小室)이든지, 본디 일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요, 떠메고 돌아다닐 수 없는 것이매, 집 이름도 특칭의 고유명사가 아닐 수 없으나. 나의 방우산장은 원래 특정한 장소, 일정한 건물 하나에만 명명한 것이 아니고 보니. 육척 수신장구 담아서 내가 그 안에 잠자고 일하며, 먹고 생각하는 터전은 다 방우산장이다.’
어릴 때부터 절에 가면 ‘환희심’
高大 등하교시 개운사 향해 합장
비록 산 속에 있는 집을 ‘방우산장’이라 했지만 그가 머무는 곳은 모두 ‘방우산장’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소’는 뒤이어 나온다.
‘기른 한 마리 소야 있든지 없든지 방우라 부르는 것은, 내 소 남의 소를 가릴 것 없이 설핏한 저녁 햇살 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 어디에 가 있든지 내가 아랑곳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조지훈 시인의 소탈함과 자유로움이 짙게 배어 있는 대목이다.
법흥 스님은 1958년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1959년 출가했다. 그의 스승은 ‘절구통 수좌’ 효봉 스님이다. 그러나 출가 원력을 세운 후 법흥 스님의 첫 인연은 대승사 묘적암에서 만난 ‘일타 스님’이었다.
“일타 스님은 출가하려 왔다 하니 ‘한 아들이 출가하면 구족이 생천한다’며 그 자리서 삭발해 주셨지. 3개월 동안 공양주 노릇하며 초발심자경문도 배우고 3일 동안의 1만배 정진도 했고. 그런데 일타 스님이 수행처를 옮기면서 효봉, 인곡 스님이 있는 동화사로 가보라 일러주셨어.”
일타 스님은 법흥 스님에게 소개장을 써주며 일단 혜암 스님을 만나보라 했다. 그 길로 법흥 스님은 대구로 향했다. 대구 버스 정류장이 있는 자갈마당(대신동)에서 동화사행 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한 스님이 다가왔다.
“어디로 가십니까?” “동화사 갑니다.” “어인 일로 가십니까?” 법흥 스님의 자초지종을 들은 스님은 일타 스님이 써 줬다는 ‘소개장’을 보여 달라 했다.
“안 됩니다. 이 소개장은 혜암 스님에게 보여 드려야 합니다.”
“내가 혜암이요.”
훗날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 스님이다. 혜암 스님은 법흥 스님에게 왜 ‘사문의 길’을 걸으려 하느냐 물었다.
법흥 스님은 독실한 불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스님이 좋고 절에만 가면 신심이 복받쳐 올랐다고 한다. 고려대 재학시절엔 학교를 오르내리면서도 개운사를 향해 합장할 정도였으며, 틈만 나면 숭인동 청룡사에서 새벽 기도를 올렸다. 인재임을 확연히 알아 챈 혜암 스님은 효봉 스님에게로 안내했다. 법흥 스님과 효봉 스님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동화사서 효봉 스님 은사로 출가
340일 동안 17만배 기도정진도
“효봉 스님은 참선해라 하셨지. 대강백도 말미엔 참선 못한 것 후회한다며 죽을 각오로 덤벼보라 하셨지.”
‘무(無)’자 화두를 든 법흥 스님은 ‘확철대오’해 언어 이전의 일언을 전해보려 정진의 정진을 거듭했지만 건강이 허락하질 않았다. 탁월한 기억력 또한 알음알이를 내려놓아야 하는 참선에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어쩌면 늦깎이로 입산한 만큼 ‘빨리 깨닫겠다’는 원력이 조바심으로 작용돼 상기를 일으켜 몸져눕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법흥 스님은 잠시 참선을 접고 기도로 돌아섰다. 해인사에서는 성철 스님 권유로 340일 동안 17만배를 올리는 것은 물론 또 다시 340일 동안 하루 네 번 1시간 씩 마지를 올리며 기도정진했다. 법흥 스님의 수행력은 이미 조계종 원로회의 내에서도 정평이 나있다. 지금도 스님은 시봉을 두지 않고 손수 빨래하며 양말을 꿰맨다. 한마디로 무소유의 전형이다.
법흥 스님은 화엄전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왜 불교를 믿어야 하는지, 연기와 중도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한 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강조한다. 그 만큼 마음의 작용이 일상생활에서 중요하게 차지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상이 없으니 무상(無相)이지. 그런데 이 마음이 모든 것을 지배해! 내가 짓는 마음이 극락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단 말이지.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가? 지금 여기, 이 순간!”
그 누구도 지금 이 순간 극락에서 살고 싶지 지옥에서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극락도 지옥도 분별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은 그 다음 일이다.
