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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四十五
이윤검(李允儉) 묘갈명(墓碣銘) - 김안국(金安國)
공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윤검(允儉)이고, 자(字)는 자문(子文)이며, 본관은 합천(陜川)이다. 고조(高祖)는 가선 대부(嘉善大夫) 호조 전서(戶曹典書) 이운호(李云皓)이고, 증조(曾祖)는 봉순 대부(奉順大夫) 지영주(知永州) 이사방(李斯芳)이다.
할아버지는 선략 장군(宣略將軍) 달량 만호(達梁萬戶) 증(贈) 병조 참의(兵曹參議) 이지로(李智老)인데,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어 돕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힘입었다. 아버지는 증 병조 참판(兵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이순생(李順生)이다.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고향에서 글을 가르쳤는데 학도가 모여들었고 저명한 자가 많았다. 회덕 현감(懷德縣監) 유맹지(柳孟智)의 딸에게 장가들어 먼저 4남 2녀를 낳고 가장 뒤에 공을 낳았다.
경태(景泰) 신미년(辛未年, 1451, 문종 원년)에 공이 태어날 때 집에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 아이의 골상(骨相)과 기질(氣質)도 보통과 달랐으므로 부모와 종족(宗族)이 다 기이하게 여겼다. 조금 자라서는 장난치며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글을 읽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 익혔다. 약관(弱冠)이 못되어 참판공(參判公)이 별세하니, 공은 미처 어버이를 봉양하지 못하고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데 없음을 슬퍼하였다.
문학에 뜻이 없었는데, 뒤에 무예를 시험해 보고 익히기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해를 지나서 드디어 성화(成化) 임진년(壬辰年, 1472, 성종 3)의 무과에 뽑혔는데, 과시(科試)를 관장한 자가 그 문재(文才)와 무재(武才)를 알고 곧 천거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궁벽한 시골의 한미한 집안사람으로서 어느 날 거친 옷을 벗고 일방1)(一榜)에 우선하여 화선직(華選職)에 발탁되고 성종(成宗)도 총애하며 신임하였고 맡겨서 시킬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불렀으므로 동료 사이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476, 성종 7)에 다시 중시(重試)에 뽑혔다.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고을을 맡기를 청하여 사천 현감(泗川縣監)으로 나갔는데, 자기를 바르게 하고 일을 행하며 옳으면 용감히 나아가고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내 시기하고 참소(讒訴)하는 자에게 중상을 당하여 파직되어 벼슬이 없이 집에 오래 있다가 다시 기용되어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또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흥양 현감(興陽縣監)이 되었는데 재임 중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 상기를 마치고 강계부 판관(江界府判官)에 제수되고 장흥고 영(長興庫令)ㆍ선공감 판관(繕工監判官)ㆍ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ㆍ태안 군수(泰安郡守)와 부령(富寧)ㆍ구성(龜城) 두 곳의 도호부사(都護府使)를 두루 지냈다.
구성에 있을 때에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통정 대부(通政大夫)인 당상계(堂上階)로 승진하여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옮겨 제수되었다. 오위장(五衛將)으로 들어왔다가 곧 공주 목사(公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조정의 의논이 군사의 중임을 맡기되 (외방으로) 보내지 않아야 한다 하였는데, 마침 해주 목사(海州牧使)의 자리가 비게 되었다.
해주는 큰 고을이고 극무(劇務)를 처리해야 하므로 마땅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는데 마침내 공을 주의(注擬)하였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이 마음대로 사람을 죽여 대신들이 많이 피해를 입으면서 왕래한 적이 있는 자도 아울러 죄주었는데, 공이 이극균(李克均)의 집에 투자(投刺, 찾아뵘)하였다 하여 죄를 물어 부임하기 전에 파직당하였다.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 중종 원년) 가을에 지금 임금이 즉위하여 귀양 가고 파직되었던 사람을 다 거두어 썼는데 이르기를, “의주(義州)는 경계가 중국에 잇닿은 곳이고 조정의 사신이 오가는 길이며 또 사나운 오랑캐와 경계를 잇대었으므로 국경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이다.
