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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1:3-12
▣ 그리스도의 고난-베드로전서 1장-
1-2절에 있는 인사는 사도(보내심을 받은 자) 베드로가 저자임을 밝힌다.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다른 칭호를 붙이지 않으며 5장 1절 이하에서도 그렇다.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창설하였으며 초대 “교황“으로 봉직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여기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했음직하다 !
그의 독자들은 “나그네들“, 즉 이방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도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팔레스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도 진리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시민권이 하늘에 있었기 때문이다. “흩어진“이란 말은 농부가 씨를 뿌리듯 “분산시킨다“는 뜻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씨이며(마 13:38), 하나님은 그 뜻에 따라 원하시는 곳에 그들을 심으신다. 때때로 하나님은 씨를 흩뜨리기 위하여 박해를 사용하신다(행 8:1/행 11:19- ).
2절은 구원의 계획을 요약한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에로 구별되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택하셨다(엡 1:4). 성자 하나님이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그가 당신을 위하여 죽었을 때 당신을 구원해 놓으셨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성령께 대한 당신의 복종이 필요하였다.
베드로는 이제 이 대적하는 세상에서 어떤 류의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기록한다.
1. 소망 중의 생활(1:3-12)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소망이 없다“(엡 2:12). 그러나, 신자는 산 소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구세주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시며(딤전 1:1), 우리는 그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소망을 얻기 위하여 일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망은 그의 신령한 상속권에 속한 일부이다. 우리는 이 산 소망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요 3:5).
이 소망은 살아 있는 소망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지속적인 소망이다(4-5절). 이 소망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으며 그곳에서는 부패하거나 더럽혀지지도, 그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빼앗기는 일이 없다. 이 소망이 간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은 또한 병사에 의해 보호를 받듯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는다! 우리는 그에게 뿌리를 내린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보호하심을 받는다.
영원한 안전이란 사람들의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그는 매일 구원을 받고 있다(성화). 그는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완전하게 구원받을 것이다(롬 8:15-25). 우리의 믿음의 목표(완성, 안전)는 믿는 자의 완전한 구원일 것이다(9절).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믿는 자는 시험받는 것을 통과해야만 한다. 시험을 견딜 수 없는 믿음이란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고난은(필요하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잠깐“일 뿐이다. 영광은 영원하다. 7절은 우리 믿음의 시련을 금을 제련하는 것과 비교한다.
“시련“이란 단어는 “승인“이란 뜻이다. 케네트 위스트(Kenneth wucst)박사는 이것을 탐광자가 시험해 보려고 금광석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분석가는 그 광석이 금을 함유하고 있다고 그에게 감정해 준다. 그 감정서는 그 광석을 인준하는 것으로서 시험을 거친 소량의 견본 광석 이상의 많은 가치가 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한때 하나의 견본으로 시험을 받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이 승인을 받는다는 것은 이에 따르는 부요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우리가 견디어야 하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받을 보다 많은 영광을 뜻한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믿음, 소망, 사랑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
10-12절에서 베드로는 구약 선지자들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구원에 대하여 말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이 나타날 때나 그 시대의 특성에 대하여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다. 이들은 십자가와 왕국은 보았으나 그 사이에 있는 “계곡“, 즉 현 교회 시대는 보지 못하였다."
벧전 1:13-21
2. 거룩한 생활(1:13-21)
복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할 것임이 분명하다(요일 3:1-3).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모아야“만 하며 이러한 생각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마치 동양인이 달릴 때에 자기의 옷을 챙기듯이(출 12:11) 해야 한다.
구별된 삶을 살게 되는 또다른 동기는 말씀의 명령 때문이다(레 11:44/레 19:2/레 20:7). “거룩한“은 죄가 없는 완전함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생을 사는 동안은 불가능한 조건이다(요일 1:8-10). 이것은 따로 떨어져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을 향해 구별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특성을 지녀야만 한다.
세번째의 동기는 하나님의 심판이다(17절). 하나님은 오늘날 그의 자녀들을 징계하시며,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그들이 행한 것을 심판하신다(고전 3:1-). 그는 “편애“가 없으시며 모두를 똑같이 다루신다.
