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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2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8주)
성인(聖人)되기: 참 나로 사는 길
렘11:18~20; 약3:13~18; 막9:30~37
그토록 길게 무덥던 날씨가 추석 연휴가 지나고 나서야 제 날씨를 찾은 것 같습니다. 남부지방과 전국 여기저기에 큰 비로 집과 들이 물에 잠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큰 피해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새벽 맑게 갠 하늘을 쳐다보는데, 동쪽 하늘에서 별들이 유난히 반짝였습니다. 찬 기운과 반쯤 기운 달과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이제 진짜 계절이 바뀌었나보다 설레임까지 느꼈습니다.
이번 여름은 무덥고 정말 길었습니다. 진액이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몸을 써 일하는 분들은 오죽했을까 짐작해봅니다. 우리 모두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 다시 정신을 차리고, 큰 숨 한 번 몰아쉬고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마음의 여유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사이의 공간”을 말합니다. 딱 달라붙어 있던 마음에 어떤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바람이 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 사이에서 춤추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영원한 “내 소유”는 없습니다.
세상의 재화나 물건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내 것일 수 없고, 자식도 당연히 내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식을 맘대로 할 수 있던가요? 우리가 나 자신을 내 것이라고 맘대로 할 수 있던가요? 처음부터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내 맘대로 하려는 것이 고통의 시작입니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지혜자들과 성현들이 우리에게 동일하게 했던 말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네 것이 아니다. 네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라!” 라고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내 맘대로 하려고 할까요? “사이의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그 사람들이 내 것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도 내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많은 지혜자들과 성현들이 동일하게 했던 말은, “‘사이의 공간’을 마련하라”는 말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칼릴 지브란의 명언을 기억해 보십시오.
서로의 잔을 채워 주십시오. /그러나 각자 자신의 잔을 마시도록 하십시오. /서로에게 자신의 빵을 나누어 주십시오. /그러나 각자 자신의 빵을 먹도록 하십시오./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십시오./ 그러나 서로는 혼자이게 하십시오./ 함께 떨며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낼지라도 각각은 혼자인 현악기의 줄처럼.
서로 가슴을 주십시오./ 그러나 상대방의 가슴을 소유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저 위대한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마십시오./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결혼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결국, 마음공부는, 수련은, 이 “사이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 공간이 없으면, 아무리 큰 집에다 좋은 인테리어를 해서 멋진 공간을 마련한다고 해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해서 멋진 결혼을 한다고 해도 서로를 성장시키는 관계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잠시는 어떨지 모르지만, 금방 이전으로 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란, (진짜 변화가 있다면 말입니다), 그 변화란, 내가 어떻게 홰가닥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매사에 “이 사이의 공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그의 대표적인 책인 <새 명상의 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화와 구원의 문제는 사실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찾고 나의 진짜 자기를 발견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이로부터 15년 전, 막 가톨릭으로 회심해서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20대 중반의 머튼은 뉴욕의 밤길을 걷다가 절친인 밥 랙스에게 “넌 앞으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당황한 머튼은, 솔직히 말해 (타임스 잡지 서평 난에 소개되는) 유명작가가 되고 싶다든가, 영어 교수가 꿈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영적인 면으로 비약시켜 어물쩡하게 대답합니다.
“몰라, 글쎄, 훌륭한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다고 해두지.”
그때 친구 랙스는 머튼에게 가차 없이 말합니다. “자네는 성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어야 했어.” 딴 세상 같은 얘기에 충격을 받아서, 머튼은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성인이 된다는 건가?” 그러자 랙스가 대답합니다. “원함으로써.”
자신은 성인이 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머튼에게 랙스가 다시 말합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야. 자네가 하나님께 동의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네를 창조했을 때 바라셨던 그 모습으로 만드신다는 것을 자네는 믿지 않나? 자네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바라는 것 뿐이야.”
이 일화는 머튼에게는 충격적일만큼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가 수도승이 되어 자서전 <칠층산>을 쓰면서 이 일을 자세하게 기록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10여년 후에 그는 <새 명상의 씨>라는 책 속에서, 우리가 조금 전에 보았던 대로,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화와 구원의 문제는 사실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찾고 나의 진짜 자기를 발견하는 문제입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성인 이야기가 나온 지 20년 동안 그는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론은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성인”, saint하면, 초기 머튼처럼 가톨릭교회에서 아주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시성된,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성인을 꿈꾸는 것은 언감생심,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성인의 삶은 너무 특별하고 고상한 삶이고 또 희생적인 삶이라서 그런 삶을 살고 있어 하지도 않습니다.
대학 시절 내내 랩에 빠져 있던 저의 둘째 아들에게 한번은 제가, “너 대학 졸업하고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고 싶지 않니?”라고 슬쩍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언지하에 한 말이, “아빠, 전 세상에서 즐기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아마 아들 눈에는 목사인 제가 세상의 즐거움은 다 포기하고 너무 재미없이 사는 사람처럼 보였나 봅니다. 사실 저는, 세상의 즐거움도 꽤나 누리면서 산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우리도 “성인”하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 세상 밖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이렇게 된 것은 가톨릭교회에서 만든 “성인” 제도 때문입니다. 성인으로 시성되기 위해서는, 남다른 깊은 신앙심과 아주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해서, 그 결과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일어나거나 혹은 순교를 당한 사람이어야 한다 등 어려운 절차가 가톨릭 교회에 있습니다.
