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염(念)과 무념(無念), 그리고 망념(妄念) >
- 빠알리어 사띠(sati)의 이해 -
• 염(念)이란----
염(念)을 빠알리어로 사띠(sati), 산스크리트어로는 스므리티(smṛti)라고 하며,
한문으로는 염(念), 영어로는 mindfull이라 번역한다.
사띠(sati)는 불교에서 명상의 특성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용어인데,
남방수행 전통의 위빠사나(vipassanā) 혹은 동북아의 간화선(看話禪) 전통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시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사띠를 우리말로 번역함에, 마음챙김, 마음새김, 마음지킴, 마음집중(定),
마음모음, 주의집중, 알아차림, 깨어있음, 정념(正念),
염처(念處) 등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벽한 번역이라 할 수 없다.
그만큼 우리말에 딱 들어맞는 말이 없어 흔히 산스크리트나 빠알리어
번역이 그렇듯이 원어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염(念)’은 억념(憶念), 즉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
마음에 깊이 새겨서 잊지 않음을 말한다. 일찍이 경험한 것을 밝게
기억해서 잊지 않는 것, 생각해내거나 기억하는 것, 과거를 추억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일념으로 깊이 새기는 것을 염불(念佛)이라 한다.
‘염불’에서 말하는 ‘염(念)’이란 ‘새기고 지킴(守)’을 뜻한다.
그래서 이럴 경우, 사띠를 마음챙김, 마음지킴, 마음새김이라 번역한 말에 해당한다 하겠다.
한자 ‘염(念)’이란 지금 금(今)자와 마음 심(心)자가 합쳐진 말이다.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가? 과거인가?
아니면 미래의 일을 헤아리고 있는가? 지금 당신은 철저히
지금의 마음이 이곳에 머무르도록 할 일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염한다는 것은 지금 내 마음의 초점을 거기다가
맞추어 전념(專念)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럴 경우, 사띠를 ‘마음집중, 마음모음, 주의집중’으로 번역한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이런 말을 했다.
「선남자여! 만약 한량없는 백천 만억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당할 적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들고 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염하면)
관세음보살은 즉시에 그 말을 관하고 모두 해탈케 하느니라.」
그리하여 일념으로 불ㆍ보살의 명호를 염(念)하면 불법의 바다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다. 이 경우엔 사띠를 마음새김, 염처(念處),
정념(正念) 등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입으로 부르는 것을 송(誦)이라 하고, 생각으로 하는 것은 염(念)이다.
염송(念誦)을 많이 하고, 염불(念佛)을 많이 하고,
수행을 많이 해서 깊은 자기본성에 도달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염해서 염하는 것을 보는 것이 관(觀), 즉 반야바라밀관이다.
다시 말해서 소리를 내서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 ’ 하면 바라밀송이 되고,
거기에 염(念) 혹은 생각이 함께 있으면 염송(念誦)이 되고,
염송을 하면서 염송을 하는 그 자리를 비춰보면 그게 바라밀관(波羅密觀)이 된다.
그래서 심지어 “지금 부처를 염(念)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염불시수(念佛是誰)]?”라는
공안(公案)이 생겨나기도 한 것이다.
염(念)은 또 생각하는 마음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개 생각은
잡다한 생각이기 마련이고, 잡다한 생각은 망념이므로 염을 잘못하면 망념(妄念)이 되기도 한다.
<대승기신론>에서 우리의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
즉 생멸심(生滅心)과 진여심(眞如心)이 있다고 했다.
생멸심이란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측면을 말한 것인데, 이 생멸심이 바로 중생심이다.
중생은 대상에 따라서 온갖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번뇌 망상이 마치 죽 끓듯 일어나서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즉, 이는 세간법의 세계, 망념을 말한다.
즉, 마음이 함부로 움직여 타락돼가는 과정을 생멸문이라 한다.
생멸문은 본래 고요함을 잃고 인연 따라 생멸하는 마음, ― 번뇌가 들끓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로 이 생멸심이 망념(妄念)이다.
이와 같이 염을 잘못하면 망념이 된다. 망념은 산란하고 안정되지 못한 마음이다.
그런데 이른바 오온(五蘊)을 추구하면 색(色)과 심(心)이 있다.
오온이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하는데,
색을 제외한 나머지 수ㆍ상ㆍ행ㆍ식이 마음(心)이다.
육진(六塵)이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말하는데,
이들이 6근(六根)을 통해 몸속에 들어와서 우리들 정심(淨心)을 더럽히고
진성(眞性)을 덮어 흐리게 해서 망념을 일으키므로 진(塵)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육진 경계를 넘어서야 무념(無念)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망념을 넘어 무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생멸문에서 돌아서서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중생이 아무리 자기 자신의 본래마음인 진여성(眞如性)을 자각하지 못하고
망념에 끌려 다닌다 해도, 마음 바탕의 청정한 진여성이 사라지거나
망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여성과 그 본각(本覺)이
근저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진여 본각을 알지 못하는 미혹이 미혹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능히 관찰해 마음에 망념(妄念)을 없애 깨끗해지면, 수순하여 진여문에 들어갈 수 있다.