18-21절은 헌신한 생활에의 네번째 동기를 제시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값이다. 구원을 받기 전의 우리의 생활은 공허하고 무의미한(헛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삶은 그로 말미암아 충만하며 행복하다 ! 우리의 구원은 값주고 산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흠 없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필요로 하였다(요 1:29).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계획된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우리를 그 계획에 포함시키셨다. 우리는 더욱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께 양도하는 것보다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는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고전 6:15-20)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크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별되게 드려진 삶을 사는 것이다. 대단히 세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서 그들의 간증은 있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그들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벧전 1:22-25
3. 화합된 삶(1:22-25)
구원은 우리에게 산 소망과 거룩한 삶을 살려는 욕망,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의 놀라운 교제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인도하셨고, 동일한 영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심으셨다(롬 5:5/요일 3:16- 참조).
베드로는 22절에서 사랑에 대한 두 단어를 사용한다. 형제 사랑과 신적인 사랑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형제 사랑을 소유하지만 신령한 힘을 발휘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 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필요가 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형제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지만 신적인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조절을 받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베드로는 “거듭난“이란 말을 좋아하여 1장 3절과 23절에서 그것을 사용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소망에로 거듭나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형제에의 사랑에로 거듭나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하신 것처럼(마 13:1-9/마 13:18-23), 말씀을 씨에 비유한다. 씨앗처럼 말씀은 작아서 중요하지 않은 것같이 보이지만 그 속에 생명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말씀은 효과를 보기 위하여 심겨져야 하는데 마음에 심겨지면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며 말씀이 산출하는 열매도 영원하다. 그러나 육신의 일들은 지속되지 않는다. 베드로는 여기서 이사야 40장 6-8절을 언급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영원히 지속되지만, 육신의 힘으로 행하는 것은 무엇이나 잠시 동안은 아름답게 보이나 곧 사라지고 만다.
그리스도인의 화합은 주님과 교회에, 그리고 신자 자신들에게 축복이 된다(시 133편). 만일 모든 신자가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거기엔 화합이 있을 것이다."
벧전 2:1-10
▣ 우리는 누구인가-베드로전서 2장-
1절의 “그러므로“는 이 부분을 1장 23절의 주제, 곧 “거듭남“과 연결시킨다. 2장 1절-3장 7절의 핵심 사상은 “순복“이다(2:13/2:18/3:1/3:5).
1. 우리의 하늘 특권(2:1-10)
하나님의 가족의 자녀들(1-3절)-“갓난 아이들“이란 말은 누가복음 2장 16절에서 아기 예수께 사용된 말과 같다. 죄인이 분명 거듭났으면, 그는 젖을 필요로 하는 유아이다(고전 3:1-3/히 5:13-14). 사실상 신령한 생활의 증거들 중의 하나는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굶주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성장했다면 우리는 젖에서 단단한 음식으로 바꾸게 되며(마 4:4), 가족 내에서 “청년들“과 “아비들“이 된다(요일 2:12-14). 우리의 양식은 인간의 철학이나 교훈이 섞이지 않은(고후 2:17) 순수한 말씀이어야 한다. 한번 주님의 축복을 맛본 사람이면(시 34:8) 육신의 옛 죄들, 곧 적의, 속임수, 위선, 시기 등을 벗어버리려 한다.
하나님의 성전의 돌들(4-8절)-베드로는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일은 결코 없다(마 16:18). 그는 그리스도를 돌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한다(돌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자료는 스가랴서 주해 참조).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되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었다(마 21:33-46/사 28:16/행 4:11/시 118:22-23 참조).
우리는 산 돌이신 예수 위에 놓여진 산 돌들로서(1: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신령한 성전을 이루어 가고 있다(엡 2:19-22). 우리는 또한 이 성전의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령한 제사를 드린다(히 13:15-16). 돌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버린 바되셨으나,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다. 불신자들은 이 돌에 걸려 넘어져 언젠가 그것에 의하여 분쇄될 것이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그는 보배이시다.
