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사람이 스스로를 생각할 때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은 언제일까요? 자신의 거짓이 드러났을 때일 것입니다. 감추고 숨기고 있던 비밀이 탄로가 난 것입니다. 좋은 사람으로, 착한 사람으로,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쓰고 살던 가면이 벗겨졌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인간이 짐승과 다른 이유는 수치를 아는 것이라고 영국의 청교도 설교자 토마스 와슨(Thomas Watson)은 1668년 그가 쓴 책 “회심”에서 말했습니다. “'인간 외에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피조물이 없다. 이성이 없는 짐승들은 공포와 고통은 알지만 수치는 모른다. 당신은 짐승을 부끄러워하게 만들 수 있는가? 그러므로 죄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그는 짐승을 닮은 사람이다. ”그는 심지어 죄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를 가진 돼지'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아는 시인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 싶던 기독 청년의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윤동주는 일제 시절에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히라누마 도쥬(平沼東柱)’라는 일본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했었습니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동주>에는 창씨개명으로 부끄러워하는 윤동주 시인을 위로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윤시인,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움이 아니야.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 이처럼 ‘부끄러움’이란 단어는 윤동주 시인의 시와 그의 짧은 인생을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 였습니다.
예수 믿는 신앙인으로 살면서 부끄러움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위선자라고 손가락질 받을 때가 있습니다. 교인들은 사랑을 말하면서 미워하고, 정직을 말하면서 속이고, 가난을 말하면서 욕심을 들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은 유감스럽지만 교회와 교인들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어 마음이 아픕니다. 어떤 교회는 알박기를 해서 500억을 받은 것이 자랑이 되었던 이런 비신앙적인 모습들이 사라져야 교회는 세상이 신뢰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정작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 각자는 어떻습니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속 마음이 다른 위선은 없습니까? 위선적인 신앙으로 자신을 감추면서 위선의 가면이 벗겨질까봐 두려워하며 살지 않습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위선을 책망합니다. 설교 제목을 따로 국밥이라고 정해 본 것은 성도의 말과 행동, 믿음과 실천이 하나가 되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도전하는 것은 믿음과 행동의 일치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 예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묵상하기 원합니다.
하나는 정말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제사장(오늘의 목회자)가 지나가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도(오늘의 교회직분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로부터 비난당하고, 상종조차 못할 잡놈들이라고 욕을 먹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구해서 자기 돈을 들여서 치료해줍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섬기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인종에 상관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 안식일에 손 마른 병자를 주님이 고쳐주시자, 바리새인들이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에 왜 일을 하느냐?”그들에게는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막3:4절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새번역)”인간이라는 존재는 성장하면서 가치분별을 부모로부터, 학교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를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치관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 자녀들이 가치분별을 하고 살던가요?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쓸데없는 것을 사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런 생각은 안해보셨어요? “내가 잘못 가르쳤나보다.”부모가, 교사가 세상의 가치관을 갖고 있으면 당연히 자녀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배우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의 모습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당부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고 있습니까? 현대인들은 사람의 가치가 몸무게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크고 무거운 것이 좋은 것이 아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구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던져준 가치관은 집도 크고, 차도 크고, 은행에 돈이 많아야 하고, 비싼 음식을 먹어야 하고, 사업체도 커야 하고, 마트도 대형화되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새 크고 무거운 것이 가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준으로 사람도 평가합니다. 가난하면 무능한 사람, 집도 차도 작으면 별 볼일 없는 사람,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떤 인격을 가졌는지, 어떤 영혼의 소유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차를 타고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방식으로 소비하느냐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찬성하십니까?
이렇게 계속 세상이 흘러가도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자고 외치면서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인생이 왜 가치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둘째, 우리는 세상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명이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나누고 베푸는 것을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물질보다 영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 경쟁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세상, 나눔의 행복을 아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날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한가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형식과 내용 모두를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은 지켰지만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기대했던 삶을 살지 않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고 동시에 말씀의 열매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가치관 혼동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는 어리석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깨닫고 믿음의 가치관을 세워야 합니다. 말씀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임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먼저 안을 깨끗이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먼저입니다. 먼저라는 말은 순서를 정했다는 뜻입니다. 가치판단을 했다는 말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정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선순위를 한번 정해 놓으면 그 우선순위는 여간해서는 바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올바르게 정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바꾸려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실패였다고 아니 적어도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 듯이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바꾼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할 일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정결하게 만드는 일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하곤합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 같았는데 사장 자리에 앉혔더니 잘 하더라는 거죠. 그러나 사실 이 말처럼 위험한 말이 없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사람들이 고통을 안 당합니다. 자리는 외면입니다. 사람은 내면의 실력이죠. 무엇이 먼저 입니까? 실력을 갖춘 사람이 자리에 앉아야 자리도 빛이 나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외모중심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말로는 외모보다 인격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선 텔레비전좀 켜보세요. 광고 나오죠? 유해진씨 말고 남자 모델들 현빈,정우성,이정재등등... 그 광고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잘 생기고 봐야해”광고를 통해서 외모지상주의의 메시지를 매일 반복해서 세뇌를 당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면 여자 아이들은 화장을 시작할 나이죠. 이때는 외모에 민감해져서 옷 입는 것, 장식하나 하나에 마음과 시간 물질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인격이라고 말하면 수긍하고 인격 수양할까요? 왜 안할까요? 자기 혼자만 내면 수양한다고 화장 안할 수 없거든요. 정작 어른이 되면 인격이야기하고, 인문학 이야기하고, 정서,성품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외모와 스펙이 대세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슬로건은 외모를 갖추고 내면을 채워라! 이런 가치관에 대해 예수님은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내면이 정리되고, 정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요? 모든 공간에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습니다. 공기라도. 사람의 내면도 마찬가지인데 내면을 무엇으로 채우냐가 무엇을 주는 사람이 되는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면이 깨끗하게 준비되어야 거룩한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담고, 사랑,평화,기쁨등 하늘의 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일생이라는 책에서 이재철목사는 이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2003년 3월에 프랑스의 유명한 요리사 베르나르 르와조가 엽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그가 자살하던 날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정규 뉴스 시간에 그의 자살 소식을 보도했고, 며칠 후 그에 대한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정도였습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타이어 회사 미슐랭은 식당을 등급별로 평가하는 <기드 미슐랭>을 출간하는데, 베르나르 르와조가 경영하는 식당은 지난 27년간 줄곧 최고 등급인 별 세 개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해 발간된 그 안내서엔 그의 식당은 별 한 개로 떨어졌고, 수치심을 느낀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세월이 흐르면 쇠하고, 인간의 능력 또한 나이가 들수록 감퇴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장인이라고 평생 정상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27년간이나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로 군림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별 한 개로 등급으로 떨어졌어도, 평생 최고의 요리사로 살아온 자신의 솜씨로 봉사하며, 사람들과 더불어 노후를 즐기며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별 두 개를 잃었다고 자살을 하다니!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보이지 않는 안을 먼저 깨끗하게 한 다음, 보이는 것들을 갖춰나가라는 것입니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미슐랭 별 세 개가 뭐라고 내면이 채워지지 않았으니 겉으로 보여졌던 화려한 외면과 달리 그의 내면은 늘 등급을 걱정하며 살아온 비참한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외모지상주의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을 먼저 믿음과 실력으로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다윗처럼 준비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세워 아름답고 위대한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믿음과 삶이 따로 국밥이 아닌 함께 어우러진 국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