난정(亂政) 때에 힘이 지쳐서 군사와 백성이 고달팠는데, 이제 고쳐 바로잡을 때를 당하여 청명(請命, 책봉 등의 명을 청함)ㆍ봉석(封錫, 책봉하고 하사함)ㆍ빙사(聘使, 방문하는 사신)가 교착(交錯)하므로 더욱 감당할 수 없으니, 뛰어난 재능과 오랜 명망이 있는 자가 아니면 잘 처리하지 못한다.” 하였다.
그래서 공을 기용하여 목사(牧使)로 삼았는데 이듬해에 치적(治績)을 이루었다. 안침(安琛)공이 이때 평안도 감사(監司)였는데 공의 치적을 갖추어 “화락하고 성실하며 공무에 진력하고 백성을 사랑합니다.”라고 아뢰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기고 특별히 표리(表裏)를 하사하여 포장(褒獎)하였다.
얼마 안 지나서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자(陞資)하고 그 도(道)에서 승진시켜 절도사(節度使)를 제수하고 글을 내려 총애하여 유시하였는데 (그 내용에) “지난날 폐조(廢朝)의 군정(軍政)이 도리에 어그러져서 군사와 백성이 피폐하였으므로 방숙(方叔)ㆍ소호2)(召虎) 같은 자를 얻어서 진무(鎭撫)하기를 바랐는데, 경(卿)은 기우(氣宇)가 신밀(愼密)하고 성행(性行)이 염결(廉潔)하며 재능은 무리를 어거할 만하고 지략은 변경(邊境)의 군사(軍事)를 계획할 만하다.”는 등의 말이 있었으니, 성주(聖主)가 은총을 베푼 뜻을 알 만하다.
공이 감격하여 보답하기를 도모하고 번번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착하지 않은 마음이 일어나거나 게으른 기가 생기면 반드시 성상의 유시를 생각하여 아닌게아니라 다잡아 힘쓰게 된다.” 하였다. 경직(京職)으로 들어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신미년(辛未年, 1511, 중종 6)에 명을 받고 경사(京師)에 가서 원정(元正)을 축하하고 돌아와 경상좌도 수군(水軍)ㆍ병마(兵馬) 두 절도사(節度使)와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다시 동지중추부사 총관을 두 번 지냈다. 나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갈 생각이었는데 집정자(執政者)가 이를 알고서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제수하여 공이 누워서 다스리기를 바랐으나, 공이 늙었다고 취임하지 않고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 누어서 장차 생애를 마칠 듯하였다.
그 뒤에 대구 부사(大丘府使)를 제수하였으나 또한 취임하지 않았는데, 다시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제수하니 공이 마지못하여 취임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519, 중종 14)에 사림(士林)의 화(禍)가 일어났는데, 공이 이때 고향에 있다가 조광조(趙光祖) 등이 죄받았다는 말을 듣고 벗 안우(安遇)와 함께 남모르게 한탄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옥사(獄事)가 또 일어났는데 공이 관련되어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고 벼슬이 떨어져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진년(庚辰年) 8월 14일에 초계(草溪) 진정리(眞定里) 집에서 병으로 졸(卒)하니, 향년 70세이다. 11월 13일에 군(郡)의 오세촌(吾世村) 북쪽, 청계산(淸溪山) 남쪽의 모좌 모향(某坐某向)인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선대의 묘역을 따른 것이다.
공은 자질이 바르고 깨끗하여 지조가 굳었다. 무(武)로 출세하였을지라도 평소에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고 날마다 글읽기를 즐겨하였는데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고 제자(諸子)ㆍ사서(史書)부터 널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옛사람의 행사(行事)ㆍ성패(成敗)ㆍ득실(得失)을 논하게 되면 숙유(宿儒, 노성한 학자)라 자처하는 사람일지라도 더 낫지 못하였다.
병서(兵書)를 배우고 방략(方略)을 배워서 세상에 이름나고 국가에서 그 효용에 힘입은 무사(武士)가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사귀어 왕래한 바는 다 온화하고 바른 선비이고 번번이 고상한 이야기를 하며 상대하고 혹 변경의 군사를 계획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일을 상의하였으며 잡스럽고 무익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무사들이 많이 꺼렸고 문사 중에도 혹 시기하고 책망하는 자가 있어서 자주 방해 당하면 공이 방황하였고, 드디어 치사(致仕)할 생각이 있었으므로 마침내 크게 유위(有爲)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공의 재능은 다스리는 도리에 더욱이 능하고 기밀한 일에 숙달하며 득실을 잘 알고 분석을 잘하고 유미(幽微, 그윽하고 희미하여 알기 어려움)에 투철하였다.
