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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9일 용산 참사 장례식 모습 의 사진들
이젠 어제가 되었는데, 1월 9일, 355일만에 치러진 용산 참사 희생자 분들의 영결식과 노제를 취재했다. 아침엔 차를 점검해봐야 해서 순천향병원 대신에 서울역으로 바로 갔다. 비록 지난 주에 보상에 합의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검찰이 재판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출하지 않고 있는 3000쪽 분량의 수사기록이다. 지난 6일에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이광범)가 미공개 수사기록을 확보해 증거로 참고하겠다고 밝혔는데, 1심 내내 공개하지 않고 버티기로 일관하던 검찰을 어떻게 갈궜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약 900여쪽 분량은 미공개로 남아 있는데, 여전히 검찰은 검/경에 불리한 부분을 감추고 있다는 의혹을 스스로 사고 있는 것이다.
진상 규명은 제대로 되지도 않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죽였다고 검경이 죄를 뒤집어 씌워서 거꾸로 구치소 생활을 하는 중이니 기가 찰 일이다. 꼭 1894년에 있었던 드레퓌스 사건 보는 기분이다. 돈으로 보상이 있었고, 정운찬 총리가 8일에 순천향병원을 찾아와서 사과를 했다지만, 유가족들은 1년 동안 입은 상처와 기억은 치유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가족 중에 1명이 아직 때가 아닌데, 일찍 유명을 달리하는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그 심정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조사를 낭독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얘기한 것은, 용산은 끝난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이란 점이다. 용산으로 좁혀서 보면 진상 규명 문제가 남아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망루에 올라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것으로만 알고 있고, 망루에 그들이 왜 올라갔는지는 관심없어 한다. 그리고 그걸 모두 조금이라도 더 보상금 타먹으려는 얄팍한 잔대가리를 굴려서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그냥 남의 일이니 신경 끊으면 된다.
더 크게 보면, 지금까지 우리나라 재개발은 모두 용산과 같은 방식으로 자행되어 왔다는 점이다. 성남시의 출발이 된 광주대단지 사건[각주:2]부터 끊임없이 재개발 문제는 항상 개발업체와 철거 용역으로 포장한 폭력배들, 그리고 이를 묵인하며 뒤에서 보기만 하다가 철거민들만 공격하는 경찰과 관련되어 왔다. 2008년 4월 총선 당시 한나라당 후보들은 "뉴타운"을 앞장 세워 대거 당선에 성공했는데, 뉴타운을 한다는 것은 특정 지역을 재개발한다는 것이고,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주민들에게 크건 작건 생존권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각주:3]. 그리고 꼭 지역 재개발 이슈만이 아니더라도 자본의 논리로, 돈을 더 벌어야 겠다는 가진 자들의 욕심으로, 이런 일은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돈 더 벌겠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공명심과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해 삽질하겠다고 설레발 치는 시궁창 쥐 1마리도 있지만.
아침 11시 즈음이다. 저녁때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할 거 같아서 원래 역 주변에서는 먹지 말라는 금기를 깨고 서울역사 3층의 전문 식당가를 찾았더니 영결식장이 한 눈에 다 보였다. 그래서 한 컷 찍었다. 아직 준비 중이고, 운구차와 유가족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사진에도 보이지만 경찰은 많은 병력을 서울역에서 용산 남일당 건물까지 배치했다. 이날 동원된 병력은 4,700여명 정도. 경찰은 서울역 주변을 기동대 버스와 방패를 든 전/의경으로 둘러쌌다. 경찰의 의도는 서울역 광장에서 외부에서 영결식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11시 38분, 만장들이 먼저 도착해서 역사 계단에 섰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풍물패가 분위기를 띄웠다. 의자만 있던 곳에 순식간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이곳 뿐만 아니라 계단과 2층에도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경찰 추산 2000명이라지만, 경찰은 항상 이런 행사나 집회 참가 인원을 몇 분의 1로 줄여 추산하는 습관이 있고, 내가 보기엔 1만명 정도? 롯데마트 쪽에서 웬 무뇌아들이 기자회견한다고 생쇼를 했지만, 아무도 관심가져주는 이 없었다. 나 역시 다른 기자로부터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기만 했다.
영결식에는 야당 정치인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최근 비자금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 한명숙 전 총리, 이해찬 전 총리가 보이고, 같은 줄에는 김근태 전 상임고문이 보인다. 뒤쪽 자리에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앉았다. 맨 앞 줄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있는데, 백 소장의 왼쪽 빈 의자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 사제단의 문정현 신부가 앉았다.
