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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채인택
관심
⑪스페인 요리
하나인 듯하나 아닌 듯 통합의 맛, 그리고 바스크의 향기
초리소를 넣은 소스로 끓인 안달루시아 미트볼.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지난 9월 마지막 주 도시 행정에 관심이 많은 손님 아홉 분이 찾아와 단체로 이태원 ‘견학’을 갔다. 국제화‧다문화 시대의 대표적인 벤치마킹 동네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물론 여러 나라의 음식문화를 보여주는 음식점이 즐비한 세계음식거리와 언덕 위의 마스지드(학교가 딸린 이슬람사원), 산동네의 복잡한 골목길을 돌아본 뒤 제일기획 근처 스페인 식당인 ‘스페인 클럽’으로 향했다. 표결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글로벌 시대를 맞고 있는 한국에서 스페인이 매력적인 나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스페인 하면 플라멩코(사실은 집시문화)로 상징되는 ‘정열’, 레알 마드리드CF와 FC바르셀로나를 보유한 프로축구리그 라리가가 대표하는 ‘축구’,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바르셀로나의 성가족성당이 자리 잡은 ‘문화유산과 예술’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와 함께 발렌시아가 원조라는 쌀 요리 파에야와 생햄인 하몬, 카바(거품 포도주)를 비롯한 다양한 와인과 과일주스에 와인을 섞은 음료인 상그리아 등 맛있고 멋있는 음식으로 이름 높다.
스페인 클럽에서 우선 ‘하몬 플레이트(접시)’를 시켰다. 생햄인 하몬 이베리코에 만체고 치즈, 그리고 초리소(스페인 훈제‧건조 소시지)가 한 접시에 담긴 메뉴다. 입맛을 돋우기에 좋지만, 안주로도 손색이 없다. 스페인 거품 포도주인 카바를 한 병 따서 나눠 마시니 한 접시가 금방 동이 나서 다시 주문했다.
감바스 알아히요(마늘새우). 올리브기름에 새우 맛이 밴 국물에 빵을 찍어 먹는 맛이 좋아 이젠 한국에서도 대중화됐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스페인 원산의 감바스 알아히요(마늘새우)도 주문했다. 올리브기름에 새우 맛이 배어 있었다. 그 국물에 빵을 찍어 먹었다. 감바스 알하이요는 이제 한국의 스페인 음식점은 물론 이탈리아 음식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어렵지 않다. 물론 제대로 맛을 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의외로 인기가 있어 이 역시 다시 한 접시를 추가 주문해야 했다.
스페인 북부와 포르투갈에서 유명한 바칼라우(대구)도 먹고 싶었다. 올리브기름 속에서 다소곳이 기다리는 하얗고 부드러운 대구살이 생각나 군침이 돌았다. 기대가 컸지만, 재료가 소진됐다고 해서 아쉽게 이날은 맛보지 못했다.
해산물 파에야. 스페인 동남부 도시 발렌시아가 원조로 유명하지만, 스페인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는 건 물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대중화했다. 노란색을 내게 하는 향신료인 샤프란이 기본적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붉은 금’으로 불릴 만큼 가격이 비싸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1g에 10~20달러가 국제 소매가라고 한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메인으로 스페인 쌀 요리인 파에야(빠에야)를 주문했다. 해물과 닭, 둘을 섞은 종류가 있었다. 해물 파에야를 주문해 새우와 오징어, 홍합을 함께 맛봤다. 조리 시간이 25분쯤 걸린다고 해서 예약할 때 미리 부탁해야 했다. 산뜻하고 개운한 맛이 있어 한국인의 입맛에 가장 잘 맞는 스페인 음식일 것이다. 치즈 맛이 강한 이탈리아의 쌀 요리인 리소토(쌀이라는 뜻)보다 느끼함이 적어 더욱 인기인 것 같다.
초리소를 넣은 소스로 끓인 안달루시아 미트볼.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여기에 더해 미트볼과 크로켓, 스페인식 감자 오믈렛 등 몇 가지 타파스를 주문했다. 모든 음식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에야 납작솥을 결국 바닥까지 긁어가며 싹싹 비웠다. 시장기가 음식을 부르고, 맛깔스러운 음식이 다시 식욕을 부른 ‘잔치’의 자리였다. 따지고 보니 스페인 음식은 항상 한국인과 잘 맞았던 기억이 있다.