새로운 나라의 시민들(9-10절)-신령한 의미에서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이스라엘“이다(출 19:6/갈 6:16 참조). 이것은 구약의 약속들이 왕국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천상적이고 신령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오늘날의 교회의 관계는 이스라엘이 옛 언약 하에 있던 것과도 같은 것이다.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되신 제사장이시므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소유된“은 “자신에게 속한“이라는 뜻이다(엡 1:4).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벧전 2:11-25
2. 우리의 지상적 책임(2:11-25)
제도에 대한 순복(11-17절)-나그네와 행인(외국인과 추방자)같은 우리는 이 땅의 정부에 대하여 어떤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베드로는 우리에게 법에 순종해야 할 훨씬 더 큰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구원받지 못한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를 삼가야 하고 우리의 행동(대화)은 정직해야 한다(알맞고 적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악한 말을 잠잠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12절은 우리의 선한 일이 실제로 잃어버린 자들을 그리스도께 이끌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권고하셔서 구원하시는 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존경할 수 없을지는 모르나 직분은 존중해야만 하며 법에 순복해야만 한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자유하지만 그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갈 5:13). 로마서 13장을 읽고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 권고하는 것을 보자.
사환들과 주인들(18-25절)-그는 여기서 구원받아 지교회의 회원이 된 가정 노예들에게 말한다(엡 6:5-8/골 3:22 참조). 베드로나 바울이 제도적인 면에서 노예 제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되는데,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오히려 그들은 노예들에게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며, 할 수 있거든 자유를 얻으라고 격려한다.
사환들은 주인들에게 순복과 존경을 표해야 하며, 비록 주인이 부당하여 따르기가 힘들지라도 그리해야 한다. 이와 같은 원리는 오늘날 고용된 일꾼들에게 적용된다. 구원받지 못한 감독들은 흔히 그리스도인 종업원들에게 “까다롭게“ 굴거나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박해하기를 좋아한다. 이럴 때에 가장하기 쉬운 일은 돌아서서 다투는 것인데,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베드로는 구원받은 자나 잃어버린 자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잘못으로 형벌을 받는다면 이를 “감수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만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이를 “견딜 수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중요한 말씀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베드로는 고난을 회피할 길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인데(마 5:9-12 참조), 빛을 발한 것 외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당하는 고난을 말한다.
19-20절에 나오는 “아름다우나“와 “아름다우니라“는 '말은 사실 은혜라는말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고난을 참아야 한다면 무슨 은혜가 되겠는가? 당신이 옳을 때 참는 것이 참된 은혜가 된다. 이와 비슷한 개념을 누가복음 6장 32-36절에서 찾아보라.
베드로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이유의 한 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양심을 들고 있다. 21절에서는 두번째 이유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안락한 삶이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또한 시련이 올 때 놀라서도 안 된다(4:12-).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이제 베드로는 고난에 있어서 우리의 모범으로 그리스도를 지적한다. 베드로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구원받게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죄인은 죽은 자이므로, 죽은 자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고난당하심으로 어떻게 견디며,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는지에 대한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증인으로서(5:1), 주님은 죄를 범치 않으셨으나 무고하게 학대당하신 것을 알고 있었다.
말씀과 태도와 행위에 있어서 주님은 완전한 본을 세우셨다. 그는 논쟁하지 않으셨으며 돌이켜 싸우지도 않으셨고, 욕을 욕으로 갚지도 않으셨다. 그는 단순히 자신을 그의 아버지께 부탁하셨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셨다. 그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갈 2:20), 세상이 우리를 핍박할지라도 그가 행하셨던 대로 우리도 행할 수 있게 하신다.
베드로는 다시 십자가로 나아가(24-25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롬 6장). 우리가 죽음과(2:24) 부활(1:3)에서 그리스도와 동일시된 것이 우리로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한다. 그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의 질병을 치유받게 되었다. 24절은 육체를 치료하는 일과는 관계가 없다. 영혼의 치료를 말하는 것이다.
목자와 양의 비유(25절)가 베드로에게는 더욱 의미가 컸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에 따하여 가르치시는 것을 들었고(요 10장), 그리스도께서 양을 치라고 그에게 명하셨기 때문이다(요 21장). 잃어버린 죄인들은 곁길로 간 양들이며(사 53:6/눅 15:3-7),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그를 찾아서 구원하신다. “감독“이란 말은 “위에서 보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며 또한 악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파수서신다.
베드로는 믿는 자에 대한 인상적인 표현들로 본 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갓난 아이이며 성전의 돌들이고, 제사장이며, 택하신족속이요, 소유된 백성, 거룩한 나라며, 하나님의 백성이다. 또한 나그네와 행인이며 주의 본을 따르는 제자들이요, 목자의 돌보심을 받는 양들이다."
