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판에서
박명희
만종의 기도
수확은 어깨 위 고단한 노동
수레바퀴에 가을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저녁
내가 거두어 들일것이 없어도
이제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마른 풀 숲
벌레 울음은
풍년의 합창이다
한 무리 새떼들
추수 끝 넓은 들판에
경배 하듯
대열을 맞춰 내려 앉고
오케스트라 마지막 음을 끝내 듯
일제히 날아 오른다.
눈소식
박명희
유리 비이커에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TV속 폭설 뉴스로
현장 아나운서 목소리는 한 톤 높다
먼 마을에 눈 내리는데
나는 두꺼운 옷을 입고
눈싸움에 출정하듯 설렌다
이곳
한반도 남쪽 끝자락
어느때쯤 첫눈이 내리는지
사과를 한 알 씻어
식탁에 놓고
돌아서는 그 때 에도
마음은
창밖으로 향한다
저녁이 되고
눈이 내리면
나는 맨 먼저 마주친 사람에게
눈 소식을 자랑처럼
전해야 겠다.
책 읽는 오후
박명희
겨울은 독서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한강 작가의 흰을 읽었다
눈이 내릴것 같아
밖으로 나가는 마음을
안으로 가두어 책을 읽는 오후
차 한 잔을 마시며
책장을 넘기는 동안
가르릉 대는 고양이 한 마리
곁에 앉아 있어도 좋겠다
그때
한겨울 동안 독서로 눈동자가 깊어진
마음 잘 맞는 벗이
책을 안고
어깨에 쌓인 눈을 털며 찾아와
함께 오랫동안 책을 읽는다면
밖에서는 계속 눈이 내릴것이다
일부러인 듯
오래 잊고 지낸 벗들에게
이번 겨울
책한권 소식을 보내야겠다.
도서관과 친구
박명희
도서관에서 오는 중 이었다고
자전거를 타고 온
친구의 등 뒤 배낭에서는
항상 문자도 덜컹거리며 따라 왔다
어릴적 사탕의 단맛 처럼
백발의 단맛은 독서라는 듯
작은 물병과 함께
몇권의 책이 들어 있다
정원에서 한참 놀다가 헤어질 때에도
도서관을 거쳐
집으로 간다고 했다
책 속에
세상에서 묻는 답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것 같다.
높이 길을 내는 사람들
박명희
장수로 사과를 사러 가는 날
하늘에
시렁을 걸쳐 놓은 듯
높은
완주 고속도로
길 아래 집들이 점 으로
멀게 낮다
구례 막 지날때
산허리 아침안개
소나무 숲에 연기처럼 퍼진다
동행자가 내게
구름이라 한다
높게 더높게
길을 내는 사람들
내려 설 수 없는 길은
위태롭다
새들은 높이 날지만
하늘에 길을 내지 않는다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길
굳게 디디고 설 땅을 잃지 않는
낮은 길을 내며 살아갈 일이다.
화계장에 토란은 없었다
박명희
아직 은행나무에 몇 잎 남은
겨울 초입
흐린날 섬진강변을 달린다
하동 Bo 비제로 커피 마시러 가는길
화계장터를 지나며
계획에 없던 생밤 한 봉지
대바구니 하나 샀다
토란은 없었다
토란 사는 일 하나도
마음 먹은 생각을 한 끗 비켜간다
사는일 소소하게 어긋남이
한 두번 이었던가
첫눈 내릴 일과
차한잔의 여유가
아직 남아 있으니
오늘은 그것이면 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