스페인의 하몬 문화
돼지 넓적다리로 만든 스페인 전통음식 하몬 전용매장 모습. 중앙포토
스페인은 비교적 기후가 온화한 데다 삼면이 바다이고 산악 지역과 건조한 지역까지 다양한 식생이 있어 음식문화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의 하나가 하몬(Jamón)이다. 스페인어로 ‘햄’이라는 뜻이다. 스페인 밖에서는 일반적으로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인 뒤 건조한 스페인산 염장건조 ‘생햄’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하몬 이베리코(Jamón ibérico)’는 스페인이 자리 잡은 이베리아반도가 원산인 이베리코 품종의 돼지로 만든 하몬이다. 결이 부드러우며, 진하고 깊은 맛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하몬 이베리코 중 최상품인 ‘하몬 이베리코 데 베요타(Jamón ibérico de bellota)’는 도토리(bellota)를 먹여 키운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살을 찌울 때 참나무 숲에 풀어놓아 도토리를 주워 먹을 수 있게 사육한 돼지로 만든다. 풍미가 뛰어나다.
하몬 이베리코에는 일정 기간 도토리를 먹게 한 것과 도토리와 사료를 함께 먹인 것, 또는 사료만 먹인 것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베리코가 아닌 다른 품종의 돼지를 쓴 스페인산 염장건조 생햄은 ‘하몬 세라노(Jamón serrano)’로 불리며 하몬 이베리코보다 가격이 대중적이다. 풍미는 가격에 비례한다.
스페인 식당이나 돼지고기 가게에는 염장해 말린 돼지 뒷다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식당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몬 이베리코는 검은색의 발 부분이 특징이며, 털까지 드러난다. 식품 전시회에서 전시해 놓은 걸 보면 조금 섬뜩하지만, 맛과 향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스페인의 소시지 문화
하몬 이베리코와 초리소, 그리고 구운 파프리카로 속을 채운 양송이 냄비.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스페인 음식문화는 다양한 소시지로도 이름 높다. ‘초리소(Chorizo)’는 돼지고기에 마늘과 파프리카, 허브를 넣은 만든 소시지를 훈연‧건조한 것이다. 파프리카가 들어가 특유의 선홍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파프리카와 허브 덕분에 향이 좋다. 다른 나라에서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소시지로 알려지고, 심지어 소시지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스페인 안에서는 다양한 소시지의 한 종류다. 스페인의 음식문화는 그만큼 폭넓고 다양하다.
‘살치촌(Salchichón)’은 돼지고기에 소금을 뿌리고 호추‧넛맥‧클로브‧정향‧고수와 각종 향신료를 넣어 만든 소시지를 훈연‧건조한 것이다. 살라미와 비슷하다. 쇠고기나 송아지 또는 말고기를 쓴 것도 있다. 한국에선 말고기 살치촌을 먹어보지 못했다.
말리지도, 훈제하지도 않은 신선 소시지는 ‘살치차(Salchicha)’로 불린다. 그냥 먹기도 하지만 다양한 요리의 재료로 이용된다. 샌드위치에는 말할 것도 없다.
돈키호테의 고향이라는 라만차 특산 ‘만체고 치즈’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초리소, 만체고 치즈, 올리브 무침, 치즈모듬, 하몬 이베리코.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만체고 치즈는 스페인 중남부의 라만차 지역에서 생산되는 양젖 치즈다. 라만차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1605년 발표한 풍자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인 시골 이달고(기사) 알폰소 키하노의 고향으로 설정된 지역이다. 라만차의 사나이 돈키호테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치즈다.
만체고 치즈는 풍미가 진한 편이면서도 양젖 치즈 특유의 향은 적은 편이라 스페인에서는 물론 전 세계에서 인기가 높다. 주로 꿀에 찍어 먹는데, 스페인 관광지에선 하몬 이베리코와 함께 세트로 내놓는 경우가 많다. 짭짤하고 향긋한 하몬과 은은한 풍미의 만체고 치즈를 빵에 얹어 함께 먹으면 맛이 조화롭게 잘 어울린다.