벧전 3:1-7
▣ 어떻게 살것인가-베드로전서 3장-
본 장은 순복에 대한 주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으며(3:1/3:5/3:22),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세 영역에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1. 가정에서의 순복(3:1-7)
구원받지 못한 남편-이것은 분열된 가정이다. 아내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데 남편은 신자가 아니다. 아내는 구원받지 못한 남편을 어떻게 주께로 인도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 아내-그녀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하며, 그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해야 한다(엡 5:22/골 3:18). 잔소리를 하거나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 ! 그녀는 헌신된 생활을 하여 “아무 말 없이도“ 구원얻을 수 있도록, 즉 설명하지 않아도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생활을 지켜보고 있으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향하여 있으면 그들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내의 행동은 정숙해야만 하므로, 곧 “마음에 숨은 사람“에 강조를 두어야 하고 외적인 치장으로 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는 여인들에게 어떤 보석도 사용하지 말라고 금지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행을 따라“ 극단적으로 세상적이 되는 경우를 금지시키고 있는 것이다(딤전 2:9-12 참조). “머리를 꾸미고“는 머리 모양을 이채롭게 하여 금으로 장식을 하는 것 등을 말한다. “아름다운 옷“이란 일반적인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화려하게 장식한 옷, 이목을 끄는 “특별히 사치스러운 옷“을 뜻한다.
그리스도인 여인들은 세상적이지 않아도 매력적일 수 있다. 사실상, 세상의 극단적인 패션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을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하였고 증거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참된 아름다움은 내적인 것이며(4절), 그 모범으로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들고 있다. 그녀는 아리따운 여인이어서 여러 왕들이 그녀를 남편으로부터 탈취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호와께, 그리고 주 안에서 남편에게 헌신했다. 창세기 18장 12절은 그녀가 아브라함을 “주님, 주인“으로까지 불렀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맹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근거한 순복을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여인이 주님과 남편에게 헌신적일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관여하시기 때문이다(6절에 나오는 “놀라다“는 말은 “공포“를 뜻한다). 물론 그리스도인 미혼 여성은 그녀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을 만하지 못한 사람과 결혼해서는 결코 안된다.
그리스도인 남편-“이와 같이“는 남편의 입장에서도 사랑과 존경의 같은 태도를 지녀야함을 시사한다. 결혼이란 쌍방 통행로이다. 남편들은 그들의 결혼이 무지함에 의거해서는 안 되며, 주님에 대하여, 그리고 상대방 짝에 대한 지식이 성장한 데에 근거해야만 한다.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한다. 그들은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들인데, 그것은 자녀들이 주님의 기업이라는 것을 뜻하는 바이다. 그리스도인 배우자 사이에 무슨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들의 기도가 방해를 받을 것이며, 그 일은 가정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베드로는 부부가 단순히 함께 살 뿐만 아니라 함께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벧전 3:8-14
2. 고난당할 때의 순복(3:8-14)
8절은 그리스도인 가족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묘사한다. 야고보서 4장과 대조해 보라. 9-14절에서 베드로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하여 다룬다. 이것은 우리가 견뎌야 하는 매일의 고난으로, 4장에서 다루고 있는 특별한 고난인 “불 시험“이 아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할 때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복을 끼쳐야 한다(9절/ 눅 6:22-28)-우리는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한다. 중상가들과 박해자들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인내와 은혜로 대처하는 것이다. 남은 일은 하나님께 맡기자!
순전함을 유지해야 한다(10-11절/ 시 34:12-16)-“금한다“는 말은 “피한다“는 뜻이며, “좇으라“는 말은 “분투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살피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12-14절)-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들을 알고 계시며 우리의 간구를 듣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불평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마 5:11-12).전 3:15-22
3. 그리스도께 대한 순복(3:15-22)
그리스도를 당신의 마음의 보좌에 모시라! 그가 우리의 생활을 관할하시면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가지는 소망에 대하여 사람들이 물을 때 언제나 대답할 수가 있을 것이다(막 13:11). 사람들이 우리를 욕하고 비방될지라도 순복하는 마음과 선한 양심은 합력하여 평강을 가져다 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비방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마음을 아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사 8:12-13).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무고하게 고발당하셨으나 아버지께 그 문제를 맡기셨던 그의 고난을 그들에게 다시 상기시킨다.
