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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 柳 마 을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전략) 내가 이 대신(채제공)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중략) 내가 즉위한 이후로 참소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으나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가운데서 그를 발탁하여 재상 지위에 올려놓았었다. 이어 내각內閣[규장각]에서 기로소에 들어갔고, 나이가 80이 되어서는 구장鳩杖을 하사하려고 하였다.(하략) 『정조실록』 권51, 정조 23년 1월 18일 |
규장각 소장 『번암선생집』(奎 5372). 권수卷首 정조 어제시 부분 |
규장각에는 제학提學 2명, 직제학直提學 2명, 직각直閣 1명, 대교待敎 1명 등의 관원을 두었다. 이들 관원을 각신閣臣이라고 일컬었다. 채제공은 규장각 하위직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제학에 임명되었다. 1776년 채제공은 교정청 당상관으로 영조의 어제와 어필을 정리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그 후 1777년 4월 9일 규장각 제학에 제수되었다. 그가 규장각 제학으로 제수된 데에는 이러한 업적이 열성의 어제, 어필을 보관한다는 규장각의 본질적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규장각 제학을 지낸 기간은 1777년과 1780년 3월 4일부터 1780년 6월 6일까지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학을 지낸 이력은 평생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그는 규장각 제학으로 정조를 모시고 경서를 강독하고, 때때로 문학 모임을 가졌다. 또한 국왕의 활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1777년 4월 그가 규장각 제학을 지냈을 때 즈음 규장각이 완성되었다. 정조는 규장각 근처 불운정拂雲亭에 과녁을 세워두고 근신들과 활쏘기를 즐겼다. 그는 규장각 제학인 동시에 병조판서를 겸하였다. 정조가 활쏘기 모임에 채제공을 부른 것은 당연한 처사였을 터이다. 그런데 정작 그는 화살을 쏘았지만 번번이 과녁을 맞히는 데 실패하였다. 실패하는 정도가 아니라 화살이 중간쯤 가다가 떨어졌다.
무반의 장인 병조판서가 화살을 한 발도 못 맞히고, 더욱이 근력이 없어 화살이 중간에 가다가 땅에 떨어졌으니 큰 창피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음 날에도 정조의 활 모임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다른 각신들과 무신들은 부름을 받았는데, 채제공은 부름을 받지 못했다. 이에 수치심을 느낀 그는 용호영龍虎營에 나가 활쏘기 연습을 했다. 물론 결과는 처참했다. 화살이 도무지 과녁에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일과의 대부분을 활 연습에 몰두한 지 열흘 만에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기 시작했고, 수십 일이 지나자 화살이 대부분 적중하였다.
이러한 끝없는 연습 끝에 채제공은 정조가 주재하는 활쏘기 모임에서 다섯 발 가운데 네 발을 적중시켰고, 활솜씨를 자부하는 무신도 패퇴시켰다. 정조는 이 일을 기념하여 그에게 본인의 활을 하사했고, 채제공은 이를 기념하여 「사궁기賜弓記」라는 글을 남겼다.
1781년 3월 10일 규장각 제학 유언호兪彦鎬는 규장각 각신들의 집무소인 이문원을 홍문관과 가까운 도총부로 옮길 것을 제안하였다. 정조는 유언호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문원을 인정전 서편에 있던 도총부 자리로 옮겼다. 정조는 이 일을 기념하여 각신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였다. 이사한 규장각의 당시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역사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다음에 인용할 채제공의 시에 규장각 이전 초기의 제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단락을 나누어 인용한다.
규장각에서 시강하면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장편시를 지어 일을 기록하여 올린다 [『번암집樊巖集』 권2, 「시강규장각 봉성지부장구 기사이진侍講奎章閣 |
이 내용은 1776년 3월 정조가 즉위한 다음날 규장각을 창설할 것을 명한 것을 읊은 것이다. 규장각 창설의 목적이 역대 선왕의 작품을 보관하는 것이고, 아울러 대유산, 소유산의 장서각처럼 수천 권의 책을 규장각에 수장했음을 밝혔다. 석거각 역시 한나라 때의 장서각으로 한나라 선제宣帝가 학사들과 함께 학문을 강학했던 곳이다. 시에서는 정조의 규장각을 찬양하며, 이곳이 선왕들의 어제를 보관하는 곳이며, 동시에 장서 수장과 학문 강학의 장소임을 화려한 수식을 더해서 문학적으로 표현하였다.