가는 곳마다 고을을 일으키고 피폐한 것을 일으키며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열 한 고을을 다스렸는데 다 상등의 성적으로 아뢰어졌고 세 변방을 절도(節度)하였는데 군리(軍吏)가 다 편안하였다. 자기 처신과 군사를 어루만지는 데에는 간약(簡約)을 숭상하고 폐단을 없애며 오로지 은혜를 베풀어서 따르게 하기를 힘쓰고 혹 엄위(嚴威)로 권려(勸勵)하기도 하였다.
뜻밖에 국가에서 한 가지 선정(善政)을 행한 일을 들으면 기뻐하고, 온편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근심이 낯빛에 나타나며 말하기를, “무인(武人)은 국사(國事)에 참여하여 아는 바가 없으나 타고난 것이 나타나는 것은 스스로 어쩔 수 없다.” 하였다.
두 번 과거에 급제하니 어머니가 번번이 기뻐하여 전토(田土)를 주었으나 다 사양하며 받지 않았고 형제들에게 죄다 나누어 주었다. 시종 청백(淸白)을 지켰으므로 파직되어 집에 있을 때에 남에게서 빌리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520, 중종 15)에 도망한 사람을 잡느라 관리가 공의 집을 덮쳐 수색하되 안방까지 남김이 없었는데 사방의 벽만 쓸쓸하고 남은 물건이 없음을 보고서 사람들이 더욱 공의 절개에 감복하였다.
평소에 관(冠)을 바로 쓰고 곧추 앉아서 날마다 서적(書籍)으로 스스로 즐거움을 삼으며 늘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워낙 생계를 꾀하는 데에 서툴러서 너희들에게 산업을 물려주지 못하였으나, 너희들이 글을 읽고 선(善)을 닦게 하고자 하였으니, 너희들이 내 뜻을 따른다면 이는 내가 준 것일 게다.” 하였다.
공의 아내 정부인(貞夫人) 통천 최씨(通川崔氏)는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정렬공(貞烈公) 최윤덕(崔潤德)의 증손(曾孫)이며 아버지는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 최계한(崔季漢)이다. 3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 이희증(李希曾)은 약관(弱冠)에 급제하여 매우 현저한 명예가 있었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서 일찍 몰(沒)하였다.
그 다음 아들 이희민(李希閔)도 학행(學行)이 있어 당시에 이름났고 젊어서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병자년(丙子年, 1516, 중종 11)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지내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는데 기묘 사화(己卯士禍) 때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다음 아들 이희안(李希顔)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맏딸은 산음 훈도(山陰訓導) 우석범(禹錫範)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 딸은 영산 현감(靈山縣監) 신세연(申世淵)에게 시집갔다. 이희증의 아들은 이팽년(李彭年)이고, 이희민의 아들은 이팽신(李彭信)이다. 우석범의 아들은 우희순(禹希舜)이고, 신세연의 아들은 신식(申湜)이다.
나 김안국(金安國)은 공을 미처 알지 못하였으나, 아우 김정국(金正國)이 공의 두 아들과 교유하여 공이 행한 참된 도리를 자못 잘 알아서 평소에 나도 들은 바가 있었다. 공이 졸하기에 이르러, 공의 큰아들 수찬군(修撰君)은 먼저 몰하였고, 작은 아들 정랑군(正郞君)이 아우와 사귀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 형과 함께 우리 집에 다녔으므로 가장(家狀)을 갖추어 아우 편에 나 김안국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청하였는데, 평소에 들은 바를 가장에 참조하니 참으로 거짓이 아니었다.
김안국이 전리(田里)에서 허물을 반성하느라 문자(文字)의 일에 겨를이 없었으므로 곧 부응하지 못하였는데, 정랑군이 상중에 서거하니, 김안국이 본심이 아니었던 것을 매우 통탄스럽게 여기고, 선행을 많이 하여 후손에게 끼친 경사가 중도에서 어그러진 것을 슬퍼하였다.