그러나 본디 성인은,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썼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기오스> 즉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말로는 “성도”라고 하지요. (고전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문안드립니다.) 그래서 사도신경도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도의 교제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 가톨릭교회에서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머튼이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본디 의미에서의 <하기오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이”(성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예수 믿는 이유였습니다.
여러분, “성인(성도)이/가 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이 된다”라는 주제가 우리에게는 여전히 너무 무겁고 심각한 주제인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의 근본 신앙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는 신앙은 후에 초대교회가 고백하고 교리로 확정한 신학적 진술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되심은 갑자기 마법처럼 된 일은 아니라,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 심어놓으신 씨앗의 가능성, 참된 자기 자신이 되는 잠재력을 온전하게 꽃피우는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라고 했고, 또 인자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지요. 그리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런 의미에서 저는 예수님이 머튼이 말한,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이 된다”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아시고 발현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성인을 넘어 “하나님”이 되셨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보았던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요. 나중에 이 고백은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께 고백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에서 절정에 오릅니다. 저는 이런 고백들이 어떤 객관적(?) 사실이나 정보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고백을 한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셨던 성령님이 동일하게 자신 안에서도 활동하심을 믿으며, 자신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되는” 길을 그 자신도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는 진정 우리 자신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일은, 결국,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기리고,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일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것을 두 번째 예고하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셔야 했을까요? 우리는 교회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대속의 교리를 배웠습니다만, 이 문제는 단지 이 교리를 머리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 여기서는 예수님도 고난의 길을 통과해서만, 다시 말해 십자가를 통과해서만, 부활에 이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에게도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는 통과의례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읽은 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아당기며 항의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말씀하십니다.
이 베드로의 항의는, 마치 광야에서 유혹하던 사탄들처럼, 이런 속삭임이었을지 모릅니다. “당신은 부름 받은 존재로 되지 마세요. 이기적인 바램과,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얄팍한 성공과 쾌락이 가져다 줄 것들에 발을 맞춰갈 사람이 되세요. 현 체제와 현실에 적합한 사람, 그래서 현재의 상황에 위협을 제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세요. 오직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에만 마음을 쓰고, 존경과 인정만을 갈망하는 자가 되세요. 당신의 거짓자기로 살아가세요!”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이 되지 마세요” 라는 말이고 세상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그렇게 베드로를 꾸짖었는지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이 사회 속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로 낙인찍히는 당신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자신의 십자가를 제자들에게 또 다시 알립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누가 큰 사람인지,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수님이 권력을 차지하면 누가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지를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있는 그대로의 본연의 내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이를 하나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이면, 그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읽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본연의 아이, 있는 그대로의 너가 되어라. 그러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연의 아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본연의 모습일 것이요, 참된 구원, 영생도 바로 여기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오로지 의존되어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 앞에서 우리의 비천함을 온전히 내려놓을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온전히 의존하듯이 말합니다. (저는 이 의존을 우리 다안이를 보면서 요즘 매일매일 실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사랑받는 아이가 되는 것,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본연의 내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처럼, 사랑받을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때 소위 “우리의 것”(우리의 소유)에서 떨어져 “사이의 공간”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사이의 공간은 더 열리게 됩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된다, 진짜의 내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 말의 의미를 무의식중에 곡해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현재의 나는 아닐꺼야. 저기 성공한, 내가 부러워하는 아무개처럼 되면 진짜 내가 되는 길이 쉬울 꺼야.” 아니면, “내가 되는 건 좋지만 지금과는 완전히 변화된 이상적인 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나,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 심어놓으신 나의 씨앗은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아닙니다. 지금의 내가 아니고는 진짜의 내가 되는 길은 없습니다.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사이의 공간”이 열리는 것이 변화입니다. 그래서 좀더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자비롭게 나를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열린 마음과 단순함 속에서, 정성어린 귀 기울임과 따듯한 말 한마디 속에서, 상처를 감내하는 인내 속에서, 소박하고 평범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시는 “은혜의 자리” “은혜의 공간”을 발견하면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처한 고달프고 척박한 현실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은, 다시 말해, 사이의 공간은, 그런 것들이 싹 사라진 어떤 이상적인 곳에 별도로 따로 있지 않습니다. 고난의 자리, 죽음의 자리가 바로 부활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들숨 날숨을 쉬는 그 사이, 우리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생각들을 놓아두고 고요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그 사이, 일상의 바쁜 시간 속에 큰 숨 한번 내쉬고 “주님”하고 돌아서는 그 사이, 우리에게 딱 달라붙어 있어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 않은 감정과 상처 앞에서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겸손하게 맡기는 그 작은 틈 사이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스레 대답하고 계십니다. “너는 나의 아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글을 읽어 드리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거룩하려면 우리가 어떤 또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시작할 때, 문제가 시작된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지시 사항들을 우리 영혼 안에 심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다른 사람의 천국으로 가는 지도를 사용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귀함으로의 부르심을 무시한다. 칭송자들이 테레사 수녀를 보기 위해 캘커타를 방문하곤 했을 때, 그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 자신의 캘커타를 찾으세요.’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말이다. ‘당신 자신이 심겨진 곳에서 꽃을 피우라.’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존귀함을 발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