타파스와 핀초스
스페인은 다양한 요리를 작은 접시에 담아내는 ‘타파스(Tapas)’로 명성이 높다. 원래는 메인을 먹기 전에 즐기는 전채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타파스를 고루 시켜 다양하게 맛보면서 한 끼를 대신하는 경향이다. 올리브절임, 염장건조대구인 바칼라우, 스페인식 감자 오믈렛, 오징어 튀김, 미트볼, 새우 요리, 문어 요리, 안초비, 초리소, 크로켓, 마늘빵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집에서도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다.
스페인 바스크 지역 빌바오에서 만난 ‘쪄서 건조한 삼겹살 핀초스’. 핀초스는 기본적으로 꼬챙이에 꽂아 내지만 이 음식은 껍질이 딱딱해서 그런지 아무것도 꽂지 않았고, 나이프로 썰어 먹어야 했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서북부 바스크 지역에선 ‘핀초스(Pintxos)’라고 해서 빵조각 위에 작은 요리를 얹고 나무 꼬챙이(요즘은 이쑤시개로 대신)를 꽂아 내놓는 간식이 유명하다. 타파스와 비슷하지만 별도의 음식문화로 발전해 왔다.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보니 핀초는 ‘가시’ ‘꼬챙이’라는 뜻이다.
바스크 지역 서부의 칸타브리아, 동남부 나바라, 남부 라리오하도 핀초스 문화로 유명하다. 라리오하는 와인 산지로 이름 높다.
인구 1인당 미슐랭 별 하나를 받은 산 세비스티안
스페인은 사실 맛의 나라다. 그중에서도 바스크 지역은 수준 높은 음식문화로 명성이 높다. 이 가운데 산 세바스티안(도노스티아)은 세계 최고 수준의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스페인어로 ‘알타 코시나(Alta cocina)’, 프랑스어로 ‘오트 퀴진(Hautecusine)’으로 불리는 최고급 요리를 내는 식당이다. 그 유명한 핀초스를 비롯한 맛깔스러운 대중 음식과 함께 감탄을 자아내는 최고급 창작 요리는 전 세계 미식가를 바스크 지역으로 끌어오는 자석이 됐다.
인구 18만의 산 세바스티안 한 도시에서만 열 군데의 레스토랑이 18개의 미슐랭 별을 보유하고 있다. 별 세 개를 받은 레스토랑이 세 군데, 두 개를 얻은 식당이 두 곳, 하나를 받은 곳이 무려 다섯 군데나 있다. 인구 대비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일본 교토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둘째로 많은 도시다. 인구 147만의 교토는 108개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있다.
스페인 전체에 아홉 개만 있는 미슐랭 별 셋 레스토랑이 산 세바스티안에만 세 군데나 모여 있다. 1887년에 문을 열어 3대째 계속 운영하면서 끊임없는 진화로 이름 높은 ‘아르작’, 하나의 전통 코스와 두 개의 혁신 코스 중 하나를 고객이 고르게 하는 ‘아켈라레’, 바스크 요리로 승부해온 ‘마르틴 바라사테기’가 그곳이다.
제철 재료와 멋진 조리기술로 이름 높은 ‘아멜리아’와 전통과 혁신을 조화시키기로 유명한 ‘무가리츠’는 각각 두 개의 별을 받았다. 별 하나를 받은 레스토랑도 코코타, 알라메다, 엘카노, 에카이차, 레 카이쿠 등 다섯 곳이 있다. 스페인 바스크 지역은 별을 맛보는 동네다. 이 지역의 산 세바스티안과 빌바오는 맛으로 기억에 남는다.
다섯 나라가 한 나라로
풍부한 음식문화를 자랑하는 스페인은 사실 꽤나 복잡한 나라다. 하나인 듯, 아닌 듯 묘한 국가다. 지역주의가 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내부를 살펴보면 한 나라를 유지해온 게 신기할 정도다. 아예 서로 다른 다섯 가지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주민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인구 4800만 명 중 공용어인 카스테야노(전국적으로 중복사용 가능자 4400만 명) 외에 카탈라(동남부 카탈루냐‧900만 명), 갈레고(서북부 갈리시아‧240만 명), 에우스카라(동북부 바스크‧100만 명), 아란어(카탈루냐 동부‧오크어로도 불림‧1만 명) 등 공식 지역어가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페인어는 사실 카스티야 지방에서 쓰는 카스테야노다. 카탈라는 프랑스어와, 갈레고는 포르투갈어와 각각 비교적 가까운데, 에우스카라로 불리는 바스크어는 전 세계 어떤 언어와도 연관성이 없는 고립어다.