“옥에 있는 영들“의 문제는 오랜 동안 연구자들을 혼란하게 했다. 이 구절에 있는 주된 교훈을 꼭 명심하자. 그리스도는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다(22절)!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선한 양심을 다루고 있는 삽입 구절이다.
이 문제 구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어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있는 죽은 자들에게 구원받을 두번째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나, 이것은 성경 전체와 모순된다. 다른 이들은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죽은 자들로부터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동일한 성령이 노아를 통하여 전파하였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옥(죽은 자들의 세계)에 있는 잃어버린 사람들의 영을 찾아가셔서 그가 승리하신 것을 알리셨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은 찾아가셨으나 다른 사람들은 찾아가지 않으셨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없다.
“옥에 있는 영들“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사람의 딸들과 어울린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타락한 천사들로서, 유다서 1장 6-7절에서 언급하는 대로 “다른 색을 따라가던“ 자들이라는 설명이다.
3장 19절의 “옥“이란 말은 베드로후서 2장 4절에 나오는 심판의 장소인 “어두운 구덩이“를 가리킨다. 홍수를 일으키게 한 까닭이 하나님의 질서를 이처럼 위반한 데 있었으며, 베드로가 노아를 언급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한 베드로의 주제가 천사들이 그리스도께 순복하였음을 말하려는 것임에도 주목하자(22절). 이 천사들은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아 심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사이에 옥에 있는 이런 천사들을 찾아가셔서 그가 사단에 대해 승리하신 것을 알리셨다. 3장 19절에 나오는 “전파하다“는 말은 “복음을 전파하다“는 말이 아니라 “선전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운명과 또한 모든 천사들과 권위들에 대한 그의 승리를 알리셨다.그리스도는 이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 4:8), 신자들이 머물던 낙원을 비우시고(눅 16:19-31) 이들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셨다. 어떤 사람에게도 사후에 구원받을 제 2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언질도 나와 있지 않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노아와 세례(침례)를 연결시킨다. 홍수는 사실상 세상을 물로 세례(침례)를 베푼 것이었고(벧후 3:5-7) 이제 세상은 불의 세례(침례)를 받기 위하여 예비되는 중에 있다. 베드로는 세례(침례)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하거나, 물이 죄를 씻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세례(침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세례(침례)를 통해 주님께 순복하는 것은 내면의 문제, 곧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문제이다.
성경에서 세례(침례)는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을 표상한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침례)를 받으신 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것을 예고한 것이었다(눅 3:21-22/눅 12:50).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의 표적으로서 요나의 예를 드셨다. 악한 세상을 장사지냈던 물은 노아를 안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물이 그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방주가 그를 구원하였다.
창세기 8장 4절에 의하면 방주는 일곱째 달의 17일에 땅에 닿았는데, 유대인의 민력은 9-10월에 시작되므로 이 날은 4월 17일이 되며,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다! 그러므로, 노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부활의 표상이요, 이 사건은 기독교 세례(침례)에 대한 모형이다. 노아가 비둘기를 내보냈던 것과 그리스도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셨을 때 비둘기가 그 위에 머문 것에 또한 유의하자.
이 장은 매우 복잡한 장이어서 주된 교훈을 명심하도록 하자.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시므로 우리는 그에게 순복해야 한다.
선한 양심이 시험 중에 있는 당신을 강하게 한다(16, 21절).
기독교의 세례(침례)는 홍수로써 표상되는데, 그것은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을 예증하는 것이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벧전 4:1-6
▣ 경고, 위로, 소망-베드로전서 4장-
4장과 5장에서는 고난중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룬다. 베드로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당면하는 일상적인 고난의 문제(비난, 논쟁 등)를 다루었으나 이제는 공식적인 로마의 박해로 말미암은 “불시험“이 곧 닥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본 장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난을 통과할 때 그에게 임할 수 있는 놀랍고 복된 세 가지 결과들을 말해 준다.
1. 고난은 성도를 순전케 한다(4:1-6)
삶이 안이하면 우리는 부주의함과 죄 가운데로 빠지게 되지만, 고난은 우리의 가치관과 목표를 변경시킨다. “불 시험“이란 금을 정련하는 용광로이며 하나님께 불순물을 제거하시도록 해준다(시 66:10). 고난이 우리를 위하여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고난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동일시하게 한다(1절)-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그와 함께 고난을 당하면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그를 더욱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며, 또한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이 죄에 대한 승리임을 알게 하려고 그들을 격려한다. 그리핏 토마스(Griffith-Thomas)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로마서 6장에 대한 베드로 역본“이다.