細攷龍圖舊範䡄 용도각龍圖閣의 옛 규범을 자세히 고찰하여 |
이 부분은 규장각의 직제를 설명하고 이문원을 도총부 자리로 옮기게 된 과정을 시로 읊은 부분이다. 용도각은 송나라 역대 황제의 어제와 전적 등을 보관하던 기관이다. 정조는 「규장각지서奎章閣志序」에서 규장각 제도의 근원을 송나라의 용도각과 천장각에서 찾았다. 시에서도 6명의 각신을 둔 것이 바로 용도각 학사의 직제를 따른 것을 밝혔다. 아울러 규장각 각신의 집무처인 이문원에 정조가 친필로 붉은 비단에 “이문지원”이라고 쓴 어필을 내렸음도 알 수 있다.
규장각이 이전한 동궐(창덕궁)의 홍문관 부근 전경(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
時維五年春三月 1781년 춘 삼월에 |
이 부분은 규장각을 옮기고 나서 임금과 각신이 함께 강학하는 장면을 읊은 부분이다. 시임 원임 각신이 16명이라고 하였는데, 1781년 3월 시점에서 각신을 지냈거나 각신이었던 인물은 모두 17명이었다. 이 가운데 홍국영을 제외한 황경원黃景源, 이복원李福源, 서명응徐命膺, 채제공, 이휘지李徽之, 김종수金鍾秀, 유언호兪彦鎬, 정민시鄭民始, 김우진金宇鎭, 서호수徐浩修, 이병모李秉模, 정지검鄭志儉, 김희金熹, 김면주金勉柱, 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16인이 참석하였던 것을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각기 8명씩 동서로 나열해 있다가 음악 속에서 호명되면 배례를 올린 뒤 강학하기 위해 당을 오르는 모습이 시에서 드러나 있다.
講罷御廚來八珍 강론이 마치면 궁궐 주방에서 팔진미가 나오니 |
이 부분을 보면 강학이 끝나면 각신에게 음식과 술을 하사하며 그들을 우대했음을 알 수 있다. 1781년 3월, 채제공은 한성부 판윤으로 재직 중이면서, 규장각 전임 제학의 신분이었다. 정조는 전·현직 규장각 각신들을 불러 모아 학술과 문학을 논하는 성대한 모임을 벌였던 것이다. 문학을 통해 근신들과 친분을 다졌는데 규장각 각신은 그 모임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정조가 규장각 각신들과 함께 학문을 강학하고 그들에게 술을 내리며 아끼는 모습이 채제공의 시에서 잘 드러난다.
한번 규장각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관원은 규장각에 일이 있어 시임 관료가 임명되지 못하면 검교로서 임시로 일을 맡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정조가 규장각 각신들과 강학을 할 때에는 시임과 원임, 즉 현직과 전직에 구애받지 않고 규장각 관원들을 초치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규장각 원임 제학이라는 관함이 갖는 의미는 언제든 국왕이 친히 불러 볼 수 있는 지근의 신하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체재공이 이 시를 지은 직후인 1781년 7월 대사헌 김문순金文淳은 채제공을 논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여러 신하들의 상소로 인해 채제공의 입장은 더욱 곤란했다. 그의 혐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1776년 사도세자의 일로 영조를 무함했다는 이유로 벌어진 옥사 때, 환관의 공초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둘째, 홍국영이 말년에 형편이 어려워지자 채제공에게 의지하여 그와 뜻을 같이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홍국영이 채제공과 결탁했기 때문에 채제공도 역적이라는 논리이다. 셋째, 홍낙빈 집안의 가인家人이 그가 홍낙빈洪樂彬과 불궤不軌를 꾀하기 위해 내통했다는 소문을 흘렸다. 조정 대신들이 이를 듣고 채제공을 공격했다. 이러한 혐의 때문에 그는 1780년대 노론, 소론, 심지어는 같은 정파인 남인 문인들에게도 공격을 받는 고단한 처지였다.