영국 런던에서 연수 중 만난 스페인 친구에게 ‘스패니시(Spanish)’라는 말을 했더니 “스페인어란 건 없다. 스페인에는 여러 가지 말이 있어 특정 언어가 나라를 대표할 순 없다. 네가 언급한 그 언어는 카스티야에서 쓰는 말일 뿐이다”라고 설명해 줬다. 그 친구는 카탈라, 즉 카탈루냐 말을 쓰는 바르셀로나 출신이었다.
스페인 동북부 바스크 지역에서 온 친구에게 “그 지역의 산 세비스티안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고 말했다가 무안을 당했다. “산 세바스티안은 카스티야 말이고, 우리는 도노스티아라고 부른다”고 잘라 말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이 도시에 가봤더니 도로표지판, 시외버스 표 등에서 ‘산 세바스티안(도노스티아)’이라고 분명하게 병기하고 있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이 열리고 있던 그해 12월 1일(현지시간) 스페인 팬들이 칼리파국제경기장 앞에서 스페인 국기를 들고 경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오른쪽 흰색 원 안) 4등분된 방패 문양 속의 왼쪽 위에 있는 성채(城砦)는 카스티야 왕국, 오른쪽 위 사자는 레온 왕국, 왼쪽 아래 네 개의 적색 세로줄은 아라곤 왕국, 오른쪽 아래 황금색 쇠줄은 나바라 왕국을 각각 나타낸다. 석류꽃은 그라나다, 중앙의 나리꽃 세 개는 현재의 왕실인 부르봉 가문을 뜻한다. 연합뉴스
스페인의 국가문장을 들여다보면 이 나라의 복잡한 역사가 보인다. 카스티야‧레온‧아라곤‧나바르 등 중세 기독교 왕국과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레콩퀴스타(718~1492)’ 끝에 1492년에 되찾은 그라나다 등 다섯 지역의 상징을 모두 담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혈통을 상징하는 부르본(프랑스어로 부르봉) 가문의 문장과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랫동안 차지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도 함께 들어 있다. 안으로는 지역주의로 분열되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정세에 따라 왕실의 운명이 좌우됐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서로 다른 국민을 하나로 연결하는 국가 정체성과 통합이 스페인의 국가적‧정치적 과제임을 잘 보여준다.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의 첫 번째 딸인 레오노르(17) 공주가 지난 9월 20일(현지시간) 사라고사의 육군 사관학교에서 기초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공주는 이곳에서 1년간 훈련을 받은 후,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 훈련선을 타는 과정을 포함해 해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예정이다. 3년간의 육해공 군사훈련 기간 중 마지막 과정은 제너럴 에어 아카데미다. 연합뉴스
입헌군주국인 스페인은 지난 8월 전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펠리페 6세 국왕의 장녀로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레오노르 공주(17)가 영국 웨일스에서 고교 과정을 마친 뒤 3년간의 군사훈련에 들어가면서다. 레오노르 공주는 스페인 동부 사라고사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1년간의 교육을 받은 뒤 내년에는 해군사관학교, 내후년에는 공군사관학교에 각각 입교해 군사학을 배우게 된다. 국가원수이자 군 최고사령관인 군주가 될 왕위 계승권자가 군사 경험을 쌓는 왕실 전통에 따른 것이다. 왕실은 지역과 좌우가 극심하게 대립해온 스페인이 통합을 유지하는 결속장치 역할을 자처한다.
‘빌바오 효과’와 구겐하임 미술관
스페인 바스크 지역은 신선한 재료와 창의적인 요리 기술을 더해 맛있고 개성 있는 음식문화로 이름이 높다. 여기에 합리적인 가격과 해변을 비롯한 멋들어진 풍광이 더해져 바스크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바스크 지역 중심도시인 빌바오는 전통의 음식문화에 더해 각고의 노력으로 관광도시로 거듭난 경우다.