고난은 인생이 짧다는 것을 알게 한다(2-3절)-우리는 생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다가 고난이 닥치면 그 가치관이 변하고 만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짝하여 죄를 짓다가, “남은 때“를 낭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죄악된 인간의 뜻 안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삶을 영위해야만 한다.
고난은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알려 준다(4-6절)-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판단에 따라 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산다. 세상은 우리가 더이상 죄 중에서 그들과 달음박질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우리를 비방한다. 하지만 이들의 비방이 우리를 낙심시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날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계산을 해야 한다!6절은 다음과 같이 의역할 수 있겠다. “지금은 육체적으로 죽어 있으나 영으로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 있고 이 생에서는 세상에게 심판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죽기 전에 복음을 듣고 믿었다. 이들은 그들의 믿음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죽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다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 떠나가는 것이 세상을 좇다가 잃어버린 바되는 것보다 낫다.“ 4장 6절과 3장 19-20절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사후에 잃어버린 자를 위한 제 2의 기회가 있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죄와 고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취하신 바와 같은 태도로 “자신들을 무장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만일 신령한 태도를 갖지 못한 채 고난을 맞게 된다면, 그 고난은 우리를 순전하게 하는 대신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벧전 4:7-11
2. 고난은 교회를 결속시킨다(4:7-11)
베드로는 “근신하라, 진지한 마음을 지니라“고 권면하기를 좋아한다(1:13/5:8). 그는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과(5:4), 고난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피차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기도는 이러한 책임들 중의 하나이다.
열심 있는 사랑도 이러한 책임 중의 하나이며, “열심으로“라는 말은 “손을 내뻗친“이란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한계점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은 성도들을 비방하는 것만으로는 족하게 여기지 않으나, 성도들은 피차 비방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성도들의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다.
베드로는 그들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가정도 개방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친절이 급속도로 사라져 가는 미덕으로 되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은사들을 발휘하며 주님을 섬겨야 할 필요가 있다. “각양“이란 말은 “여러 색깔의 다채로운“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필요에도 대처할 수 있으며 어떠한 “색상“과도 잘 어울려 되살아나게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들을 주시며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
벧전 4:12-19
3. 고난은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4:12-19)
시련들을 기대하라(12절)-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고난은 낯선 객이 아니라, 기대되던 바였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받는 시련은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다는 경고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편이시다.
시련 중에 기뻐하라(13-14절)-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 한 가지 예로, 시련이 올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며 주님과 함께 고난을 나눈다(빌 1:29 참조). 우리가 지금 견디는 고난은 그가 오실 때 우리가 나누어 받을 영광의 서곡일 뿐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영은 고난받은 신자 위에 “새롭게 하는 능력으로 머물러 계신다.“ 세 명의 히브리 자녀들은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단 3:19-30).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불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다니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은혜를 주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시련 중에서 부끄러워하지 말라(15-16절)-로마의 법은 시민들에게서 황제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요구하였다. 일 년에 한 번씩 시민들은 분향하며 “가이사는 주님입니다“라고 말했으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여(3:15 참조) 가이사 앞에 엎드리는 것을 거절하였다.
로마의 관리가 땅이나 벽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쓰고 거기에 침을 뱉으라고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만일 거절하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님으로써(그리스도인) 그들의 친구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였으나,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인가! 다른 어떤 이름보다 더 높은 이름이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시련 가운데서 증거하라(17-18절)-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교회에 시련을 보내신다면 이것은 어느 날 잃어버린 자를 심판하시리라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지금 시련을 당하나 후에 영광을 받는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들은 지금 영광을 받으나 후에는 고난을 받는다. 잃어버린 죄인이 알게 될 유일한 하늘나라는 오늘날 여기 이 땅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집(교회)에서 시작하신다(겔 9:6 참조). 만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 시련의 시작이라면, 잃어버린 자들이 심판을 받을 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의로운 사람들(신자들)이 “어렵게“ 구원을 받는다면 불경건한 사람들에게는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잠 11:31 참조)
자신을 하나님께 위탁하라(19절)-여기서 “부탁한다“는 말은 공식적인 은행 용어로서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일정 금액을 예금으로 맡긴다는 뜻이다. 이 말은 1장 7절에 나오는 “금“의 예화와 절묘하게 연결된다. 하나님은 불순물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불시험을 보내시며 우리는 안전하게 보호받기 위해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데, 우리는 주님이 실패하실 수 없음을 안다.