자신 안의 마음 바탕을 관해 그것이 그 마음 안에 떠오르는 망념(妄念)과 하나가 아니라는 것,
마음은 본래 무념(無念)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 곧 자신의 마음을 진여로 자각하는 것이다.
• 무념(無念)이란 생각에 꺼들리지 않음이다. --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는 <육조단경> 핵심내용으로서
이를 삼무(三無)라고도 한다.
<육조단경>에는,
「선지식이여! 나의 법문은 위(역대 불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바탕)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나니.
(善知識 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皆立:無念為宗 無相為體 無住為本)」라고 했다.
여기서 무념(無念)이란 생각하되 생각에 꺼들려 집착하지 않음이다.
즉, 무념(無念)이란 사물을 생각하고 접촉하면서도 그 생각에 얽매이지 않음이다.
이는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무념(無念)이란 염(念)에서 염이 없음이요,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마음이다.
무념(無念)은 생각 속에 헛된 생각이 없는 것으로,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무념은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생각하며
대상과 접촉하는 작용이다. 대상과 접촉하면 보고
듣는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작용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아야
비로소 무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념에서 ‘무’는 잘못된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 바른 생각이 없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즉, ‘무념’에서 ‘염(念)’은 잡념 혹은 번뇌를 뜻한다.
따라서 잡념이 없음이 무념이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 말하고 있다.
「선지식들이여, 지혜로 살펴서 안팎이 분명해야 자신의 본디 마음을 안다.
본디 마음을 알면 ‘해탈’이고, 해탈이면 ‘반야삼매(般若三昧)’이며,
반야삼매는 ‘무념’이다.
무엇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모든 법을 보되 마음에 집착이 없으면 바로 이것이 무념이다.
이 마음을 쓰면 마음이 모든 곳에 두루 하되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오직 깨끗한 본디 마음이 몸에 있는 감각기관에서 활동하되 경계에
물듦이 없게 해서 오고감이 자유로워 그 쓰임에 걸림이 없는 것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이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이니,
이를 무념행(無念行)이라고 한다.
만약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끊기만 한다면
이는 법에 얽매인 것이며 한쪽에 치우친 견해라고 한다.」라고 했다.
즉, 모든 법을 보되 마음에 집착이 없으면 어떤 경계를 마주해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무념’이 ‘불생’이고 ‘불생’이 무념이 된다.
그리하여 <대승기신론>에서는 무념(無念)은 평등하다고 했다.
불교에서 평등이란, 이것저것에 꺼들리지 않고 늘 마음이 한결같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진리를 깨달아야 평등 세계를 관하고 너도 나도 차별 없는 자리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분이 제일 높은 어른이냐 하면 일체처에 평등을 나투는 분. 부처님이 제일 높은 어른이다.
만약 이것저것에 꺼들리지 않는 무념(無念)을 얻은 사람은 마음이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 하는 것을 알 것이니 무념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 생겨나고(生), 머물고(住), 달라지고(異), 사라지는 것(滅)을 아는 것이 무념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평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생각은 그 본바탕이 평등하고 원래 무념이라는 말이다.
생주이멸이 없는 것을 무념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고, 무념이란 생주이멸에 꺼들리지 않아서 늘 마음이
평등(평정)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효(元曉) 대사도 중생들의 생각은 본래 무념인데
이 무념을 얻으면 너와 내가 평등하다고 말했다.
마음이 자재(自在)하지 못한 것은 사려(思慮)가 마음을 어지럽게 하기 때문이다.
상등인 사람은 말 한마디에 당장 깨달음을 얻어
곧 무념(無念)을 증험하지만, 중등, 하등인 사람들은 번뇌가 깊고
무거워서 좀처럼 사라져 없어지지 않으므로 선각(先覺)한 이가
일념(一念)의 법으로써 인도해야 한다.
즉, 사람들을 교도(敎導)하는 방편으로
우선 일념지법(一念之法)을 가르친다고 했다.
일념지법(一念之法)이란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한 가지 생각에만 전념(專念)하고 있으면 마음이 한곳에 집중돼
안에 있는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바깥 대경(對境)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오래오래 마음을 길들이고 또 익숙해지면,
마음이 항상 저절로 한곳에 집결해 동요하지 않아서
정(定)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움직이는 것도 정지(靜止)함도, 잘 때에도 깬 때에도
마음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경지에 도달해 무념의 본체를 수순해
이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철(性徹) 스님은 “견성(見性)을 무념이라고도 한다.
견성과 성불의 근본은 무념이다.”라고 했다.
※타성일편(打成一片)---타성일편이란 중생이 헛되게 헤아리고 가늠하는 판단을 버리고
수천 가지 차별되는 사물이 하나로 융합되는 것, 주객의 차별을 떠남을 말한다.
공부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 거짓이다.
기적이 무엇인가. 기적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내 마음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다.
내가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다. 만약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한다면 깨끗함이 나를 묶고 속박해 부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고 바깥 경계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무념(無念)은 수행자가 견지해야 할 틀이다. 바깥 경계에 매몰되지 않고
안으로 항상 맑음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걸림이 없어야 한다.