인구 37만 명(광역은 100만 명)의 빌바오는 지리 교과서에 나오는 오래된 산업도시다. 1970년대 후반 한국 중학교 지리 교과서는 빌바오를 ‘인근 탄광에서 나오는 풍부한 석탄을 바탕으로 철강‧조선‧기계 등 제조업이 발달한 산업도시’라고 소개했다. 스웨덴 북부 키루나 광산에서 채굴한 철광석을 봄~가을에는 스웨덴 북부 룰레오 항구에서, 룰레오 인근 뱃길이 얼어붙는 겨울에는 따듯한 멕시코만류 덕분에 일 년 내내 바다가 얼지 않는 노르웨이의 부동항 나르빅에서 각각 선박에 실어 빌바오로 운송한다는 내용도 배웠다.
한국의 지리 과목에서 이렇게 가르칠 정도로 빌바오는 산업도시로 번성했다. 지난 5월 찾아본 빌바오는 곳곳에 멋진 교회와 공공건물, 공원 등이 조성된 쾌적하고 매력적인 공간으로 가득했다. 막대한 돈이 들어갔을 것이라는 느낌이 저절로 들 정도로 잘 정돈되고 장식된 도시였다.
산업도시로서 빌바오는 1980년대 들어 일본과 한국 등의 철강‧조선 산업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유럽은 더 이상 제조업으로 아시아 국가에 대항하기 힘들어졌다. 빌바오 시민들은 오랜 논의 끝에 1991년 결단을 내리고 불황 탈출법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산업도시에서 관광도시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시 재정에서 거액을 내놓았다. 쇠락해 가는 항구 지역에 미화 1억 달러를 투입해 미술관을 새로 건설하고, 5000만 달러로 전시 미술 작품을 구매하기로 했다. 아울러 미국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과 계약을 맺었다. 2000만 달러를 일시불로 주고 빌바오의 새 미술관에 구겐하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연 1200만 달러 정도가 들어가는 운영 예산의 일부를 보조해 주기로 했다. 대신 뉴욕 구겐하임의 소장 미술품을 빌바오 구겐하임에 순회 전시하기로 했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거래였다.
캐나다계 미국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겉을 티타늄으로 싸서 표면이 빛에 반사된다. 낮 시간에 티타늄 표면에 손을 대보니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웠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기존의 풍성한 음식문화와 풍광에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혁신적인 미술관 건물과 세계적인 브랜드의 구겐하임을 더함으로써 관광도시로 가는 길을 뚫은 셈이다. 매력적인 음식문화는 산업도시를 관광도시로 바꾸는 이 프로젝트에 날개를 달아줬다.
구겐하임은 미국의 부호 가문인 구겐하임 가문이 1937년 개관해 운영해온 세계적인 미술관이다. 현재의 미술관 건물은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설계로 1959년 완공돼 1990년 뉴욕 랜드마크로 지정됐고, 2019년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1847년 스위스에서 미국에 이민한 유대인 마이어 구겐하임(1828~1905)은 광업과 제련업으로 부를 축적해 ‘광산왕’으로 불렸다. 마이어는 미국 역사에서 남북전쟁(1861~1965) 직후의 재건기에서 이어진 호황기인 도금시대(鍍金時代‧Gilded Age)에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0명의 자녀 중 벤저민 구겐하임(1865~1912년)은 철강회사를 운영하며 현대미술을 후원하다 타이태닉호 사고로 숨졌다. 벤저민의 딸 페기 구겐하임(1898~1979년)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미술품 수집에 나섰다. 벤저민의 형 솔로몬 R 구겐하임(1861~1949년)은 1937년 현대미술을 지원하는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뉴욕에 건립했다.