공의 막내아들 이희안이 다시 멀리 와서 계속하여 청하였는데, 그 지기(志氣)와 학행(學行)을 보니 두 형을 닮았으므로 공이 오히려 여경(餘慶)을 남겨 두어 아직 그치지 않은 것이 있음을 기뻐하였다. 명(銘)을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송백(松柏)이 땅 끝에 이어지고 푸른 바다로 둘렀으니, 신령한 기운이 서려서 빼어남을 빚어내고 정순함을 기르도다. 왕국(王國)에 보배를 바쳐 성명(聖明)을 힘써 도우니, 공이 먼 지방에서 출세하여 나라의 방패가 되고 성(城)이 되도다. 무략(武略)은 이미 뛰어났고 문모(文謨)도 겸비하니, 시(詩)를 숭상하고 예(禮)를 좋아하여 몹시 엄하기를 즐겨하지 않도다.
가벼운 갖옷에 느슨하게 띠를 매고 세 변방에서 침착하니, 장중(莊重)하여 위엄이 있고 대범하되 단정하도다. 뛰어난 명장(名將)으로 누가 공과 짝하랴마는, 굴신(屈伸)에 천명(天命)이 있어 시용(施用)을 다하지 못하도다. 거두어서 후손에 남겨 주어 경사를 늘일 수 있을 것이니, 천추(千秋)에 길이 전하려고 이를 증명하여 기술(記述)한다.
[각주]
1) 일방(一榜) :
한 방목(榜目)에 든 사람들. 동시에 응시하여 급제한 전원을 이르는 말.
2) 방숙(方叔)ㆍ소호(召虎) :
두 사람 다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의 사람으로 방숙은 형만(荊蠻)을, 소호는 회이(淮夷)를 평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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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嘉善大夫忠淸道兵馬節度使李公墓碣銘。
公姓李氏, 諱允儉, 字子文, 陜川人。 高祖嘉善大夫、戶曹典書諱云皓, 曾祖奉順大夫、知永州諱斯芳, 祖宣略將軍、達梁萬戶、贈兵曹參議諱智老, 喜賑施人, 咸賴之。 考贈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諱順生, 好學不仕, 敎授鄕里, 學徒坌集, 多有著名者。 娶懷德縣監柳孟智之女。 先生四男二女, 最後生公。
景泰辛未始生, 家有祥徵。 兒骨氣又殊凡, 父母宗族皆異之。 稍長, 不喜嬉遊, 能讀書便弓馬。 未弱冠, 參判公沒, 公傷不及養, 不自聊賴。 無意於文學, 後試武藝, 覺其易習, 閱歲遂擢成化壬辰武科, 掌試者知其文武才, 卽薦授宣傳官。 以窮鄕寒族, 一朝脫麻, 先一榜, 拔擢爲華選職。 成廟亦寵信之, 凡有任使, 必召公, 聞譽藉藉于行間。 丙申, 復擢重試。 爲養丐邑, 出爲泗川縣監, 直己而行事, 苟是勇往不顧, 竟爲猜讒所中害廢散。 家居者久之, 復起拜宣傳官。 又爲養, 求爲興陽縣監。 居任, 遭母夫人喪。 服闋, 除江界府判官, 累歷長興庫令、繕工監判官、訓鍊院判官、泰安郡守、富寧・龜城兩都護府使。 在龜城秩未滿, 陞通政堂上官階, 移拜穩城府使。 入爲五衛將, 尋拜公州牧使。 朝議當任閫寄不遣, 適海州牧使缺。 邑最鉅, 治劇難其人, 竟以公注。 未赴, 値燕山主肆殺戮大臣, 多被誅死, 竝罪嘗所往來者, 公以投刺李克均家譴罷。
