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후회스러운 장소는 어디일까. 아마 ‘가데스 바네아’일 것이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척박한 광야에서 38년을 더 유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신명기 2:14, 민수기 14:33~34). 과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출애굽한 지 2년이 흐른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란 광야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에 이르렀다. 그곳은 가나안과 매우 가까운 접경지역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 땅(가나안)을 여러분에게 주셨소. 그러니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올라가서 가나안을 차지하시오.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신명기 1:21). 애초에 하나님께서 출애굽 2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의견을 냈다. 가나안을 미리 정탐하여 작전을 세우자고 건의했다.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지, 어느 성을 먼저 점령해야 할지, 구체적이고 효율적인 군사적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이에 모세는 각 지파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선발하여 가나안으로 파견했다(신명기 1:22~23, 민수기 13:1~16).
열두 정탐꾼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출발하여 가나안 땅 깊숙한 곳까지 올라가 탐지했다. 가나안 땅의 최남단인 신 광야(Zin)에서부터, 북쪽 경계 지역인 하맛(Hamath)과 르홉(Rehob)에까지 탐지했다. 그 중간 지역인 헤브론(Hebron) 근처 에스골 골짜기에서는 각종 과일도 땄다. 총 40일 동안 가나안 남북지역 전체를 관통하여 살펴본 것이다(민수기 13:21~25).
가나안 땅에 대한 열두 정탐꾼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하나님 말씀대로 그곳은 최고의 경작지였다. 정탐꾼들은 석류와 무화과, 그리고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들어야 할 만큼 커다란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보여주었다. 그곳이 매우 비옥하고 기름진 땅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민수기 13:23, 26~27).
그러나 문제는 그 땅의 거민들이었다. 가나안 남쪽 지방에는 아멜렉 족속이, 산간 지방에는 헷, 여부스, 아모리 족속이, 해변과 요단 계곡에는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힌 약탈자들이다. 힘이 센 대장부였고, 신장이 크고 장대한 거인족이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메뚜기 같았다(민수기 13:28~29, 32~33).
여기서 ‘능히 이긴다’는 여호수아와 갈렙, ‘능히 이기지 못한다’는 열 정탐꾼의 의견으로 나뉘었다. 능히 이기지 못하는 요인은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는’에 초점이 맞춰 있었고, 능히 이긴다는 요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에 초점이 맞춰 있었다(민수기 13:33, 14:9).
그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제히 아우성을 쳤다. 밤새도록 통곡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비방했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여 이집트에서 이곳으로 끌고 왔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 땅으로 끌고 와서 칼에 맞아 죽게 하는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소리쳤다(민수기 14:1~4, 신명기 1:27)
하나님께서 그들이 미워 거인족의 손에 죽게 하려고 이집트에서 건지셨는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그들의 신음 소리에 응답하신 것이다(출애굽기 6:5~6).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학대와 고역의 땅에서 기적을 일으켜 해방시켜 주셨고,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약속해 주셨다. 광야 길을 걷는 내내 아버지가 자식을 돌보듯, 불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안아서 가나안 접경지역인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이르게 하신 것이다(신명기 1:31).
그러나 당사자들은 되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원망하고 비방했다. 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우리는 당신들의 거울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옛날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겪은 일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모세 때에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인도를 받아 홍해를 건넜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 대부분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 이런 일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우리도 그들처럼 악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 우리는 그들처럼 시험하지 맙시다. ··· 우리는 그들처럼 불평하지 맙시다. 그들이 당한 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으며 세상 끝날을 눈앞에 둔 우리에게 하나의 경고로서 기록되었습니다.
(현대인의성경 고린도전서 10:1~11)
우리는 광야에 있지만 이를 항상 인지하지 못한다. 실제 메마른 사막이 아닌 한국 또는 유럽, 아메리카 등의 대륙 어딘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짜 광야를 걷고 있진 않지만 ‘믿음’의 광야를 매일같이 걷고 있다. 약속의 땅에 도착하기까지 원치 않는 길과 상황에 마주할 때도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음식이 넉넉하길 원했고, 삶이 안락하길 원했다. 육체의 소욕이 충족되길 바랐다. 원치 않는 상황과 어려움이 닥치면 가나안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할 만큼, 그들의 마음은 약속의 땅이 아닌 광야에 있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이 그들의 머릿속에 가득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오늘날 천국을 목표로 두고 광야를 걷고 있는 우리의 믿음을 되뇌게 한다. 만약 지금의 광야 길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공허해 보이고, 그 약속이 멀게만 느껴지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고,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다른 것에 초점을 둔다면 실격자라고 말한다(고린도후서 13:5).
광야는 잠시 머무르는 곳이다.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일정 기간 스치는 장소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언제라도 말뚝을 뽑고 이동해야 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기초를 박고, 그만 짐을 풀고 정착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언제든 가나안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지난날 내가 광야에 남긴 발자취를 되돌아보자. 그동안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이끄셨고, 어떻게 도와주셨으며, 어떻게 보호해주셨고,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말이다. 여러 가지 상황에 처할 때마다, 출애굽 1세대와 같은 완고한 태도와 불평, 믿음 없는 생각과 말과 행동, 원망의 소리에도 어떻게 참아주셨는가.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할 때, 그럼에도 나로 인해 웃고, 나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나로 인해 애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는가(스바냐 3:17). 내가 관심의 전부이고, 삶의 전부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애달프셨겠는가(로마서 5:6~8, 이사야 49:15).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손을 잡고 광야를 통과하고 계신다. 이제, 광야를 통과하면 마음 속에서 그리던 황홀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요한계시록 21:4). 기억하자. 광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내던지고 잊어버리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포기하고 주저앉을 곳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의 상급이 기다리는 약속의 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할 곳이다(디모데후서 4:5~8, 요한계시록 22:12).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광야의 의미를 깨달았더라면, 또 오늘날 우리들이 광야의 바른 의미를 깨닫는다면, 이 길이 그토록 괴로운 장소만은 아닐 것이다. 단언컨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지금의 이 광야 길은 특별한 여정인 것이다.
https://youtu.be/UcK6Zq8eM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