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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기다리며
(사 11:1-10)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새로움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기대를 합니다. 새것은 낡은 것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낡은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9:16-17) 낡은 옷에 생베조각을 기우면 더 많이 해어지게 되고, 낡은 주머니에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부대가 터져 모두 못쓰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렇듯 ‘새로움’은 전혀 다른 것이어야 하는데, 겉만 다르게 포장하며 새로워졌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새로움을 기대하는 것은 낡은 것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쳐서 써보기도 했지만, 전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새 것을 통해 기대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새로움을 좋아하는 집단 중에 정치가 있을 것입니다. 정당들은 위기 때마다 ‘혁신위원회’를 만들어 당과 정치를 새롭게 만들어보겠다고 합니다. 계획은 그럴듯한데 결과는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구성원들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국민들의 공감도 얻지 못합니다. ‘새로움’에 대한 생각도 다르고, 방법도 각각입니다. 옛말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는데, 혁신하겠다는 생각도 서로의 주장만 내세우다가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속담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빨리 간다’는 것입니다. 빨리 가려면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하나가 된다면 사공이 아무리 많아도 잘못되지 않고 목적한 것을 빨리 이룰 수 있습니다. 한 마음이 되기 어렵습니다. 특히 정치는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한마음이 될 수 없겠지요. 그런데 욕심을 버리는 것도 어렵습니다. 정치가 원래 권력을 얻으려는 욕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없으면 정치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치가 새로워지기 힘든 것입니다.
새로움을 방해하는 것은 욕심뿐만 아니라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새로움의 방법을 찾는데, 공감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자기 생각조차도 이미 낡은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생각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이 새롭게 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으면 ‘새 정부’라고 하는데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도 옛날 사람 돌려 막기 하듯 다시 쓰고, 정책도 수십 년 전 것을 끄집어내 새로운 정책이라고 하는데,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언론이야 ‘새 정부에 기대한다’며 기대감을 표시하지만, 국민들은 새로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지혜자는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우리가 있기 오래전 세대들에게도 이미 있었다’(전 1:9-10)고 말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새로움을 기대하지만 사람의 생각과 방법으로는 전혀 새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줍니다.
말씀은 ‘새로움’에 대해 많은 말씀을 들려줍니다. 새 하늘, 새 땅, 새 영, 새 사람 등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에서의 새로움도 마찬가지로 낡은 것을 고쳐 새 것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려면 죄도 회개하고, 성격과 습관도 고쳐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고 하십니다. 물론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으며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느냐’며 묻습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요 3:5)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육의 존재가 영적 존재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신비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존재가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의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변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 행하신 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믿고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가 되었다고 해서 이상하고, 신비롭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영적인 활동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인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 뿐입니다. 물론 ‘서로 사랑’은 ‘끼리끼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새로움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 말씀을 따를 때, 우리는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만 새로워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세상이 새로워지기를 늘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새로움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인간의 욕심과 교만 때문입니다. 힘 있는 자들, 가진 자들이 자기들이 정한 질서를 따르도록 강요할 때 전쟁이 일어나고,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평화는 이런 세상의 기득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질서, 창조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씀하십니다. 3-4절 말씀입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않고,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며 공의로 가난한 자들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인 것’(사 11:3-4)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의 입의 막대기는 길이를 재는 자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 눈으로 보고,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또 그의 입술의 기운은 판결을 내리는 것을 말하는데, 자기감정,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각자 자기만의 기준과 선악의 판단이 있어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물론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남을 미워하기도 하고,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어렵고, 힘든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생각과 고집, 욕심과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면 사랑보다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욕심과 교만, 미움과 질투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 고집, 계획, 감정에 끌려다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때로는 그 명령을 거부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마 하나님은 이런 종을 찾으셨을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일꾼들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중에서 하나님 마음에 드는 종은 사실 없었습니다. 그래도 다윗왕은 괜찮은 것 같아서 축복도 주시고,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왕의 후손들이 죄에서 떠나지 못하고 결국 예루살렘은 멸망했습니다. 다윗 왕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새로운 왕을 약속하십니다. 새 왕은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입니다. 이새는 다윗왕의 아버지입니다. 다윗왕의 가지는 예루살렘 멸망으로 잘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새라는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를 내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새 가지는 결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왕에게 축복하십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할 것’이라고 축복하십니다. 이 영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성령이 항상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똑같은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곧 성령께서 우리를 새 사람 되게 하십니다. 새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면 됩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평화가 깨어질 때의 고통을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으로 고통받고, 울부짖는 이들이 있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이들이 있습니다. 온갖 차별과 미움으로 울부짖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연재해로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평화가 깨어질 때, 생명이 고통받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