正德丙寅秋, 今上卽位, 盡收用謫廢人, 謂“義州境連中國, 處朝廷使命往來之衝, 復與獷虜接界, 爲防戍重關。 而力罷於亂政, 軍民困弊, 今當革正之際, 請命封錫, 騁使交午, 益不勝堪。 非長才宿望, 不能以處之”。 乃起公爲牧使, 踰年而政成。 安公琛時爲平安道監司, 具公治績, 以愷悌悃愊, 奉公字民聞, 上嘉之, 特賜表裏以褒之。 未幾, 陞資嘉善, 卽其道, 進拜節度使, 賜書寵諭, 有“頃緣廢朝軍政乖方, 兵民彫弊, 思得如方叔、召虎者以鎭撫。 卿氣宇愼密, 性行廉潔, 才可以禦衆, 智可以謀邊”等語, 可見聖主眷注之意。 公感激圖報, 每語人曰: “苟有不善心作, 怠惰氣生, 必念聖諭, 未嘗不竦然策勵也。” 入爲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 辛未, 受命赴京師, 賀元正還, 歷慶尙左道水軍・兵馬兩節度使、忠淸道兵馬節度使, 復入爲同知中樞, 摠管者再。 漸老爲休致計, 執政者知之, 除江陵大都護府使, 欲公臥治。 公以老不任辭, 歸臥鄕里, 若將終身。 後拜大丘府使, 亦不就。 復拜寧海府使, 公不得已就任。
己卯, 士林禍作, 公時居鄕, 聞趙光祖等被辜, 與友人安遇竊歎。 至是獄又起, 公連逮就理, 坐落職, 復歸鄕里。 庚辰八月十四日, 以疾卒于草溪眞定里第, 享年七十。 十一月十三日, 窆于郡之吾世村北淸溪山之南某坐某向之原, 從先兆也。
公資端潔耿介。 雖以武發跡, 雅不喜弓馬, 日以讀書爲樂, 至老不倦懈, 自諸子、史書無不淹該。 至論古人行事成敗得失, 雖自謂宿儒, 莫能加。 武士受兵書學方略以名世, 國家賴其用者, 多出其門。 所交游皆儒雅士, 每淸談相對, 或商確籌邊利國之事, 未嘗爲駁雜無益語。 以此武流多忌之, 文士中亦或有猜誚者, 屢爲所沮毁。 公回翔, 遂有歸老意, 竟不得大有所爲, 惜哉!
公才尤長於政理, 練達機事, 諳得失, 能辦折, 撤幽微。 所至興官起廢, 强勵不懈, 治十一邑, 皆以最聞。 節度三邊, 軍吏皆便。 行己撫戎, 尙簡祛弊, 專務以恩結, 或以嚴威爲勸者。 不意聞國家行一善政則喜, 有不便者, 憂見于色曰: “武人無所與知於國事, 而所性之發, 自不能已也。” 再登科, 母夫人輒喜賜田土, 皆辭不受, 盡分與諸昆弟。 終始守淸白, 及罷家居, 未免稱貸於人。 庚辰, 捕索亡人, 官吏掩搜
公第, 至奧室不遺, 見四壁蕭然無餘物, 人益服公節。 平居正冠兀坐, 日以書籍自娛, 常語諸子曰: “吾固拙於謀生, 不能遺爾輩産業, 欲令爾輩讀書修善, 爾輩從吾志, 則是吾所賜也。”
公配貞夫人通川崔氏, 議政府左議政貞烈公諱潤德之曾孫, 考曰訓鍊院參軍諱季漢。 生三男二女: 長曰希曾, 弱冠登第, 甚有顯譽, 以弘文館修撰, 早沒。 次曰希閔, 亦有學行, 名當世, 少中進士試, 登丙子第, 歷淸要, 爲吏曹正郞, 己卯士禍, 亦連累罷。 次曰希顔, 未仕。 女長適山陰訓導禹錫範, 次適靈山縣監申世淵。 希曾子曰彭年, 希閔子曰彭信, 錫範子曰希舜, 世淵子曰湜。
安國不及識公, 弟正國與公之二子交游, 頗詳公履實, 安國聞之素矣。 及公之卒, 公之長子修撰君先沒, 次子正郞君以交弟之故, 亦嘗與其兄同游吾門, 乃具家狀, 因弟請碣銘於安國。 以平昔所聞, 參之家狀, 信不誣矣。 安國省愆田里, 未遑文字事, 未卽副也。 正郞君在服又逝, 安國深以負心爲嗟痛, 又悼善慶之中戾。 今公之季子希顔復遠來繼請, 觀其志氣學行, 肖兩兄, 喜公之尙有留餘慶未艾也, 銘其敢辭? 銘曰:
朱維壤窮, 環以滄溟。 靈氣蜿蟺, 釀秀毓精。 貢珍王國, 勵翼聖明。 公起孤逖, 爲干爲城。 武略旣長, 文謨亦兼。 敦詩悅禮, 不肯厲嚴。 緩帶輕裘, 三邊以恬。 莊以爲威, 簡以居廉。 卓哉名將! 疇與公匹? 屈伸付命, 施用不畢。 斂以遺後, 其能引吉。 千秋永垂, 徵此紀述。<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