그와 같이 생멸하는 망념을 따라가지 않고 그 망념을 넘어
무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생멸문에서 돌아서서 진여문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생멸문에서 몸만 돌리면 바로 그 자리가 곧 진여문이다.
그렇지 않고 온갖 생각이 만발한 것을 두고 잡념(雜念) 혹은 망념(妄念)이라 한다.
그래서 염려(念慮)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염은 억념(憶念)으로 이해되는가 하면
망념(妄念)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 일체법을 성립시키는 망념(妄念)----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체제법이 망념에 의해 성립된다고 했기에,
일체제법을 성립시키는 망념(妄念)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어찌하여 일체제법이 망념에 의해 성립되는가. 우리 범부의 생각으로
미치지 못한다. 범부의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이 망념에 의해 성립되지만,
이 망념을 떠나면 일체의 경계지상(境界之相)이 없어지고 만다.
백장(百丈懷海, 749~814) 선사는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신령스런 빛이 홀로 들어나 육근 육진을 벗어났다(靈光獨露逈脫根塵)
본체가 참 모습을 드러내니 문자에 의지하지 않네(體露眞相不拘文字)
마음 성품 오염되지 않아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니(心性無染本自圓成)
망념만 여의면 바로 여여불이라네(但離妄念卽如如佛)
백장은 사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기에 망념만 제거하면
그대로가 부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망념이 없는 불타의 경계에서는 일체제법이 사라지는 법이다.
불타의 경계에는 있는 그대로가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망념의 존재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가 있다.
심성(心性)은 하나이고 전체이지만 망념(妄念)은 이 심성(心性)이 무명(無明)에 의해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해 인식계(認識界)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무명이 곧 망념이다. 무명은 마음의 분열, 분별을 일으키는 기회인(機會因)이다.
그러나 성인(聖人)은 무명도 없고, 마음의 분열도 없기에 망념이 없다.
따라서 마음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 하는 말은 죄다 망언(妄言)이다.
망념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깨치는 것인가?
모든 이름과 모습, 즉 하늘과 땅, 그리고 이 세상의 삼라만상 모든 것,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다시 말해서, 이 몸도 마음도 자연도 심지어 세상사까지도,
이 모두가 허망한 정식(情識)의 망령된 분별이다.
정식(情識)이란 마음에서 생기는 사사로운 생각을 말한다.
따라서 그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임을 깨달아서 이에 현혹되지 않으면
곧 본래 움직임이 없는 제 불성을 깨치게 된다. 이것이 마음을 깨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망념이 없는 불타의 인식계, 즉 불타의 경계는 어떠한가.
망념이 없는 불타의 경계는 그대로 거울과도 같아서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지고 사라지는 경계로서,
비추어진 그대로를 거울 자체가 인식하지 않듯이, 또한 비추어진 일체를 객관으로 인식하지 않듯이,
오직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알 뿐이다. 이것이 불타의 인식계이다.
그러나 범부의 인식계는 인식하는 주체가 있고, 인식의 대상인 객체가 있다.
이와 같이 주체가 있고, 객체가 있는 분별상이 바로 망념이다.
이와 같이 범부의 인식계는 무명망념(無明妄念)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지고
범부가 경험하는 세계가 형성된다. 그래서 망념(妄念)이 일체법을 성립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범부가 경험하는 인식의 내용에는
자타(自他), 정사(正邪), 선악(善惡), 우열(優劣) 등의 차별이 생기는 법이다.
이상과 같이 현상의 세계인 일체법은 범부의 인식으로는 망념(妄念)이 아집(我執)을 일으키고
‘나와 너’라는 차별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자아(自我)를 중심으로 한 가치인식,
그것을 기초로 한 온갖 차별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만일 망념(妄念)이 사라지면 일체법은 그 본래의 모습대로 차별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더욱이 차별이 초월된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에, 말로써, 언어로써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며,
이름 지어 말할 수 있는 명자상(名字相)도 없고, 마음으로 생각해내는 심연상(心緣相)도 없어
무이(無二)의 필경 평등한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즉, 인식계를 주객(主客)으로 분열시키는 무명, 망념과 아집(我執)이 깨우침에 의해
사라지면 주객분열의 모습으로 나타난 대상의 세계는 소멸돼 본래면목을 찾게 되는 것이다.
※명자상(名字相)---불교에서 ‘명자(名字)’란 말에는 여러 가지 뜻, 쓰임이 있다.
명색(名色)ㆍ명목(名目)ㆍ가명(假名)이라는 뜻도 있고, ‘이름뿐'이라는 뜻 외에,
이름과 문자, 세상에 널리 알려진 평판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그리고 선(禪)에서는 경(經)ㆍ논(論)ㆍ조사(祖師)의 어록(語錄)ㆍ공안(公案) 따위를
총칭해 명자라고도 한다. 여기에서는 선종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할 때,
문자(경전)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명자상이란 경전의 문구에 얽매이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