그런데 우리가 “선을 행하는 가운데“ 이 일을 하는 것임을 주목하자. 즉,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을 그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매일 매시간 자신을 양도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우리를 비난하는 잃어버린 자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불 시험을 통과하게 되는 듯하다. 세상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은 것이며, 종교적인 상황도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싫어해 왔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미워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미워할 것이다(요 15:18-21). 만일 우리가 타협한다면 박해는 피하게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축복과 영광은 잃을 것이다."
벧전 5:1-4
▣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비추어 본 봉사사역-베드로전서 5장-
베드로는 그의 격려 편지를 마침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세 가지로 권면한다. 본장에서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던 때의 복음서에 나타난 경험들을 몇 군데 참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목격하였으며(1절), 양을 돌보라는 사명을 받았다(2절/ 요 21:15-17). 그리스도께서 친히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겸손하게 씻기신 것을 보았으며(5절/ 요 13장), 사단이 배회하고 있었을 때 그는 깨어 있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8절/ 막 14:37).
이는 마치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증거하시기 위해 베드로의 기억을 더듬어서 과거의 이런 경험들을 사용하시는 듯하다(12절).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적절했음을 발견하였고, 하나님의 은혜가 또한 그들도 보존하시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1. 충성하라(5:1-4)
이 권면은 일차적으로는 목회자들에게 준 것이다. 목사(목자), 감독(감찰하는 사람), 장로(성숙한 지도자)가 모두 같은 직분을 가리키는 것임은 앞에서 보았다(행 20:17/행 20:28/딤전 3:2/딛 1:5-7). 베드로는 자신을 교황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함께 장로된 자“라고 부르며, 의도적으로 권면을 들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다. 베드로는 왕국에서 자기의 지위 문제로 염려했던 때가 있었다!
베드로는 목회자들이 사람들의 지도자들로서 보다 큰 고난을 통과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면으로 그들을 격려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그들을 보존하실 수 있다고 상기시키는 것과, 영광은 언제나 고난에 뒤따르는 것이라고 상기시킨다. 사실 이 두가지 주제가 베드로전서를 수놓고 있다.
그들의 사역-“양무리를 치라.“ 이 일은 먹이는 일, 인도하는 일, 격려하는 일, 징계하는 일, 지키고 보호하는 일을 포함한다. 목자는 감독을 하며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 만일 양이 목자를 인도한다면, 또는 양들이 각기 제 길로 간다면 양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의 동기-“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 목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양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해야 할 직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봉사하여서는 안 된다. 결코 돈이나 명성이나, 권력이나 이기적인 소득이 되는 “더러운 이“를 위하여 봉사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일에 열심(준비된 마음)이 있어야 하며 의욕이 없거나 게을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의 자비-지도력이란 독재권을 뜻하지 않는다. 목회자들은 감독자이지 대군주가 아니다! “맡기운“이란 문자적으로는 “당신에게 부과된 몫“이란 뜻이다. 일정 지역에 사는 모든 신자들은 교회에 속했지만 그러나 다른 장로들의 지시에 따라 이곳 저곳으로 옮기는 양무리는 거의 없었다. 신약에는 한 성읍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하나의 대교회를 이루기 위해 연합한 예는 한 경우도 없다.
제도적 일치를 갖지 않아도 신령한 연합은 가능하다. 목회자들은 본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결국 사람들을 따라오게 할 최선책이 그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은 존경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경건한 생활과 희생적인 봉사 사역으로 얻는 것이다.
그들의 상급-땅에서는 많은 영광이 없을 것이나, 하늘에서는 영광이 있을 것이다. 각각의 목자는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복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다."