심상정 진보신당 전 대표와 아직 무소속인 정동영 의원의 모습.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의 문정현 신부. 노구에도 불구하시고 1년을 용산 유가족분들과 함께 하신 진정한 어른. (어버이 연합 따위는 가라)
영결식장 뒤쪽에 도열한 각 단체들의 깃발
12시가 좀 넘은 시각, 드디어 5대의 운구차가 영결식장에 도착했다.
차례로 들어오고 있는 운구차 행렬.
영결식 장 제일 앞쪽에 앉은 유가족들.
한 청년이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유가족들에게 드렸다. 커피였는지, 전통 차였는지는 모르겠다.
한 유족이 눈물을 감추질 못한다.
요즘 민주당에서 징계 문제로 시끄러운 추미애 의원도 왔다. 그리고 노회찬 대표 옆에 앉은 사람은 창조한국당 송영오 대표다. 난 이 정당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철판 슬레이트로 만든 만장. 장례준비위원회에서 만든 만장은 아니었다.
"원통합니다"라는 말로 조사를 매듭짓고 내려가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뒷모습.
오늘 손팻말 2종류. 하나는 용산으로 국한해서 봤을때, 다른 하나는 "재개발"이란 점을 봤을때.
조사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야당 대표들. 그런데 솔직히 창조한국당은 왜 왔는지 모르겠다. 자유선진당은 원래 뿌리가 한나라당이니 안와도 무방한 집단이지만.
김미선님의 진혼무.
야당 대표들이 조사를 하는 모습. 노회찬 대표는 5명의 고인들에게 하늘에 올라가시면 그날 같이 죽은 고 김남훈 경사의 손을 잡고 위로해달라는 조사를 했다. 고 김남훈 경사도 경찰 제복만 아니면 이번 5인의 고인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무허가건물 옥탑방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 지휘부는 내부 사정을 정확히 파악못한 상태에서 진입을 반대했던 경찰특공대를 무리하게 밀어넣었다. 노회찬 대표는 김남훈 경사 역시 희생자로 간주했다.
조사 중인 배은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제단 뒤쪽 모습. 고인들의 관이 나린히 있다.
서울역 광장 영결식을 마치고 이제 용산으로 이동할 무렵, 경찰 움직임이 바빠졌다. 사진에서 보듯 경찰 병력은 교통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들은 완전 무장하고 대기했다. 여기는 지하주차장에서 남영동쪽으로 나가는 길목이다. 슬슬 이동할때쯤 되어 교통 통제를 실시하는데, 어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아줌마가 거칠게 경찰에게 항의했다. "뒤에서 차가 막히는데 왜 길을 막고 있냐"고. 경찰을 욕하는 건지, 영결식 참석자들을 욕하는 건지는 현장에 있던 나도 모르겠다. 물론 경찰 지휘부는 그냥 대답안하고 무시했다.
운구차를 가로막고 선 기동대원........처럼 보이지만,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대기 중인 운구차와 기동대원일 뿐이다. 아직 영정과 관은 제단에 그대로 모셔진 상태다.
이동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만장. (1)
이동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만장. (2) 이날 행진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14시 25분. 교통 경찰들이 차선 통제를 이유로 앞쪽에 섰지만, 이들 뒤로는 완전 무장한 기동대가 대기했다. 행렬은 출발하지 않았다.
수많은 만장들. 재작년 고 이병렬님 장례식 때 이후로 처음 본다. 그러나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앞으로 서울 도심에서 이런 만장을 보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인간이 가진 능력 중 가장 무서운 것임과 동시에 가장 유용하기도 한 "망각". 독일이 그래도 일본보다 좋은 평을 듣는 이유는 주변국들을 의식하여 끊임없이 제2차 세계 대전의 과오를 반성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도 마찬가지이다.
대기 중인 운구차와 용산 남일당 빌딩까지 행진 시작을 기다리는 사람들.
고 이상림씨의 장남 이충연씨가 영정을 들고 섰다. 이충연씨는 구치소 수감 중에 장례식 참석을 위해 임시로 석방되었다. 9일 12시까지는 다시 구치소로 돌아가야 한다.
고 양희성님
고 한대성님
고 이성수님.
고 이성수님의 영정과 관.
고 윤용헌님. 상주가 상념에 잠겼다. 355일만에 겨우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어도, 아직 진상 규명도 제대로 안되었으니.........