혁신적 건물이 도시를 바꾼다-스타키텍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의 입구에 설치된 미국 현대미술가 제프 쿤스의 작품 ‘강아지(Puppy)’. 스테인리스 뼈대에, 흙, 그리고 수만 송이의 화초로 만든 공공장식 조형물이다. 1240x1240x820㎝의 크기로 웨스트하일랜드산 흰색 테리어종의 강아지를 묘사했다. 화초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자체 관개 시스템을 갖췄다. 1992년 독일 중부 헤센주 바트아롤센의 아롤센 궁전에 13m 높이로 설치했다가 인기를 끌자 1997년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이 사들여 빌바오 구겐하임 앞에 세웠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캐나다 출신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1997년 10월 18일 개관했다. 빌바오 구겐하임은 대성공이었다. 개관 직후부터 빌바오는 관광도시로 거듭났다. 빌바오시 당국에 따르면 빌바오 구겐하임이 개관한 뒤 3년 동안 400만 명이 입장해 5억 유로의 경제 효과를 안겼다. 관광객들이 이용한 이 도시의 호텔과 식당, 술집, 가게 등에서 거둔 세수도 1억 달러에 이르렀다. 2022년 입장객은 128만9147명에 이르렀다.
온 도시에 쇳소리가 진동하고 매캐한 석탄가루로 하늘마저 부옇던 산업도시 빌바오는 이렇게 매력적인 문화 관광지로 거듭났다. 맛있는 도시, 매력적인 도시로서 말이다.
혁신적이고 눈에 띄는 건축물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워 사람들의 눈길과 관심을 끌어 도시의 이미지를 확 바꾸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를 ‘빌바오 효과’로 부른다. 시민은 행복하고 관광객은 매료되는 ‘도시 개조’와 주민이 먹고살 길을 새롭게 마련하는 ‘산업구조 전환’을 동시에 이룬 것이다.
별(Star)과 건축(Architecture)를 합친 신조어 ‘스타키텍트(Starchitect)’가 여기에서 나왔다. 스타키텍트는 전 세계로 퍼졌다. 미국 덴버의 덴버아트뮤지엄(확장), 로스앤젤레스의 월트디즈니콘서트홀 신설, 시애틀의 팝컬처뮤지엄, 센트럴도서관 등이 이를 뒤따랐다. 월트디즈니콘서트홀과 팝컬처뮤지엄은 게리가 설계했다. 2002년 문을 연 영국 맨체스터의 ‘임페리얼 워 뮤지엄 노스’도 같은 경우다.
아랍에미리트(UAE)는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계약해 ‘루브르 아부다비’를 건설하고 2017년 11월 8일 개관했다. 2018년 1월 돌아본 루브르 아부다비에선 루브르의 다양한 수집품과 함께 아랍 세계의 고대 유물을 모아 전시하고 있었다. 루브르의 정체성과 아부다비의 자존심을 조화시킨 전시였다. 이렇게 석유 부국 UAE는 수도 아부다비를 중심으로 중동의 문화 센터로 변모하고 있었다. ‘빌바오 효과’의 중동 버전이다. 이런 변화는 앞으로 글로벌 세계에서 부와 권력의 단위를 국가에서 도시로 바꾸는 물결을 이끌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자진 해체한 ETA
바스크 지역에는 1959년 분리 독립과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혁명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ETA(바스크 조국과 자유)가 설립돼 점조직으로 활동해 왔다. 이들은 폭탄 테러, 경찰과 관공서 공격, 요인 납치 등 테러 활동을 벌여왔다. 1997년 빌바오 구게하임 개관을 앞두고 폭탄 테러를 준비하다 경찰에 발각됐다. 이 과정에서 두 명의 경찰이 숨졌다.
그 뒤 이들은 간혹 테러를 계속했지만 국민의 항의, 정부의 비타협, 경찰의 무관용,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 주민의 냉담 속에서 갈수록 위축됐다. 결국 2010년 휴전을 선언한 뒤 활동을 중지했다가 2017년 무장해제를 거쳐 2018년 해체하고 사라졌다.
오늘날 스페인 바스크 지역은 전 세계 어디보다 안전한 곳으로 통한다. 맛의 고향 ‘바스크 지역’은 밤늦게까지 돌아다녀도 먹고 마시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즐겁고 편안한 지역이 됐다.
에디터
관심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중앙일보 국제부장과 논설위원, 국제전문기자 겸 국제외교안보 에디터를 지냈다. 중국과 북한, 중동과 유럽의 군사와 경제를 오랫동안 살펴왔다. 중국 역사와 문화, 특히 대외 교류사와 음식문화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