이 혐의를 받는 동안 정조는 그에게 여러 차례 벼슬도 제수하고, 그를 변호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의 입장은 매우 강경했다. 정조는 좀처럼 그를 조정에 등용할 수 없었다. 1786년 그를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제수할 적에는 심지어 다른 대신들이 등청할 수 없도록 하고 그에게 밀부를 줄 정도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정조는 규장각 원임 제학에 대한 예우라는 명목으로 그에 대한 변치 않는 신임을 보였다. 정조는 1784년 채제공이 65세 때 화사 이명기李命基에게 명하여 그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정조는 채제공이 현재의 서울시 강북구 번동 일대인 명덕동에 은거해 있을 때에도 규장각 원임 제학이라는 명목으로 그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보냈다. 이처럼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규장각 원임 제학이라는 관함이 그의 정치적 시련기에 미친 영향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산속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규장각 옛 직함으로 땔감 400근을 내려주심을 받았다. 11월 그믐이었는데 성은에 감격하여 짓는다. [『번암집樊巖集』 권2, [병거산중 이규장구함 몽사소목사백근 시지월회 |
이 시 제목을 보면 정조가 땔감을 보내면서 “규장각 원임 제학 채 아무개”한테 준다는 봉서가 함께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던 채제공이 홍국영과 관련이 있다는 노론, 소론 측의 성토는 1780년대에 계속되었다. 1781년 결국 채제공은 은퇴를 구하며 치사를 청했지만, 정조는 오히려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였다. 채제공은 이 자리에 나가지 않고 사직하였고, 명덕동 산속에서 은거하였다. 이 시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지은 작품이다. 이때는 동짓달 그믐이었는데, 채제공은 쫓겨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이 시를 지었다.
수련은 두보가 자주 쓰는 투춘체를 써서 기상을 돌올하게 하였다. 규장각을 강조하면서 동사를 하나도 쓰지 않고 명사로 대구를 한 것도 은퇴해 있지만 기상을 보이려 한 채제공의 의도적인 수사법이다. 함련은 임금을 그리는 시인의 정을 노래하였고 경련은 풍광을 통해 연군戀君과 감군은感君恩이라는 시의 주제에 기여하였다. 함련과 경련은 정경이 교차하면서도 함련 상구의 ‘궁궐[玉宇]’은 수련의 ‘하늘가[天上]’를 이어받고 함련 하구의 ‘산속[山居]’은 수련의 ‘산골짜기[巖阿]’를 이어받아 시를 치밀하게 구성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 미련에서도 역시 ‘골짜기의 율관소리[谷律]’는 임금의 일을, 하구의 ‘주방의 재[廚灰]’는 신하의 일을 이야기하여 함련을 이어받고 있다.
그는 정치적 시련기에 국왕이 준 땔감이라는 일상의 선물을 계기로 해서 치밀하게 조직된 시를 지었다. 단순히 선물을 받았다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능력을 과시하며, 언제든지 정계에 복귀할 수 있는 능력과 국왕의 총애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을 시를 통해 알린 셈이다.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자 했기 때문에 위에 설명한 수사법대로 시를 굳세고 기상 있게 쓴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왕의 덕화를 찬양해서 국왕의 신임에 보답하는 모습을 시에서 노래하고 있지만, 결국은 정계에서 물러나 있지만 경세제민의 굳건한 의지를 내포하였다.
그가 규장각 제학을 지냈기 때문에 정조가 선물을 통해 신임을 보인 사례는 『번암집』 곳곳에 보인다. 한 예로, 정조는 세밑이 되면 채제공에게 달력을 보내주었고, 정계에서 은퇴한 채제공은 역시 이 일을 시로 남겨 국왕의 신임을 기념하였다.