벧전 5:5-7
2. 겸손하라(5:5-7)
“젊은 자들“은 문자 그대로 교회의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영적 지도자들을 따르는 모든 회원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겠다(히 13:17).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던 날 저녁을 언급한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겸손한 정신으로 통제받는다는 것, 곧 종이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만한 자, 이기주의자들을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잠 3:34/약 4:6).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고 그는 권고한다. “이 고난의 때에 하나님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그 준비됨을 보시고 그가 너희를 높이실 것이다.“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라고 요청했던 배 위에서의 밤을 생각나게 한다. 물론 예수님이 돌보신다! 사단은 “불 시험“이 하나님의 무관심에 대한 한 증거라고 믿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고 말한다."
벧전 5:8-11
3. 깨어 있으라(5:8-11)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는 것을 베드로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은 몇 번이나 사단이 그를 따라 다닌다고 베드로에게 경고하셨으나 이 경고를 마음에 간직하지 못하였다. “잠에 빠짐으로써“ 사단에게 역사할 기회를 주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마 13:25/마 13:39).
사단은 “대적“이라고 불리워지는데, 그것은 “법정에서 참소하는 자“란 뜻이며, “마귀“라는 말은 “비방자“란 뜻이다.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한다(욥 1-2장/ 슥 3:1-5/계 12:10). 사단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의 입을 사용하여 거짓되이 우리를 비방한다(벧전 2:12/벧전 3:16/벧전 4:4/벧전 4:14). 사단은 속이는 뱀처럼(창 3장), 또는 삼키려는 사자처럼 다가온다. 사단은 거짓말장이요 살인자이다(요 8:44).
그리스도인이 사단을 무찌르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경계하라-눈을 크게 뜨고, 경계를 느슨하게 풀지 말라. 다윗이 이완되어 전선에서 물러나자 죄에 빠져버렸으며, 베드로가 자신감을 갖자 그는 잠에 빠져 사단의 함정에 떨어졌다.
대적하라!-이것은 모두가 적을 향해 대진하고 서 있는 군대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을 대항하는 데에 연합해야 한다(빌 1:27-30). 이러한 행렬에 끊어진 곳이 있으면 사단은 공격할 기회로 삼는다.
믿으라!-우리는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한다. 즉, 그리스도의 승리를 신뢰하는 것이다. 사단은 거짓말을 제일의 무기로 사용하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진리로 사단의 거짓말을 대결해야 한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성령의 검을 사용하셨다(마 4장).
기억하라!-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시련들을 통과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사단이 우리에게 오직 우리뿐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만 뽑아내셨다고 믿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실의에 빠뜨려 패배시킬 것이다.
베드로의 주제는 은혜였는데(5:12), 따라서 성도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킴으로써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인은 “은혜에서 은혜로“ 향하여 간다(요 1:16).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구원하시는 은혜로 시작한다(엡 2:8-10). 그리하여 그것은 봉사하는 은혜로 계속되고(고전 15:9-10), 다음으로는 성결케 하시는 은혜로 이어지는데(롬 5:17/롬 6:17), 하나님은 희생적인 은혜(고후 8:1-9), 노래하는 은혜(골 3:16), 말하는 은혜(골 4:6), 강하게 하시는 은혜(딤후 2:1), 그리고 고난받는 은혜(고후 12:9)를 주신다. 야고보서 4장 6절은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고 약속하고 있다.10절은 은혜가 생활의 훈련을 통하여 공급된다고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로 고난을 당하도록 허락하심으로 그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으실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난당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한계에 이르고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은혜는 필요를 느끼는 사람에게만 공급된다. 먼저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다음에는 고난당할 때에 무장하게 하시며, 확신을 주시며, 우리의 터를 견고히 세우고 계신다.
“온전케 하시며“라는 말은 마태복음 4장 21절에서 베드로가 “그물을 깁고“ 있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이 말은 “봉사를 위하여 준비를 갖추다“라는 뜻이다. 고난은 신자를 성장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미래의 봉사를 위하여 준비를 갖추게 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물을 깁게“하시는 최선책이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받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결론지으면서(5:12-14) 실라와 마가가 그와 함께 있음을 시사한다. 실라는 바울의 조력자 중의 일인이었으며(행 15:22-), 우리가 추측한대로 바울이 로마에 없었다면 베드로와 실라가 함께 일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가 요한이 있었다는 것은 바나바와 마가, 그리고 실라가 연루된 “과거의 불화“가 용서받고 잊혀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벨론“은 아마도 로마를 칭하는 다른 이름일 것이지만, 어떤 이들은 베드로가 고대 바벨론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