영결식장을 떠나는 고인들을 지켜보는 영결식 참석자들. 이제 곧 행진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고인의 관과 영정이 먼저 운구차에 운구된 후, 뒤를 따르는 유족들.
운구차가 먼저 출발한 다음 대열을 선두에서 이끌 풍물패가 사물놀이를 연주하고 있다. 마스크를 쓴 경찰들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손에 손을 꽉 잡고 선 유가족들
이제 용산 남일당 빌딩 현장으로 출발했다. 원래 1500시에 용산 남일당에서 노제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서울역 광장에서 출발한 시간이 1500시 즈음이었다. 항상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긴 하지만.
대오가 용산으로 출발한 직후, 나도 차를 끌고 출발했다. 행렬 뒤를 따라갈 수는 없어서 남대문 경찰서 옆길로 해서 용산고를 지나 달렸더니 행진 대열보다 거의 1시간 가까이 도착했다.
신용산역 4번 출구 근처다. 이미 이곳에도 1000여명의 경찰 병력이 완전 무장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직 행진 대열이 도착하려면 한참 남아서 교통을 막을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러고 있었다. 이 상태는 얼마 안가 풀렸는데,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일종의 예행 연습이었다. 덕분에 용산 전자상가에서 원효대교로 가려던차들은 10분 ~ 15분 정도 멈춰 서 있어야 했다.
16시경, 멀리 삼각지 로터리 즈음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노제 장소로 이동해왔다. 그런데 왼쪽에 보이는 디자인 수도 플래카드는 .... 누구를 위한 디자인 수도라는 호칭인지 모르겠다. 결국 오세훈의 자기 과시와 홍보용의 세금 낭비 밖에 안된다. 나중에 오세훈이 대통령 선거에 나오면 "저, 서울을 디자인 수도로 만들었습니다" 라고 이력서에 적을 게 뻔하니 속에서 불이 타오른다. 자기 돈 아니라고 펑펑 써대면서 써야 할 곳은 안쓰니.
경찰 지휘부들. 경찰 지휘부는 항상 손에 4~5개씩 무전기를 들고 다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드디어 운구 행렬이 나타났다.
운구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이충연씨.
그리고 길 반대편에서 운구 행렬과 추모 행렬과 같이 행진하고 있는 기동대. 보다시피 헬멧에 방패, 진압복까지 완전 무장했다.
누구 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경찰 채증요원들의 손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못보는, 안보는, 사실과 진실을 담을 카메라와 그 손입니다.
법과 질서라...
그럼 여기는....?
용산 남일당 빌딩 앞에 도착한 운구차.
노제를 치른 무대 차량의 차주는 의경 출신으로 화물연대 노조원이었습니다.
낭송이 아니라 절규였던 송경동 시인의 조시 <저 슬픈 망루를 보라>
<저 슬픈 망루를 보라>
저 집을 보아라
저기서 우리 모두가 불탔다
밀려나고 쫓겨나는 이 시대 모든
가난한 이들의 꿈이 불탔다
세상은 이만 살기 좋아졌는지도 모른다는
우리들의 기대가 순박함이 무지가 불탔다
이만하면 민주주의지 않냐는 헛소리들
헛소문들 헛담론들이 불탔다
저 집을 보아라
곧 무너져 내릴 저 역사의 파란집을 보아라
다시 저렇게 쫓겨날 피압박민중들의 집을 보아라
다시 저렇게 뭉개질 가난한 꿈들을
공장을 일터를 삶터를 보아라
똑바로 보아라
눈 부릅뜨고 생피 뚝뚝 떨어지도록 똑바로 보아라
혼자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해봐도
같이 살아보겠다고 합심해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물대포와 곤봉과
배제와 소외와 왜곡과 죽임뿐인
이 추악한 사회를 이 더러운 사회를
이 병든 사회를 똑바로 보아라
그러나 다시, 저 파란집을 보아라
끊어진 다리를 세우고
꺾여진 관절을 다시 맞추고
어렵사리 다시 일어서는 우리 모두의
저 파란집 파란꿈을 보아라
새롭게 지어지는 우리 모두의 미래를 보아라
소유와 착취를 위한 건설이 아니라
삶을 위해, 평등을 위해, 평화를 위해
다시 우리 모두가 지어야 할, 올라야 할
저 저항의 망루 투쟁의 망루 연대의 망루
해방의 망루를 보아라