동지날에 임금께서 달력 10건을 누추한 거처에 내려주셨다. 피봉에는 “규장각 원임 제학 채”라고 쓰셨다. 머리 조아리고 삼가 받아 시로써 감격을 적는다 [『번암집樊巖集』 권2, 「지일 어사력서십건 반급류차 외봉 서이 |
임금이 자신에게 철마다 선물을 보냈다. 국왕의 선물은 단순한 물건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그것은 정조가 그에게 보낸 하사품에 “규장각 원임 제학 채”라고 써 줌으로써 그가 언제든지 규장각 검교제학으로 국왕의 강학과 자문에 응할 자격이 있는 인물임을 보증해 준 것이다. 정조는 섣달그믐에도 규장각 영첨領籤을 명하여 태복시의 말을 타고 그에게 납약과 낙죽酪粥을 보내주었다. 정조의 하사가 일회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나는 황량한 강호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하며 신음하고 손님을 사양하였다. 비록 손님들도 나를 찾아오려 하지 않았지만, 내가 싫은 것이 아니라 권간이 호시탐탐 곁에서 비밀스럽게 염탐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오직 우리 성상만이 신을 덮어주고 신을 돌아봐주심이 가면 갈수록 더욱 도타웠다. [『번암집樊巖集』 권35, 「사조기賜租記」] |
위 글은 1782년 8월에 정조가 조세로 거둔 쌀을 보내주자 쓴 글의 일부이다. 당시 채제공은 홍국영과 화응한 역적이라고 여러 신하들의 논핵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는 홍수보洪秀輔처럼 같은 남인에 속했던 신하도 그를 논척할 정도였다. 채제공이 홍국영에 버금가는 역적이라는 논의가 나올 때마다 정조는 조정에서 그를 위해 변호하고, 논척한 인물들을 파직시키는 등 그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동시에 조정 바깥에서는 끊임없이 하사품을 보내면서 그가 규장각 원임 제학이라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이에 대해 채제공은 국가와 임금에 대한 우환憂患 의식을 보이며 경세가로서 본인의 역량을 글로 펼쳤다. 먼저 본인에게 쌀을 내려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읍하였지만, 이내 흉년에 자신보다 더 곤궁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걱정했다. 정조가 가까운 자신에게 쌀을 보낸 것은 희생으로 쓰일 소를 보고 불인지심不忍之心을 보인 양혜왕梁惠王과 같은 마음이니,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그 은혜를 만백성에게까지 끼칠 것을 국왕에게 충고하였다. 그렇게 하면 자신 같은 은거하는 신하는 굶어죽더라도 괜찮다고 하는 다소 과장된 관료로서의 자의식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규장각 정청은 선생, 즉 전임 관료가 아니면 비록 대신이나 홍문관 대제학이라도 출입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정조가 규장각을 각별하게 대우했다는 것이고, 정조 연간 규장각에서 근무했다는 경력은 한 관료의 관력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규장각 각신은 정조와 학술활동, 문예활동, 무예 단련에도 함께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채제공은 남인 가운데 유일하게 규장각 각신으로, 그것도 단번에 제학으로 선발되었다. 이 관력이 그의 정치적 시련기에 정조가 그와 연락하고 변함없이 그에게 신임을 보일 수 있게 한 발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규장각과 인연이 있는 채제공 관련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채유후蔡裕後 『호주집湖洲集』, 종조부 채팽윤蔡彭胤의 『희암집希菴集』이 소장되어 있다. 채제공 저술은 『번암집』 4건(奎 3134, 奎 4133, 奎 5372, 奎 5373)이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관련 자료로는 『갱재록羹載錄』(奎 7821), 『자규루상량문子規樓上樑文』(奎 10235), 『과암이공신도비명果菴李公神道碑銘』(奎古 652-1), 『견문록見聞錄』(古 4254-24) 등이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희암선생집』(奎 5189). 권수卷首 「희암집서希庵集序」 |
규장각 소장 『견문록見聞錄』(古 4254-24) |
『갱재록羹載錄』(奎 7821) 영조 어제시(좌) 및 채제공의 갱진賡進 시(우). |
『자규루상량문子規樓上樑文』(奎 10235) |
『과암이공신도비명果菴李公神道碑銘』(奎古 6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