“마음을 닦는 것이 수심(修心)이요, 마음을 기르는 것이 양심(養心)이며, 마음을 쓰는 것이 용심(用心)이지. 어느 하나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도 안 돼. 불교 공부란 결국 마음 공부인 거야. 이 공부를 위해서 경전을 보고, 선어록을 보기도 하며, 방석 위에서 몇날 며칠을 꿈쩍 않고 앉아 있는 거지.”
극단의 한 쪽 ‘집착 말라’ 아닌
양변 모두 버려야 참다운 ‘중도’
어떤 마음을 닦고 기르고 써야 하는 것일까. 사실 ‘닦을 마음 따로 있는 게 아니다’라는 일언도 있고, ‘닦겠다는 그 마음마저 내려놓으라’는 일성도 있다. 따라서 용심 이전에 어떤 마음을 닦고 기를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시작도 하기 전 드러눕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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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당에서 작은 개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바로 화엄전이다. 가을을 말하는 개울소리도 청량하지만 단풍 든 돌길도 일품이다. |
“맑은 마음이라 하는 청정심(淸淨心)을 갖는 공부에 제일 힘써야 해. 임제 스님은 ‘청정심이 곧 부처’라 했을 만큼 청심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했지. 내 마음이 맑을 때 부처님의 마음이 되는 거지, 내 마음이 더러우면 축생의 마음일 뿐인 게야. 사심이 없는 마음, 탐진치가 없는 마음, 광명정대한 마음을 가져보려 노력해 봐.”
법흥 스님은 청정심을 기르고 쓰면서 중도관을 가져 보라고 권했다. 중도의 기본 형태는 있음과 없음, 생과 멸 등의 상대적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법흥 스님의 중도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집착하지 말라는 두 변은 실천적 사항이지 이론적 사항이 아니야. 고락(苦樂)을 예로 들면 많은 출가인들이 세간의 향락을 버릴 줄만 알고 고행(苦行)하는 괴로움, 이것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해탈하려면 고와 낙을 똑같이 버려야 해. 중생이라는 존재는 해탈을 얻기 전에는 무엇을 대하든지 그것은 고가 아니면 낙이요, 낙이 아니면 고라서 항상 양변에 머물러 있게 되거든.”
고와 낙의 어떤 것 한 편에만 집착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고와 낙 둘 다 버리라는 말이다.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떠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고와 낙을 떠난 다는 것은 세간의 고락이라든지, 출세간의 낙이라든지 모든 집착을 완전히 떠나는 것을 의미해. 고와 낙 등의 일체 양변을 떠난 경계를 중도라 하는 거지. 이렇게 양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正等覺)이라 하는 걸세.”
선교겸수는 출재가 모두에 해당
청정심 기르는 공부가 가장 중요
법흥 스님은 중도의 진면목이라도 엿보고 싶다면 혜능 스님과 혜명 스님의 일대사를 눈여겨 보라 한다. 육조 혜능 스님은 자신의 의발(衣鉢)을 빼앗으러 온 혜명 스님에게 한 마디 던졌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러한 때 본래면목은 어떠한가?” 이 한마디에 혜명은 대오했다.
“금강경에서도 시법(是法)이 평등하야 무유고하(無有高下)라 하고 이것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했지. 부처님이 전하신 인연법과 중도관을 가슴에 안고 오늘부터 청정심 하나 길러 봐. 마음 하나 쓰는 것부터 달라질 거야.”
법흥 스님은 수행을 권하면서도 나름대로의 경전공부도 게을리 하지 말라했다. 부처님 말씀 한 구절도 제대로 모르면서 앉아 있어 봐야 헛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팔만대장경을 외운다 해도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이 또한 헛일이라 했다.
“선가귀감에 이런 말씀 있지. ‘총명한 지혜가 업의 힘을 능히 막을 수 없고, 마른 지혜만 갖고는 윤회의 고통을 면할 수 없다.’ 경허 스님도 문자만 알아서는 생사해탈을 할 수 없다 하셨고. 폭포수 같은 설법을 한다 해도 경계를 만난 순간 탁 막혀 그 자리서 쓰러지는 사람 많아. 선교겸수(禪敎兼修)는 스님만의 일 아니니 염두에 두어야 할 게야.”
사진 촬영을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스님의 일성이 들려왔다.
“이보게! 비가 내린다고 해가 없는 게 아니야!”
하늘을 올려다 보니 해가 밝게 빛나고 있다. 비는 또 내릴 터인데 그 속에 숨은 해는 언제쯤 꺼내 볼 수 있을까!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법흥 스님은
1931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 1959년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수계. 1974년 송광사 주지, 1980년 불교정화중흥회의 사무총장, 4대, 5대, 8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오대산 상원사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 현재 송광사 조실로 주석하며 청정 수행가풍을 계승하고 있다. 『선의 세계』를 엮었으며 『계율강요』를 편역했다.
1023호 [2009년 11월 16일 1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